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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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증인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재판장은 딱딱한 목소리로 엄숙하게 선언했다. 방금 신원을 밝히고 증인 선서를 마친 김철민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증인석에 앉았다.
"그럼 원고대리인이 먼저 신문하십시오."
그러자 검사석에서 30대 초반의 여인이 일어나, 재판장에게 머리 굽혀 인사했다.
"알겠습니다, 재판장님."
그녀는 이번 사건의 수석 검사 황미란이었다. 다른 검사들이 승산이 없다며 기피하는 사건을 맡아 기적적인 승리를 얻어 내기를 여러 차례, 덕분에 검찰청 안에선 '소방수'로 불렸지만 바깥의 변호사들 사이에선 '마녀'란 별명으로 통했다.
"김철민씨. 지난 1월 18일, 증인은 K대 부속 병원 원장으로서 문제의 장비를 도입할 것을 이사회에 제안했지요?"
김원장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 예, 맞습니다."
"어째서 그런 제안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짧은 한숨을 쉬며 말문을 열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사회가 있기 사흘 전, 그러니까 1월 15일의 일부터 얘기하겠습니다. 그 날 의료공학과 양승아 교수와 응용물리학과 고성식 교수가 제 방에 찾아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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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두 사람이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예까지 온 겁니까?"
김철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양승아 교수가 나서서 싹싹하게 답했다.
"당연히 원장님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거죠."
양교수는 사십 평생을 의료기기 개발에 매달린 학자였다. 크고 넓은 얼굴은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고 허리와 엉덩이가 하나로 이어진 몸매는 도무지 매력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낙천적인 성격과 능란한 말재주 덕분에 주변에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반면에 고성식 교수는 말할 때는 단어 하나도 신중하게 골라 쓰고 농담은 아예 입에 담지 않을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고(故) 고준호 박사의 뒤를 이어 큐빗 메모리 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세웠지만, 높은 자리나 감투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오직 연구에만 정진했다.
비록 외모와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그들은 공동 연구를 진행하면서 말다툼 한 번 벌이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교수와 양교수를 자석의 양극과 음극에 비유하곤 했다.
김원장은 접객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들을 마주보고 앉아 이렇게 물었다.
"그래, 대체 무슨 부탁인 겁니까?"
그러자 고교수가 살짝 머리를 수그렸다.
"별 거 아닙니다. 저와 양교수가 공동 개발한 의료 기기의 도입을 이사회에 상신해 주십사 하는 겁니다."
"아, 예전에 교수 회의에서 거론했던 그 기계 말이군요." 김원장은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겼다. "드디어 3차 동물 시험도 통과한 겁니까?"
"물론이죠. 그리고 보건복지부에서 마지막 임상실험 허가서까지 받아 왔답니다."
양교수는 제법 두께가 있는 서류철을 김원장에게 내밀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류를 빠르게 훑어 보기 시작했다.
"과연 그렇군요. 적어도 법률적으론 모든 요건을 완벽하게 갖췄군요. 이 정도면 이사회 임원들을 어렵잖게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늙은이들은 최신 기계라면 눈을 뒤집고 환장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김원장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양교수와 고교수를 힐끗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문제는, 여기 들어갈 사람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군요."
"그건 일단 기기가 병원에 들어간 다음에 고민할 문제죠." 양교수가 대답했다.
"딴은 일리 있는 말이군요." 김원장은 서류철을 챙기면서 말했다. "임원 회의는 요번 목요일에 있습니다. 금요일에 결과를 알려드릴 테니, 그때까지 조금만 참고 기다리십시오."
양교수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3년을 기다려 온 일인데 까짓 사나흘을 못 기다리겠습니까? 저흰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이사회에선 군말 없이 기기 도입과 실험을 허가해 줬습니다. 그 다음주 월요일부터 임상실험실에서 설치 공사가 시작되어 여드렌가 아흐레 뒤에야 끝났죠."
"그렇게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 걸 보니, 증인과 이사회 임원 중에서 안전성을 의심한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군요?"
"예, 그때까지의 실험 결과를 살펴보면 문제가 될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황검사가 신문을 마치자, 재판장이 피고측 변호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변호인은 반대신문을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재판장님."
변호인석의 중년 남성이 차분하게 답했다. 그는 전력공사의 의뢰로 이 사건을 맡은 J 법무법인의 대표 장성훈 변호사였다. 얼핏 보기엔 어수룩한 인상이었지만, 그 속에는 음흉한 너구리가 들어앉아 있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반대신문도 하지 않는 걸까요?"
황검사의 옆자리에 앉은 박부원 검사보가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그야 두고 보면 알겠지." 황검사는 그렇게 속삭인 다음에, 다시 목청을 높였다. "다음 증인으로 원고, 조상래씨를 부르겠습니다."
호명에 맞춰 검은색 정장을 입은 젊은이가 걸어 나왔다. 그는 증인 선서를 하는 내내 목에 멘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만지작거렸다.
"조상래씨, 지난 3월 8일, 원고는 피보호자인 조상구씨를 치료 대상으로 삼는 실험 동의 각서에 서명하셨죠?"
조상래는 서글픈 목소리로 답변했다.
"예, 그랬지요."
"그 실험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관해서 충분히 숙지하신 다음에 서명한 것이겠지요?"
"당연하죠." 그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동생의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요. 병원 사람들에게 설명을 듣고, 가족들과 의논을 거듭한 끝에 결정을 내린 겁니다."
"동생인 조상구씨께서는 어떤 질병을 앓고 계셨길래 인체 실험에 자원하게 된 겁니까?"
"제 동생은 4년 전, 열차 사고로 전신마비가 됐습니다. 그때 녀석은 겨우 스무 살이었죠." 조상래는 고통스런 과거를 회상하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동생이 목숨이나마 건진 게 천만다행이라 여겼지만 얼마 가지 않아 깨끗이 죽지 않은 걸 원망하게 됐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동생을 돌보느라 우리 가족은 허리가 휘도록 고생해야 했으니까요."
조상래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고, 방청석에선 그가 짊어져야 했던 불행을 동정하는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훌쩍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련한 변호사는 여론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님. 검사는 본 사건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로 진실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방금 증언을 공식 기록에서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변호사의 이의를 인정합니다. 검사는 사건과 관련된 질문만 하십시오."
황검사는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그 실험에 지원하기로 결심한 겁니까?"
"예, 사실 그 인체 정보 어쩌고 하는 기계에 관한 정보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귀가 솔깃했습니다. 병원 사람들을 붙잡고 늘어져서 실험에 자원했죠."
"그런데 그만 사고가 터진 거군요."
조상래는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전력공사 간부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빌어먹을, 그래요. 철도공사, 그 다음엔 전력공사였어요! 처음엔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들더니, 이젠 시체조차 건질 수 없게 만들어 버렸죠. 세금으로 운영되는 회사 치고 제대로 돌아가는 회사가 한 군데도 없어요. 월급도둑들이 모여서 사람 잡는 짓이나 하고 있죠, 염병할 놈들 같으니라고!"
"증인은 폭언을 삼가십시오." 재판장은 준엄하게 경고했다. "지나친 욕설과 폭언은 법정 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조상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분기를 가라앉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전력공사 간부들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장성훈은 섣불리 맞대응을 하는 대신에 팔짱을 끼고 관망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황검사는 세 번째 증인으로 양승아 교수를 불러들였다.
"양승아 교수님, 지난 1월 15일, 교수님은 김철민 원장을 찾아가 고성식 교수님과 함께 개발한 의료 기기의 임상실험을 제안했습니다. 맞습니까?"
증언대에 선 양교수는 황검사의 질문에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맞습니다."
"여기 모인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의료 기기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양교수는 미리 준비된 답을 따발총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그 기기의 정식 명칭은 '인체 정보 재구축 기기 HIRCM-02'입니다. 오늘날 광범위하게 보급된 물질 전송 장치와 마찬가지로 양자원격이동 원리에 기반한 장치입니다. 이미 의학계에선 그 원리를 이용해 외과수술 없이 종양이나 파편을 제거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죠. 하지만 인체 정보 재구축 기기는 그런 종류의 소극적인 응용에서 멈춰서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간 겁니다."
그녀는 증인석에 준비되어 있던 물 한 컵을 마시고 숨을 돌린 뒤에 말을 이었다.
"양자세계에선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어떤 양자상태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습니다. 복사불가원리에 의해 잘 모르는 양자상태를 완전히 복사하는 것도 불가능하죠. 그러나 원래 송신장소의 상태를 붕괴시키고 수신장소에서 그 상태를 재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양자원격이동의 형태죠."
양자 역학에 무지한 대부분의 방청객들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을 멀뚱거렸다. 하지만 양교수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단숨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물질 전송 장치는 무기물의 입자 정보 또는 생물의 DNA 정보와 입자 정보를 읽어 들여 목표 지점에서 재구성할 수 있지만, 앞서 말씀 드린 이유로 인해 그 정보를 저장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4년 전, 고(故) 고준호 박사님이 개발하고 고성식 교수가 완성시킨 불확정 큐빗 메모리 덕분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죠. 이 메모리는 불확실한 양자상태를 불확실한 상태 그대로 저장할 수 있습니다. 내용조차 알 수 없는 정보가 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하실는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어느 위치에 어떤 종류의 정보가 저장됐는지 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립니다. 예를 들어 췌장암에 걸린 토끼의 정보를 읽어서 저장했다고 칩시다. 암세포 부위의 입자 정보가 저장된 위치를 찾아 정상 세포의 입자 정보를 덮어씌우고 변질된 DNA 정보를 교정한 다음에, 전체 정보를 재구성하면 어떻게 될까요?"
"췌장암이 깨끗이 치료된 토끼가 나타나겠죠." 황검사가 대답했다.
"그렇죠. 그게 바로 인체 정보 재처리 기기가 하는 일입니다. 종래의 외과 수술과는 달리, 2차 감염의 위험성 없이 빠르고 정확하게 장기를 이식할 수 있죠. 게다가 완치 가능성은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깝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꾸벅이며 졸던 방청객들마저 정신을 차리고 귀를 기울였다. 황미란 검사는, 연구팀에서 보건복지부의 임상실험 허가를 얻기까지 무수한 실험을 거듭하며 인체 정보 재구축 기기의 안정성을 향상시켰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기기는 보건복지부의 제1급 의료기기 안전수칙을 완벽하게 준수했습니다. 요컨대 청진기만큼이나 안전하다는 뜻이죠."
양교수는 자신만만한 말투로 그렇게 주장하며 증인석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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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곤씨는 조상구씨의 주치의였죠?"
네 번째 증인인 정재곤은 덩치가 좋은 30대 중반의 의사였다. 살집이 두터운 사람에게 흔한 다한증(多汗症)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그의 이마에선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네, 그랬습니다. 제가 담당한 건 기껏해야 석 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만."
"사고 당일, 조상구씨가 사망하게 된 경위를 자세히 진술해 주십시오."
정재곤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땀을 닦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 보자, 우린 그날 새벽 6시부터 정보 재구축 작업을 준비했습니다. 준비 작업이 끝난 건 오전 10시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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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작이군요."
정재곤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실험실의 한쪽 벽에는 거대한 철제 상자처럼 생긴 인체 정보 재구축 기기가 자리잡았다. 왼쪽 끄트머리에 줄지어 붙은 계기판 앞에선 고교수를 비롯한 여러 연구원들이 마지막 점검에 열을 올렸다. 그 반대편에선 여러 다발의 케이블이 튀어나와 바닥에 누워 있는 금속제 캡슐로 연결되었다. 투명한 유리 뚜껑이 씌워진 캡슐 안에는 미라처럼 바짝 마른 청년이 알몸뚱이로 누워 있었다.
"이식용 척수에 이상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살펴 보게."
양교수의 말에, 정재곤은 허리를 숙여 장기 보존장치의 모니터에 떠오른 숫자와 문자를 확인했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양교수는 시선을 돌리며 목청을 높였다.
"고교수, 그쪽도 이상 없나?"
막 점검을 끝낸 고교수는 머리를 아래위로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럼 이제부터 스캐닝을 시작하겠네."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을 신호로 연구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본격적인 재구축 처리 과정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상구는 척수신경을 다쳐서 전신마비에 걸린 환자였다. 그래서 연구팀이 계획한 시술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조상구의 DNA 정보와 입자 정보를 불확정 큐빗 메모리에 저장한다. 그 다음에는 본인의 체세포에서 복제된 척수신경을 읽어서 손상된 척수신경 정보 위에 덮어 씌운다. 마지막으로 모든 정보를 재구성하면, 전신마비의 속박을 떨친 조상구가 두 다리로 벌떡 일어설 것이다. 마치 기적처럼.
"피험자 스캔 준비 완료."
연구원 중 한 사람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스캔 시작."
양교수의 명령에 맞춰 연구원들이 차례로 스위치를 눌렀다. 기적소리처럼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원통에서 휘황한 빛이 쏟아져 나와 사방을 밝혔다. 3차원 정보 스캐너가 움직이며 조상구의 육신은 마치 지우개로 지워지듯이 사라졌다. 그 몸뚱이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스캔 종료, 피험자 스캔 종료."
연구원들이 다시 계기판을 조작하자 소리가 잦아들며 빛이 사그러들었다. 이제 캡슐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교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계기판에 떠오른 홀로그램 화면을 보면서 연구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데이터가 제대로 저장됐는지 확인하게."
"이상 없습니다. 피험자 조상구씨의 데이터는 백 퍼센트 완벽하게 저장되었습니다."
그러자 양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제 이식용 척수를 읽어 들일 차례군."
그 순간이었다. 임상실험실의 불이 꺼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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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엔 어떻게 됐습니까?"
"재구축 기기는 다른 중요 설비와 마찬가지로 병원 지하의 비상 발전기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동을 멈추지 않았죠." 정재곤은 잠시 숨을 돌리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처음엔 정전이 곧 끝날 거라고 여겼죠. 헌데 변압기 사고 때문에 적어도 8시간은 정전이 계속될 거라고 하더군요. 다들 사색이 됐죠. 발전기의 연료 탱크에는 4시간 분량의 기름밖에 없었고 재구축 기기에 내장된 배터리는 10분이 한계였으니까요. 이미 정보화된 환자를 다시 재구성할 수도 없었어요. 메모리를 유지하는 것만이라면 시간당 평균 600킬로 와트의 전력으로 충분하지만 입력과 재구성 작업에는 최대 1200킬로 와트가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비상 발전기와 배터리의 최대 출력은 800킬로 와트였죠."
"그래서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우리는 미친 듯이 뛰어 다니면서 예비 배터리를 긁어 모았죠. 발전기가 꺼지면 배터리를 갈아 끼우면서 버티려고 했죠. 하지만 그나마도 겨우 2,30분을 버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결국 오후 2시 30분경, 마지막 배터리가 떨어지면서 재구축 기기는 완전히 꺼져 버렸죠."
정재곤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조상구씨는 사망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데이터가 완전히 날아가 버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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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지역 경찰이 나와, 그 일대를 커버하는 낡은 대형 변압기가 폭발하는 바람에 정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응급 수리로 정전이 복구되기까지 무려 12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말했다.
"덕분에 민원이 폭주해서 아주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다음에는 S대의 전기공학과의 늙수그레한 교수가 증인으로 나섰다. 그는 전력 공사가 낡은 변압기를 방치한 탓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터졌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이 사고는 점검을 게을리 한 직원들의 나태함과, 유지보수 비용을 곶감 빼먹듯이 빼돌려 사리사욕을 채운 간부들의 탐욕이 빚어낸 인재(人災)인 것입니다." 노교수는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모든 증언이 끝난 다음에, 황검사가 직접 나서서 피고들이 저지른 실수와 태만을 낱낱이 짚어 나갔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이들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징역 10년에서 5년 형에 처해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검사의 서릿발 같은 구형에도 장성훈 변호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죽었다면 피고에게 과실치사의 혐의가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죠.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마치 뒤통수를 철퇴로 내리찍는 듯한 충격에 온 법정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사방에 깔린 것은 강고한 침묵, 황검사조차 잠시 할 말을 잃고 헤맬 정도였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DNA 정보와 입자 정보의 형태로 메모리에 기록된 데이터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데이터가 지워진 것을 인간의 사망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실로 통렬한 반격, 논리의 반격이었다. 그 논리에 설득 당한 사람들, 그 논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재판장은 정숙함을 요구하며 의사봉을 두들겨야 했다.
"변호인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겁니까?" 황검사가 거세게 반박했다.
"어째서 말이 안 됩니까? 지난 05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냉동인간 사건의 판례를 생각해 보십시오. 미 법원에선 '대뇌 활동이 정지한 채 냉동 처리된 인간은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죠."
그것은 캘리포니아의 냉동인간 주식회사에서 보존 중이던 냉동인간이 녹아서 부패한 사건이었다. 그 유족은 회사를 상대로 막대한 액수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미국 대법원에선 냉동 보존된 시신의 인간성을 부인하며 회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황미란 검사가 이런 종류의 공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판례를 그렇게 좋아하신다면 저도 한 말씀 드리죠. 지난 02년 3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전송 사고는 어째서 무시하는 겁니까? 거기서 어떤 판결이 나왔는지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당시, 물질 전송 장치로 마르세이유에서 남극 기지로 가던 유럽 탐사대원 세 명이 재구성 도중에 갑작스런 단전(斷電)으로 소실되는 사고가 있었다. 시체라고 해 봐야 뭉개진 살점 몇 조각을 건진 게 전부였다. 당시 운송 회사의 변호인은 '전송 중인 인간은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볼 수 없다'며 장성훈과 비슷한 논리를 펼쳤다.
"잘 알고 있습니다. 유럽 연합 대법원에선 '자신의 의사로 물리적인 육체를 비물리적인 형태로 변환시켜 특정 목적지로 이동하는 자는, 명백하게 살아 있는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죠."
"그런데도 그런 억지를 부리는 겁니까?"
"검사야말로 자발적인 전송과 수동적인 저장 상태를 똑같이 취급하는 억지를 부리지 마십시오. 전송 과정은 너무나 순식간에 이뤄지기 때문에 도중에 인간적인 특징이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논리적인 데이터로 변환되어 저장된 인간은 법률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인간이라고 부를만한 특징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물리적인 행동도 불가능하고 논리적인 사고(思考)도 불가능하니 냉동인간과 다를 게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방청석의 소란이 아까보다 더욱 커졌다. 재판장은 재차 삼차 의사봉을 두들기며 이렇게 선언했다.
"시간이 늦은 관계로 일단 휴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은 내일 오전 9시에 속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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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이 너구리의 말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는 게 충격적이군요."
검사실에서 내일 재판을 위해 자료를 정리하던 박부원 검사보의 말이었다. 그는 물론, 황미란 검사의 얼굴빛도 결코 밝지 않았다.
"감성적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재판장이 듣기엔 상당히 논리적이었던 모양이야. 내일 재판은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때, 고성식 교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황검사가 권하는 자리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검사님은 변호인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고교수는 그 동안 검찰 수사에 많은 도움을 준, 믿을만한 조력자였다. 그래서 황검사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데이터 형태로 저장된 사람이 죽은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냐는 말은 분명한 억지죠. 하지만 논리적인 결함을 찾긴 어렵더군요. 내일은 대단히 어려운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죠."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내일, 한 분을 증인으로 불러 세우십시오. 그러면 그 분이 변호인의 주장을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분쇄해 줄 겁니다."
그 말에, 황검사는 반가운 얼굴로 귀를 쫑긋 세웠다.
"정말입니까? 당장 그 분의 이름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고교수의 입에서 흘러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황검사와 박검사보의 안색은 납빛으로 굳어졌다.
"교수님, 설마 농담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황검사가 신음을 토했다.
"저는 농담이나 하려고 여기 찾아온 게 아닙니다. 인체 정보 재구축 기기를 실험하다가 피해를 입은 분들을 구제하고 책임을 면피하려는 자들을 응징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검사님도 저와 같으리라 생각하고 찾아온 겁니다. 제 제안이 너무 뜬금없이 들릴는지도 모르지만, 부디 절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고교수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황미란 검사는 콧잔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상대편의 논리를 깨지 못하면 패배로 직결되기에, 제아무리 터무니없는 제안일지라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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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인간의 기억과 사고 패턴을 읽어서 양자 컴퓨터에서 똑같이 재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뮬레이션일 뿐이지, 인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의식이 머물 수 있는 물리적인 뇌조직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건입니다. 실제로 뇌조직이 없는 무뇌아는 비자발적 안락사의 대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죠."
K대와는 오랫동안 경쟁관계에 있던 Y대 뇌의학과 교수 김형석은 부드러운 미소로 증언을 마무리했다. 방청석에 있던 양승아 교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내 참 기가 막혀서! 저 자식이야말로 두개골 속에 대뇌피질이라곤 하나도 없을 거야. 여하간 Y대 놈들의 저 능글맞은 상판은 정말 꼴도 보기 싫다니까."
"그럼 눈을 감고 안 보면 될 것 아닌가?"
고교수의 악의 없는 한마디에 양교수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더니 이내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되물었다.
"그나저나 정말 그 분을 증인으로 내세울 셈인가?"
"게임을 할 때는 마지막 카드까지 아낌없이 써야지." 고교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김형석이 반대신문을 받지 않고 증인석을 내려가자, 재판장은 황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검사, 변호인의 주장을 인정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재판장님. 저는 잘못된 논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변호인 측의 변론과 증언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증명해 보이십시오."
황검사는 눈을 돌려 고성식 교수를 바라봤다. 그는 말없이 머리를 주억였고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증인으로 고준호 박사를 부르겠습니다."
방청객들 중에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들만으로도 작은 소동이 일어나기에는 충분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의심과 의혹을 뚫고 고성식 교수가 걸어 나왔다. 그는 증언대 위에 소형 컴퓨터를 올려놓고 조용히 옆으로 비켜섰다. 컴퓨터의 홀로그램 투영기에서 여러 다발의 희푸레한 빛이 치솟아 허공에 하나의 형체를, 나이 지긋한 노인의 얼굴을 그렸다. 그리고 그 입술의 움직임에 맞춰 스피커에서 정교하게 합성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저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서합니다."
침묵이 열병처럼 번져 나갔다. 너무나도 황당한 사태 앞에서 사람들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오직 한 사람, 장성훈만이 눈을 부릅뜨고 사납게 으르렁댔다.
"황검사, 고교수님,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신성한 법정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전 장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제 아버님께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 고교수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이거야 원, 제 아들놈이 너무 고지식한 놈이라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홀로그램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먼저 제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는지를 설명 드려야겠군요. 사실 전 5년 전에 폐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여기저기 암세포가 퍼져서 잘 버텨봐야 1년이 한계라는 말을 들었죠. 헌데 그 즈음에 제 연구를 이어받은 아들놈이 불확정 큐빗 메모리를 완성한 겁니다."
"전 교외에 있는 개인 연구실에서 인체 정보 재구축 기기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완성될 무렵에는 이미 아버님의 병세가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지 오래였죠. 아버님께선 의학 발전을 위해 인체 정보 재구축 기기의 첫 번째 실험 대상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데이터로 변환시켜 메모리에 저장해 드린 겁니다."
그리고 고준호 박사가 아들의 말을 받아서 이었다.
"하지만 재구축 처리는 불가능했습니다. 암세포가 번진 늙은 몸뚱이에는 이식용 장기를 복제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세포 조직이 남아 있질 않았거든요. 어차피 죽어 없어질 몸이라면 데이터 저장이 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쓰는 편이 낫겠다 싶어 제 아들놈더러 저장 실험에 써 달라고 부탁했죠. 설마 이런 형태로 살아남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습니다."
"지금, 그러니까, 고준호 박사님께선 입자 정보와 DNA 정보로 저장된 상태에서도 의식을 유지하고 계시단 말씀이십니까?"
황검사마저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준호 박사는 유쾌하게 웃으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대뇌피질은 수백억 개의 신경세포, 즉 뉴런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들 뉴런과 뉴런을 잇는 시냅스는 인간의 기억과 사고가 이뤄지는 통로이자 자아(自我)가 머무는 장소입니다. 뉴런은 시냅스를 통해 아주 미세한 전기신호를 보내서 정보를 주고받고 기록하죠. 요컨대 뉴런이 반도체 소자라면 시냅스는 회로의 역할을 하는 셈이죠. 그리고 불확정 큐빗 메모리에 저장된 뉴런과 시냅스의 입자 정보는 그 내부에 축적된 엄청난 양의 전하(電荷)를 이용해 기억을 유지하고 창조적인 사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방청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높은 파도처럼 일어났다. 재판장이 규칙적으로 의사봉을 두들기는 소리에 소란이 한풀 꺾일 무렵, 장성훈 변호사가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교수, 지금 저 홀로그램이 당신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예, 본체는 아직도 연구실에 계십니다. 무선 네트워크로 여기까지 모셔온 거죠. 사실을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제 연구실로 찾아오십시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공개하겠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장성훈은 패배를 인정하며 고개를 꺾었다. 그때, 재판장이 홀로그램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고준호 박사님, 기록을 보면 박사님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군요."
"편의상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가짜 장례식도 치렀죠. 덕택에 제 아들놈이 조의금으로 한 몫 단단히 챙겼습니다." 고박사는 낄낄대며 웃었다.
"박사님이 진짜 고준호 박사님이란 사실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제 스캔 기록과 DNA 정보를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관련 자료를 증거로 제출할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 저장된 개인의 DNA 정보는 증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법률적으로 동일인 여부를 인정받기 위해선 실제 육체에서 추출한 DNA 지문을 동사무소에 보관된 본인의 DNA 지문과 비교해야 합니다."
그러자 고성식 교수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스캔 당시 아버님의 육체는 사망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아버님을 재구성해서 실체화할 수는 있지만, 그랬다간 DNA 검사에 필요한 조직을 채취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실 겁니다."
"이봐요, 시대에 뒤떨어진 법률로 과학의 성취를 재단하는 짓을 하지 마시오. 나는 틀림없는 고준호요. 정보화된 채 의식을 유지하며 살아 있는 고준호란 말이오!"
고준호 박사의 뜨거운 항변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어쩌면 지금의 당신은 고준호 박사의 기억과 사고 패턴을 읽어서 양자 컴퓨터에서 재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마치 저처럼 말입니다."
재판장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의사(擬似) 사고 패턴이 입력된 인공 두뇌가 내장된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매끌매끌한 플라스틱 피부가 씌어진 눈꺼풀은 기계적으로 깜박였고 투명한 렌즈는 차갑게 반짝였다.
"그렇게 뻔한 사기를 칠 것 같습니까? 의심이 간다면 당장이라도 조사해 보십시오."
고교수가 필사적으로 반박했지만, 재판장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제가 교수님을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고박사님이라 주장하는 증인의 이야기를 무턱대고 불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재판관입니다. 비록 시대에 뒤처졌을지언정 현재 사회를 지탱하는 법률로 사건을 심리하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당신네 법률가들한텐 융통성이란 게 없소?" 고박사가 빈정거리듯 물었다.
"지난날, 당신들 인간이 지나친 융통성을 발휘해 들쭉날쭉한 판결을 내린 탓에 우리들 로봇이 재판관을 맡게 됐다는 사실을 상기해 주십시오." 재판장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증인을 고준호 박사라고 입증할 법률적인 증거가 없는 한, 그 증언능력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증인은 이만 증인석에서 내려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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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이유로 피해자는 이미 법률적으로 사망한 것과 동일한 상태에 있었다고 간주되므로, 피고인들의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한다." 검사실에서, 황미란 검사는 아까의 판결문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한숨을 쉬었다. "살인자들이 어떻게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냐며 울부짖던 조상래씨의 얼굴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군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박검사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두 손을 번쩍 들고 쾌재를 부르던 너구리 녀석의 능글맞은 낯짝도 잊혀지질 않아요."
황검사는 책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양교수와 고교수에게 사과하듯이 말했다.
"그렇게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도 재판에 이기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희끄무레한 홀로그램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고준호 박사님에게도 폐를 끼쳤군요."
"검사님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세요." 양교수가 그녀를 위로했다.
"예, 맞아요. 게다가 놈들은 근무 태만과 비리로 재산상 손실을 끼친 혐의에 대해선 유죄 판결을 받았으니, 민사 소송에선 조상래씨한테 유리하게 작용하겠죠." 박검사보가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에요." 황검사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2심과 3심이 열릴 때까지 법률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고박사님의 증언은 여전히 인정받지 못할 거에요. 그러면 지금과 같은 판결이 반복되겠죠."
그때, 고박사가 입을 열었다.
"법률 문제라면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
그 말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황검사의 얼굴에도 깜짝 놀란 기색이 완연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생각해 보시오, 오늘 재판을 취재한 기자들은 엄청난 기사거리를 건졌잖소? 육신을 버리고 불멸의 존재가 된 과학자와 그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법률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과 대립, 이 얼마나 심오하고 흥미진진한 얘깃거리요? 오늘내일 안으로 인터뷰 요청이 물밀듯이 밀어닥칠 테니, 황검사도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편이 좋을 거요."
"그렇게 언론에서 떠들면 여론이 움직여 게을러터진 국회의원들에게 법률을 개정하라는 압력을 넣을 거라, 이 말씀이군요." 양교수는 감탄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지, 수십 년 전의 황우석 사건에서도 그랬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학자 말이라면 무조건 신뢰하는 경향이 있거든. 여하간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법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껏 노력합시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고박사의 말을 따르기로 굳게 약속했다. 황검사는 그제야 한시름 덜고 의자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박사님 덕분에 우리는 법률적인 문제에서부터 철학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과제를 떠안게 됐군요. 그런데 고박사님께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물음에, 홀로그램은 입가에 어색한 웃음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 너무 어려운 질문이군. 나로서는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딱히 대답할 말이 없구려. 그런 문제는 아무래도 과학자보다는 철학자를 찾아가 묻는 편이 좋지 않겠소?"
<<끝>>
전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and freedom of world!
영광된 내일을 위하여! for glorious tomorrow!
해피 키보딩딩!!! Happy Keyboardingding!!!
- DJ.HAN -
작성된지 6개월이 지난 글에는 새 코멘트를 달 수 없습니다.
전공했던 주제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상래라면 전력공사보다는 병원을 고소했을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