아마도 1994년일 것이다. 나는 타이핑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느린 일체형 흑백 컴퓨터 SE를 뒤로하고 애플의 최신형 기종인 파워맥 6100을 구입하게 되었다. 이 두 기종의 속도차는 극렬한 것이어서 마치 티코를 타다가 포르쉐를 모는 듯한 느낌이었다.

파워맥 6100은 키보드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SE에 번들로 제공된 스텐다드 I 키보드도 기계식 키보드의 명품(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에 대한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다)으로써 손색이 없었지만 필자는 아무래도 키보드 레이아웃이 제대로 갖추어진 애플 익스텐디드 키보드II가 더 좋았다.

그리고 만 3년동안 파워맥 6100은 굳굳히 필자를 보필해주면서 매월 담뱃값을 보태는데 일조를 해주었다. 아 어찌 잊을까? 애플 확장 키보드 II. 키를 입력하면 손끝에서 확장 키보드 II 특유의 딱딱함이 손끝에서 전해진다. 애플 확장키보드 2와 함께 워드프로세싱을 하노라면 세상 어느 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애플 확장 키보드 II는 젊음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추억의 키보드라 할 수 있다.

ADB와 파워키

키보드에 잘 아는 사용자라 할지라도 ADB란 용어는 처음 들어본 사람이 많은 것이다. ADB는 애플이 독자적으로 만든 키보드, 입력기기의 독자적인 규격으로 이는 Apple Desktop Bus의 약자이다. 흔히 애플을 컴퓨터 업계의 선구적인 기업이라고 하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PC의 PS/2 입력 단자가 보급되 전에 이미 시장에 선보인 ADB는 여러 개의 주변장치를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착탈이 편리해 PC의 DIN 방식이나 Serial 방식에 비해 두세대 정도는 앞선 인터페이스 였다. 애플 주변기기 - 키보드, 마우스, 트랙볼, 타블렛, 조이스틱과 같은 입력기기는 대부분 ADB 방식을 사용했다.

ADB 방식의 재미있는 점은 단순한 신호뿐만 아니라 전원이 공급된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그당시 PC 사용자들이 상상도 못했던 키보드로 전원을 켜고 끌 수 있는 기능을 내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애플 스탠다드 키보드 I과 II, 확장 키보드 I과 II가 이에 해당된다)

위 두가지 옵션을 가지고 있는 애플 확장 키보드 II는 지금의 키보드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키보드이다.

뽀대 그리고 심플함

애플의 디자인의 기본 컨셉은 심플함이다. 대부분의 애플 하드웨어들은 과장 없이 심플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단순함 속에서 절제된 멋과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키보드에 한해서 국한한다면 최근 애플 키보드들이 지나치게 디자인을 중시해 키감을 희생시킨 반면 예전의 애플 키보드들은 디자인과 키감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었다.

키보드 상단 부분을 보면 좌측 상단에 특유의 다섯가지 색 애플 마크가 붙어 있다. 98년 애플 마크가 단색으로 바뀌었긴 했지만 아직도 다섯빛의 애플 마크는 매킨토시 매니아 및 올드 PC 매니아들을 가슴을 설레개 한다.


그림 1. 확장 키보드 II에 새겨진 애플 마크


전체적인 키 레이아웃은 몇몇 맥에 특화된 키를 제외하고는 표준 PC 키보드와 거의 유사하다. 아마도 이 키보드가 한창 때 100$에 가까운 가격을 유지하는 제품이다 보니 업무용쪽에 초첨을 맞추었고 이에 맞게 제품 디자인 및 키 레이아웃이 구현된 듯 하다. (국내의 확장 키보드II의 가격은 거의 20만원 수준으로 지금 물가로 따지면 30~40만원에 육박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키보드 상판의 우측 상단엔 매킨토에서만 볼 수 있는 파워키가 붙어 있다. 일부 기종을 제외한 대부분의 매킨토시 기종에서 이 키를 사용하여 전원을 켜거나 끌 수 있다.


그림 2. 애플 확장 키보드 II의 모습


키보드를 틀어 옆을 한번 보자. 우선 옆에서 애플 키보드를 보면 대부분의 키보드와 달리 부드러운 곡선으로 키보드 측면이 마감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를 흔히 클래식 디자인 혹은 유러피안(European) 디자인으로 부른다. 자칫 단조롭기 쉬운 키보드 디자인에 위와 같은 곡선은 액센트 역할을 한다. PC 키보드의 경우 키토로닉스사의 Eurotech 씨리즈에 확장 키보드 II와 같은 곡선미를 엿볼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우아하고 세련되었다는 점에서 유러피언 스타일의 키보드 디자인을 무척 좋아한다.

좌측에 또 재미있는 점이 있다. 세로줄 무늬가 그것인데 앞에서 설명했던 곡선의 우아함과 함께 일정 부분의 긴장감도 가져다 준다. 이런 부분은 일반 PC 키보드에서는 찾기 힘든 점이다. 그리고 좌.우측의 두개의 ADB 포트는 본체와의 연결 및 마우스, 타블렛, 조이스틱의 연결로 사용된다. 매킨토시 키보드의 대부분은 이와 같이 입력 포트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PC와 같이 마우스 케이블이 극단적으로 길어지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키보드 높이 조절 슬라이드. 키보드를 정면으로 봤을 때 확장 키보드의 키보드 높이 조절 슬라이드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의 용도는 일반 키보드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키보드가 두단계 많아야 세단계의 높이 조절만 가능한 것에 비해 확장 키보드 II는 슬라이드 방식으로 최소 높이와 최대 높이 사이를 가변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가끔 키보드를 오래 사용하다보면 슬라이드 자체가 뻑뻑해지는 경우가 있지만 어쨌든 이는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확장 키보드 II의 디자인은 심플하지만 나름대로의 뽀대를 가지고 있다. 맥과 함께 PC도 같이 사용하고 있는 필자는 애플 확장 키보드 II와 같은 디자인의 PC 키보드가 나온다면 이유도 안 물어보고 살 것 같다.


그림 3. 애플 확장 키보드 II의 키보드 높이 조절 슬라이더


딱딱한 키감의 묘미

애플 확장 키보드 II는 오리지널 일본 알프스 사의 넌클릭 기계식 스위치를 가지고 있다. 근래에 나온 기계식 키보드들은 몇몇 제품을 제외하곤 알프스사의 키 스위치를 쓰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는 원가의 차이 때문인데 분명 오리지널과 이와 유사한 스위치와는 적지 않은 품질 차이가 난다.

애플 확장 키보드 II의 키감은 분명 아론처럼 키감이 가볍거나 IBM M씨리즈 처럼 무게감 있는 느낌은 아니다. 키 입력시는 의식없이 키 스위치가 눌러지지만 키를 누르고 난 후 반발력은 꽤 있는 편이다.

마치 키감이 가벼운 기계식 입력할 때 손가락들이 매우 리드미컬하게 마치 격렬한 디스코를 치 듯이 움직이는 반면에 애플 확장 키보드 II를 사용할 때는 탱고를 추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일정의 리듬감을 느낄 수 있는 반면에 그 흐름은 격하지 않다.

또한 처음 키를 눌렀을 때에 저지감이 적어 키를 손가락으로 눌렀을 키캡의 딱딱함이 손가락에서 느껴진다. 이것은 다른 키보드에서 볼 수 없는 매우 신선한 느낌으로 애플 확장 키보드 2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의 키감이라고 할 수 있다.

새 제품은 존재하지 않기에 애플 확장 키보드 II를 누르는 느낌은 체리 클릭 키보드의 입체감에는 못미치만 그외의 기계식 키보드 가운데에서는 상당히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애플 키보드 중에 이보다 일짝 나온 확장 키보드 I이나 GS 키보드는 더욱 좋은 키감을 보여주고 있다고들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전에 올라와 있는 GS 키보드 리뷰와 이후에 등록될 확장 키보드 I 리뷰를 참고하면 되겠다.

끝내면서…

10여년전의 애플 확장 키보드 II의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다소 센티멘탈해진 느낌이다. 확실히 필자의 키보드에 대한 관심의 첫 시작은 이 애플 확장 키보드 II 였다. 그 당시에는 비록 기계식 키보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때부터 적어도 키보드가 이러해야 한다는 기준은 마련된 것 같다.

레어 아이템이긴 하지만 오래된 매킨토시 대리점이나 사용자 집을 둘러보면 운좋에 이 키보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PC 사용자들에게도 다행인 점은 iMate와 같은 USB to ADB 변환 케이블이 등장해 맥 뿐만 아니라 IBM 호환 기종에서도 사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특히 eBay 와 같은 곳에서는 애플 확장 키보드 II가 심심치 않게 올라오곤 하니 키보드에 관심 많은 사용자 분들은 한번 도전해 보길 바란다.


그림 4. 애플 확장 키보드 II의 모습 2


10여년전 파워맥 6100와 충실한 집필 도구가 된 애플 확장 키보드 II. 10년 지난 후에 사용해봐도 ‘명불허전’이라고 녹녹치 않는 키감과 디자인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나에게는 20대를 떠올리게 해주기에 더욱 소중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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