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한 가지를 설명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키보드가 손가락에 달라붙는 느낌"에 관해서 이다. 이런 느낌, 혹은 키보드가 "착착 감겨 온다."는 비과학적인(?) 느낌은 키보드를 누른 후에 이것이 재빠르게 되돌아오되, 지나친 반동을 주지 않고 따라오는 것 때문에 가지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리 키 캡을 누른 손가락을 빨리 들어올려도 키 캡이 손가락에 계속 붙어부드럽게 따라 올라오기에 이런 느낌이 들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키 캡 표면이 얼마나 매끄럽게 처리되었는가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 실제로 키보드의 표면은 극히 미세한 요철 처리가 되어 있다. 만약 이를 완전히 매끈하게 만들게 되면 오래 타자하게 되는 경우에 손가락 끝에 땀과 약간의 기름때가 형성되어, 손가락이 키보드에 달라붙는 느낌(이는 키보드가 달라붙는 듯한 느낌과 전혀 반대되는 일이다.)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이 경우에는 손가락을 비누칠을 해서 씻는 것이 좋다. 아니면 재빠른 타자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키보드를 사용하게 되는 경우 중심키인 "J"와 "F" 키 등은 반질반질 닳아 버리기 일쑤이고, 손가락이 이에 달라붙는 느낌을 지니게되는데 이 경우에는 타자 자체에는 별로 안 좋지만 자신이 그 키보드를 그 만큼 오래 사용했다는데서 오는 정신적인 만족을 느끼는 수가 많다.

알프스 타입의 84 키보드 선호

그 후 알프스 키보드가 나타났다. 87년의 일로서 금성 사가 286 컴퓨터를 발표하면서 함께 이 알프스 키보드를 소개했던 것이다. 알프스 키보드, 혹은 알프스 타입의 키보드라는 용어가 흔히 사용되는데, 실상 이것은 옳은 표현은 아니라고 본다. 일본의 알프스 사는 전기적인 접점을 기막히게 만드는 전문 회사이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의 부품을 가지고 만드는 전자 제품들은 접점이 불량하여 래디오의 볼륨을 돌리면 찍찍대는 잡소리가 나기도 하고, 작은 불꽃이 튀면서 접점이 녹아 버리는 등의 일이 다반사였다. 특히 카 래디오의 채널 선국용 키보드 타입 스위치 등이 그런 문제가 많아서 인지 이런 제품들은 모두 외국산의 부품을 수입해다 쓰는 불상사가 있었다(물론 이제는 훌륭한 국산품들도 나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을 확인할 기회가 없었음이 유감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나라에서 일본 알프스 사의 제품을 많이 들여다 쓰게 된 것 같다. 이들은 컴퓨터 키보드에 사용되는 부품, 즉 키 스위치도 기가 막히게 잘 만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또한 이들이 마우스의 기계식 접점을 잘 만드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들의 제품은 금성 사를 통해서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다. 최초에는 모두 수입에 의존했고, 나중엔 금성-알프스 사가 새로 설립되었다. 여기서 만들어진 키보드가 바로 알프스 키보드란 이름을 가지게 된 키보드이다. 처음에는 금성-알프스에서 만든 제품은 모두 금성 컴퓨터에만 채용이 되었다. 이 당시 금성 사는 다른 회사들과 달리 키보드에 대한 AS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불량률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키보드 사업이 확장되게 되자 이것이 청계천의 조그만 컴퓨터 상에서 시작한 신성전자의 뉴텍 제품에 쓰이게 되었다. 이 회사에서도 대만제 키보드를 수입해 쓰면서 그 AS로 골치를 썩히다가 원가에 있어서 약 5,000원 정도가 상승하는 알프스 키보드로 전환하면서(생산자에게 있어서 이 5,000원은 적은 경비가 아니다), 몇 년간 거의 이의 AS에 대한 걱정을 않아도 좋았다고 한다(이 때는 84 키보드 시절이다). 당시 이 회사의 박호영 부장은 가장 AS가 많던 키보드 부문에서 문제가 안 생기게 되니 그 원가 부담은 조금 있었지만 AS를 위한 전화 응대며, 기술자 파견 등의 업무가 없어져서 결과적으로 큰 이익을 보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알프스 키 스위치가 좋았고, 겉모양을 중시하는 금성 사가 워낙 이 키보드의 모울드를 잘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키보드의 모울드는 정말 종이 한 장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잘 만들어져 있어서 아무리 키보드를 세게 두드려도 다른 잡음이 안 날 정도이다.

필자는 금성의 AT 제품을 사면서 이 기계식 키보드(오우디오 택타일 휘이드백 방식은 아님)의 성능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적당한 긴장감을 가져다 줄 정도의 키 눌림도 그렇거니와 오랫동안 쓰는 데도 불구하고, 스프링의 세기가 일정하며(어떤 키보드는 이 스프링의 강도가 변함), 글자가 안 나오는 키가 생기지 않는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같은 키보드를 쓰는 사람들로부터도 동일한 리포트를 받게 되는 점으로부터 이 키보드에 대한 신뢰가 구축되었다고 하겠다.

금성 사에서만 이 키보드를 채택하고 있을 때에도 필자는 어렵사리 한 개의 키보드를 여분으로 구해 놓았고, 나중에 뉴텍에서 이 키보드를 판매함을 알고 두 개의 키보드를 더 사 놓았으며, 이 네 개의 키보드는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사용되고 있다(세 개는 필자가, 한 개는 동생이 쓰고 있다). 단 한 번 이 키보드의 고장을 경험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개의 키를 두드리면 몇 개의 글자가 발생하기도 하고, 또 다시 멀쩡해 지다가 어느 순간에 별 희한스런 에러가 다 나타나곤 했다. 여러 가지로 진단을 해보았지만 키보드의 문제임이 분명했다. 이를 뜯어서 고치려고 키보드를 거꾸로 들었더니 새까맣고 미세한 가루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유치원생 아들 녀석이 자석을 시험하기 위하여 자화된(magnetized) 쇳가루를 컴퓨터 키보드 옆에서 가지고 놀다가 쏟았다는 것이다(이 것이 일으키는 현상은 매우 희한스러운 것이므로 꼭 한 번 시험해 보길 권한다). 결국 이것을 털어 내고 나니 전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 이후에는 투명한 사각형 플라스틱 키보드 덮개를 꼭 사용하고 있다. 사실 먼지가 앉은 키보드를 두드릴 때 손가락 끝에 묻어 나는 먼지 가루(?)에 대한 감각이 별로 좋지 않았었는데, 그같은 문제도 키보드 덮개를 사용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마이크로네트의 한규면 선생처럼 키보드에 대한 입맛이 까다로운 분도 이 키보드에 반해서 한 번에 여러 개를 구입하여 지금까지 쓰고 있으며, (주)한글과컴퓨터에 있는 수십 대의 컴퓨터가 이 84 키의 알프스 키보드를 사용하고 있음도 다른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현재는 이 금성 알프스의 키보드 역시 오우디오 택타일 휘이드백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금성 사는 키보드 부문의 사업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자사의 제품에는 이를 계속 채택하고 있다. (이 키보드 부문은 한국 마벨 사에 넘겨졌다.) 결국 치코니 키보드와 금성 알프스의 제품은 별 차이가 없는 알프스 키 스위치를 기본으로 한 제품으로서 제품의 완성도 면에서는 금성 알프스의 제품이 더 낫게 생각된다. 이는 이 두 개의 키보드를 분해해 본 사람이라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플라스틱 모울드를 만든 정성과 PCB 제작 기술 등에서 금성과 치코니 사(실은 태국의 어떤 업체의 OEM)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알프스 키보드의 명성이 높아지다 보니 청계천과 용산 컴퓨터 상가에 나가 보면 한 때는 모두 알프스 키보드라며 키보드를 판매하는 것을 보았다. 감촉이 달라서 보다 정확히 알아보니 "알프스 키 스위치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키 스위치를 사용한" 제품이라서 알프스 키보드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대만제의 일본 알프스 사 호환(?) 키 스위치를 단 제품이었다. 하지만 그 성능은 전혀 달랐다.

가격 대 성능비에서 최고의 제품?

키트로닉 키보드는 이미 10년 전에 150불 정도를 하는 비싼 제품이었다. 옴니키/울트라도 현재 그 정도의 가격이다. 10만원이 훨씬 넘는 정도의 가격이므로 매우 비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가격에 걸맞게 기막힌 성능을 가지고 있는 제품이다. 역시 이 키보드의 촉감이라든지 그 기능면(특히 알프스 키 스위치를 장착한 옴니키/울트라의 경우)에 있어서 이들 키보드는 다른 어느 것과도 쉽게 비교된다. 그러므로 알프스 키보드나 치코니 키보드 등이 좋다는 것은 가격 대 성능비에서 특히 좋다는 것이지 이것들이 세계 최고의 키보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환언하면, 이들은 가격 대 성능비에서의 세계 최고의 제품이 될 수 있는 키보드라고 하겠다. 하지만 원래의 치코니 키보드와 비교하여 한국판(한글 자판과 한자 키, 한/영 전환키가 있는) 치코니 키보드는 성능면에서 차이가 날 가능성이 있음을 부기 한다. 즉, 치코니의 명성은 그 모델 KB-5181CT를 써 본 사용자들에 의하여 확립된 것이고, 필자가 테스트해 본 것은 KB-5191R 모 델이었다. 이것은 대체로 미국 시장에서 35불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되는 것이고, KB-5181CT는
이보다 15불이 비싼 50불 정도의 가격이라는 것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는 말이다(50불이라고 해도 옴니키/울트라 등에 비해서는 1/3 가격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같은 모델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한국화되면서 원가 절감을 위한 지나친 노력(우리의 호환 기종 시장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 때문에 원래의 것보다는 조악하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맺으며

키보드는 개인의 취향에 따르는 것이어서 84키를 좋아하는 필자는 선물 받은 치코니의 키보드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치코니 키보드가 주는 감촉 등에 대해서, 그리고 그 물건의 질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움이 없다. 가격 대 성능비로 보아 좋은 물건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필자는 기능 키 등의 배열이 101키와 비슷한 도시바의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 101키를 전혀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대체로 인간공학적인 측면을 도외시한 것이어서 사용하고 싶지 않다. 컴퓨터 사용자가 자신이 쓰는 기계에 대하여 애정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키보드는 모니터와 함께 컴퓨터와 우리들을 연결해 주는 가장 중요한 인터페이스이고, 또 우리와 가장 많이 접하는 귀한 친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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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매니아가 세계 최고 동호회가 되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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