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만 해도 세진 기계식 키보드는 결코 보기 드문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컴퓨터 가격 파괴가 일어나면서 업체마다 원가 절감 노력이 이어지는 바람에, 값비싼 세진 기계식 키보드는 점차 세상에서 잊혀져 갔다.
한때 IBM 을 비롯한 여러 업체에 기계식 키보드를 납품하던 아론(구 마벨)도 마찬가지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2년인가 3년 전인가, 아론은 독자 키 스위치를 탑재한 기계식 키보드를 선보이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뚜렷이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세진은 저렴한 멤브레인 키보드에 주력했으며, 기계식 키보드는 은행권을 비롯한 일부 업체에만 납품할 뿐이었다. 스스로 시장 개척을 포기한 댓가는 언제나 가혹한 법, 결과적으로 오늘날 세진의 이름값은 아론보다 뒤처지는 형편이다.

최근 들어 세진에선 기계식 키보드 SKM-1080의 일반 판매를 재개했다. 이 키보드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방법이야 한둘이 아니겠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기계식 키보드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아론 키보드와 비교하는 게 가장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이번 리뷰에서는 세진의 SKM-1080과 아론의 주력 모델 KB-106S를 꼼꼼히 비교하도록 하겠다.


뒷쪽이 세진 SKM-1080, 앞쪽은 아론 KB-106S+

제품 사양
제작사세진전자
제품명SEJIN SKM-1080
제품가격69300원(부가세 포함)인터페이스PS/2
크기 461x165x41 (mm) 무게 약 1200 g 대
키 개수101키키 스위치후타바 기계식 스위치
키 작동기기계식키캡 모양원통형(Cylindrical)
자판 인쇄2색 사출 성형측면배열스텝 스컬쳐 2

- 패키지 및 첫인상

세진 SKM-1080은 밋밋한 무지 박스에 포장된 반면 아론 KB-106S는 깔끔한 하늘색 박스에 담겨 있다. 실용적인 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아론의 마분지 박스보다 세진의 골판지 박스를 더 믿음직스레 여기겠지만, 적어도 겉모양만큼은 아론이 훨씬 낫다.

아론은 박스 안에 플라스틱 키보드 덮개와 키스킨이 포함되어 있지만 세진은 키보드 본체만이 들어 있다. 패키지의 충실함에 있어선 아론 쪽의 완승이다.

- 외관

세진 SKM-1080의 크기는 461 x 165 x 41mm이며 프레임 여백은 거의 없다. 측면은 U자형으로 부드럽게 휘어졌다(세진 사이트의 제품정보에는 크기가 474 x 196 x 41mm로 올라와 있지만, 실측 결과 이보다 작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틀렸다는 사실에 어찌 황당함을 금할 수 있으랴!).
프레임과 키캡 색상은 아이보리, 일부 특수 키는 회색 키캡을 사용한다. LED 자리에는 키트로닉이나 토프레와 맞장 떠도 부족함이 없으리만치 멋대가리 없는 SEJIN 로고가 새겨져 있다. 전체적인 외관을 놓고 보면 21세기보다는 20세기에 걸맞는 모양새라 하겠다.

프레임 상단에는 볼펜 등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야트막한 턱이 솟아나 있다. 10년 전이라면 몰라도 요즘 들어서는 전혀 불필요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하부 프레임과 상부 프레임은 위아래 꺾쇠로 물려 있다. 하부 프레임 아래쪽엔 2개의 미끄럼 방지 고무가 붙어 있으며, 위쪽에는 케이블 정리 홈과 높이 조절 받침대가 눈에 띈다. 옛날 세진 키보드의 높이 조절 받침대는 2단 구조였지만 SKM-1080은 평범한 1단 구조다. 가운데 붙은 레이블에는 제품명과 제품 번호 및 AT/XT 모드 전환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헌데 요즘 세상에 XT 모드로 키보드를 사용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문제는 PS/2 케이블이 너무 짧다는 사실이다. 전체 길이가 고작 95 cm에 불과한지라 본체를 책상 아래 놓은 경우에는 연장 케이블이 필요하다. PS/2 연장 케이블이야 천원 남짓한 가격에 살 수 있다지만,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용산까지 나갈 생각을 하니 번거롭고 귀찮기만 하다.

아론 KB-106S의 크기는 456 x 184 x 38mm으로, 폭이나 높이는 SKM-1080과 비슷하지만 길이는 2cm 정도 길다. 하지만 외관 자체는 세진과 매우 흡사하다. 프레임이 U자형으로 휘어졌다는 점, 아이보리 색상이라는 점, 특수 키 키캡이 회색이라는 점까지 똑같다. LED 자리에 SEJIN 대신 ARON 로고가 찍혔다는 점이 유일한 차이점인데, 멋대가리 없다는 점에선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하부 프레임 아래쪽엔 2개의 미끄럼 방지 고무가 있으며 위쪽에는 1단 구조의 높이 조절 받침대가 붙어 있다. 하부 프레임과 상부 프레임은 나사와 꺾쇠로 견고하게 고정되었다.
상위 모델에 속하는 KB-106S+는 차분한 검정색의 우레탄 코팅 프레임과 검은색 키캡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여기에 선명하게 빛나는 고휘도 LED가 맛깔스러움을 더해주니, 겉모습만 놓고 따지자면 KB-106S나 SKM-1080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무난함과 독특함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SKM-1080은 평범한 만큼 어디에든 잘 어울린다는 장점이 있다. KB-106S+의 멋진 디자인은 관련장비 일체가 검정색으로 통일된 환경에서만 빛을 발한다는 단점이 있다.

- 키캡 및 레이아웃

SKM-1080은 윈도우 키도 없고 컨텍스츄얼 메뉴 키도 없는, 전형적인 한글 103키 레이아웃의 키보드다. 키보드 측면 배열은 스텝 스컬쳐 2 방식이고 키캡 생김새는 원통형(Cylindrical)이다.
헌데 키캡에서 눈 여겨 볼 것은 자판 인쇄 방식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고전적인 2색 사출 성형(*) 방식으로 자판을 찍어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자판의 깔끔함과 미려함은 가히 최고 수준에 올라서 있다.
키캡 표면에는 미세한 미끄럼 방지 요철(凹凸)이 들어갔으며 아래쪽에는 희미한 게이트 자국이 남아 있다. 앞서 말했듯이 편집 키, 커서 키, 특수 키 등은 회색 키캡을 사용하고 있으며 리턴 키는 큼직한 역L자 형이다.

(* 2색 사출 성형 : 서로 다른 색상의 플라스틱으로 자판을 성형하는 방식. 각각의 키캡을 서로 다른 패턴으로 성형하기 때문에 제작비가 많이 든다. 대신에 문자 색상이 선명하고 경계선도 깨끗하다는 장점이 있다. 오늘날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아론 KB-106S는 윈도우 키와 컨텍스츄얼 메뉴 키가 포함된 한글 106키 레이아웃의 키보드다. 측면 배열은 스텝 스컬쳐 2, 키캡 생김새는 원통형이다. 자판은 레이저로 인쇄되었는데 그 품질은 과히 좋지 않다. SKM-1080은 물론, 같은 레이저 인쇄 방식을 채택한 체리 키보드보다 선명도가 훨씬 떨어진다.


아론 KB-106의 자판


키캡 높이는 SKM-1080보다 약간 높은 편이고 미끄럼 방지 요철은 얕고 희미해서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다. 리턴 키는 SKM-1080과 동일한 역L자 형이다.
KB-106S+은 검은색 키캡이기 때문에 실크스크린 인쇄로 자판을 찍어냈다. 그런데 초기 제품은 인쇄 품질이 시원찮아 금새 자판이 지워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최근에는 UV 잉크를 사용해 내구성이 향상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사용한지 몇달만에 흐릿해진 아론 KB-106S+의 자판

레이아웃만 놓고 따져볼 때 윈도우 키와 컨텍스츄얼 메뉴 키가 없는 SKM-1080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나 다름없다. 반면에 넓은 스페이스 바를 원하는 사람에게 KB-106S는 쓸데없이 번잡하기만 하다.

- 키감 및 사용감

세진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국산 기계식 키보드의 노장이다. 아론은 오늘날 국산 기계식 키보드를 대표하는 선두 주자다. 이 둘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키 스위치 특성 비교가 빠져서야 아니 되리라.
헌데 어처구니없게도 두 회사 모두 기본적인 제품 데이터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기본적인 키 압력 변화 그래프고 뭐고 갖춰먹은 게 없으니, 키보드 크기를 틀려먹은 건 애교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만든 제품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이니, 황당함이 하늘을 찌르고 땅을 가를 지경이다. 이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계식 키보드 메이커들이라니! 기가 막혀서! 덕분에 이번 리뷰는 순수하게 손끝의 감각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세진 SKM-1080에는 일본 후타바(雙葉) 전자의 스위치가 탑재되어 있다. 후타바 전자는 주로 산업용 VFD나 프레스 기기 등에 주력하는 업체로써,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무선 조종 컨트롤러(R/C)로 잘 알려져 있다. 1973년에는 '한국 후타바 전자 공업'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세진 전자의 전신(前身)이다.
체리나 알프스 스위치와 마찬가지로 후타바 스위치 역시 산업용으로 활용되기에 그 내구성이나 신뢰도는 매우 높은 수준일 것이라 추측된다.

실제로 SKM-1080을 사용해 보면 매우 독특한 맛이 느껴진다. 손끝에는 미묘한 압력 변화가 느껴지고, 귀로는 클릭과 넌클릭의 중간 지점에서 가볍게 잘각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SKM-1080에 탑재된 후타바 스위치는 리벳으로 기판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으므로, 키 자체를 포기하기 전에는 분해할 수 없다. A/S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세진 홈페이지의 게시판을 뒤져보면 금새 알 수 있듯이, 어지간해선 스위치가 고장 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모서리 타이핑(측면 타건)시 역L자형 리턴 키는 약간 뻑뻑하게 움직이지만, 이외의 다른 키는 원활히 움직인다. 특히 큼지막한 스페이스 바는 2개의 더미 스위치로 양 옆을 지탱하고 있기에 모서리를 눌러도 시원시원하게 움직인다.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체리 MX 클릭 스위치나 알프스 넌클릭 스위치에 비해 입체감은 다소 떨어지지만 기계식 키보드의 맛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아론 KB-106S에는 아론에서 개발된 국산 스위치가 탑재되어 있다. 현재는 생산 공장이 중국으로 이전되었지만 이전에는 스위치, 키보드 모두 국내에서 생산되었다.

아론 키보드의 키감은 상당히 가벼운 편이다. 키가 연결되는 순간 손끝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있지만, 전반적인 키 압력 변화는 매우 밋밋하다. 클릭 음은 경쾌함이 지나쳐 시끄러운 수준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내구성에 있다. 실제로 초기 아론 키보드는 몇 달 만에 키감이 급격히 변하는 것은 물론이고 잦은 키 스위치 고장과 키캡 슬라이더가 부러지는 문제로 사용자들의 원성을 샀다. 최근에는 내구성이 많이 향상되었다곤 하지만 만족스런 수준은 아닌 듯하다.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아론의 KB-106S(및 S+)는 앱솔루트 코리아의 메커니컬 엑스와 비견할만한 저가형 기계식 키보드다. 입문자가 잠깐 쓰기엔 좋지만 오래도록 쓸 수 있는 기계식 키보드를 원하는 사람에겐 적당하지 않다.

- 결론

아론의 KB-106S는 저렴한 가격의 기계식 키보드란 사실이 최대의 장점이다. 106S+는 여기에 화려한 디자인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내구성, 신뢰도, 완성도란 측면에서 따져보면 많은 단점이 노출된다. 눈에 보이는 부분은 그럴싸하지만 속내는 부실하다고나 할까.

이와는 반대로 세진 SKM-1080은 속내가 충실하고 단단한 기계식 키보드다. 이색 사출 성형 방식의 키캡, 높은 내구성과 좋은 키감을 자랑하는 후타바 스위치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 많은 힘을 쏟았다. 비록 화려함에 있어선 KB-106S+에 밀리고 가격에 있어서 KB-106S의 적수가 되지 못하지만, 그 정도 단점은 너그럽게 용서할만한 가치가 있다.

냉정하게 따져볼 때, 3~4만원 선에서 저렴한 가격의 입문용 기계식 키보드를 찾는 사람에게는 앱솔루트 코리아의 메커니컬 엑스 혹은 아론 KB-106S가 훨씬 낫다. 7~8만원 선에서 튼튼하고 믿음직스러운데다 키감도 괜찮은 물건을 찾는다면 SKM-1080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 세진의 이름값은 체리나 알프스는 물론이고 아론보다 못한 지경이다. 따라서 사용자들이 KB-106S의 두 배 가까운 값의 SKM-1080을 선뜻 사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리, 스스로 초래한 재앙인 것을. 앞으로 세진이 기계식 키보드에도 보다 많은 힘을 쏟아주길 바랄 수밖에.

- DJ.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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