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란 말을 즐겨 쓴다. 일본인이 워크맨 등을 비롯한 자그마한 제품을 만드는데 능숙하다는 사실을 빗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편견에 불과하다. 세상에 큰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기왕이면 큼직한 차, 널찍한 집, 듬직한 오디오를 좋아하긴 전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다.
허나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지진이 잦은 나라다. 내진 설계를 적용해 건물을 지으면 한 층 올라갈 때마다 건설비가 곱절로 뛴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땅값도 비싼데다 건설비 부담도 만만치 않으니 일본의 집값은 자연스레 세계 최강(?) 수준이다. 집 안에 들여놓기도 힘든 대형 오디오나 TV는 쓸데없는 사치일 뿐이다. 자연스레 축소 지향적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꼼꼼한 손재주와 높은 기술력이 결합되었으니 일제 소형 전자 제품이 전세계를 장악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이는 키보드 쪽에서도 마찬가지인지라 일본에선 공간을 절약할 수 있는 미니 키보드와 컴팩트 키보드의 수요가 높다. 그래서 PFU 해피 해킹 키보드나 아테사 클리어 101을 위시해 여러 메이커가 경쟁적으로 미니/컴팩트 키보드를 내놓고 있다.
주식회사 다이아텍(Diatec) 역시 그런 업체 중 하나이니, 여기선 필코(Filco)라는 브랜드 명으로 각종 컴퓨터 액세서리 및 키보드를 내놓고 있다. 필코 키보드의 특징을 정리하자면 다양한 색상과 무난한 디자인에 알프스 기계식 스위치를 결합했다는 점이다. 일본 내에서는 나름대로의 입지를 구축했는지 키보드 제품군은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헌데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물건은 미니급 컴팩트 키보드 FKB-86E이다. 크기는 컴팩트 키보드보다 작고 미니 키보드보다 약간 큰 정도인데, 놀랍게도 알프스 기계식 스위치를 탑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필코 브랜드 키보드는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제품 사양
제작사 Diatec
제품명 Filco FKB-86E
제품가격 5229엔 인터페이스PS/2
크기 324 x 170 x 32 mm 무게 약 1000 그램
키 개수 86키 키 스위치알프스 클릭 스위치
키 작동기기계식키캡 모양원통형(Cylindrical)
자판 인쇄실크스크린측면배열스텝 스컬쳐 2

- 패키지 및 첫인상

Filco FKB-86E의 포장 박스는 짙은 회색이다. 앞면에는 키보드 확대 사진이, 뒷면에는 전체 사진과 함께 간략한 사양이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제품 사진의 인쇄 품질이 마치 복사기로 찍어낸 듯 하니 좋은 인상을 주기엔 역부족이다. 박스 자체는 얇은 골판지로 튼튼하게 만들어졌으며, 안에는 품질 보증서와 함께 투명 플라스틱 덮개가 씌워진 키보드 본체가 정중하게 모셔져 있다.

- 외관

FKB-86E는 폭 324mm, 길이 171mm, 높이 25mm다. 그 폭은 아테사 클리어 101E보다 9센티미터 짧고 체리 미니 키보드보다 5센티미터 길다. 텐 키가 없다는 점에서는 미니 키보드로 분류해야겠지만 다이아텍 홈페이지에선 ‘컴팩트 키보드’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제품 크기가 좀 애매하기 때문인데, 기실 FKB-86E의 키 간격, 키캡 크기는 일반 키보드와 비슷한 수준이다.

프레임 외곽은 뻣뻣한 직선을 그린다. 오른쪽 상단부에는 Caps Lock/Scroll Lock/On Line LED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텐 키와 함께 Num Lock LED가 사라진 대신 On Line LED가 자리잡은 셈이다. 키보드를 연결하면 On Line LED에는 주황색 불빛이 들어온다. PS/2 케이블 길이는 1.7미터 정도다. 빛 바랜 분홍색의 Filco 로고는 토프레나 키트로닉과 맞먹는 수준이지만, 다행히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우측 하단부의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프레임 색상은 전통적인 베이지색이다. 헌데 요즘 유행하는 흰색에 가까운 베이지색이 아니라, 20년 전에나 통했음직한 누리끼리한 베이지색이다(!). 키캡 색상은 밝은 베이지색, 일부 특수 키는 회색 키캡을 사용한다.
하부 프레임과 상부 프레임은 8개의 나사로 단단히 결합되었다. 하부 프레임 하단에는 2개의 흰색 미끄럼 방지 고무가, 상단에는 높이 조절 받침대가 달려 있다. 가운데에 붙은 레이블에는 시리얼 넘버와 생산지(대만 : Made in Taiwan)가 적혀 있다.

조립 상태나 마무리는 전혀 불만이 없으나 지나치게 고전적인 색상 배합과 직선적인 디자인은 20세기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여기 어울리는 말은 단 한마디, 고색창연(古色蒼然) 뿐이리라. 디자인만 놓고 따지자면 아론 미니 키보드 쪽이 훨씬 낫다.

- 키캡 및 레이아웃

키보드 측면배열은 스텝 스컬쳐 2 방식이고 키캡 모양은 원통형(Cylindrical)이다. 키 간격은 19mm, 깊이는 3mm로 일반 키보드와 비교해 봐도 별 차이가 없다. 높이는 조금 높은 편이었고 게이트 자국은 눈에 띄지 않는다. 키캡 표면의 미끄럼 방지 요철은 얕고 거칠어서 상쾌함을 느끼기 어려웠으나, 실크 스크린으로 찍어낸 자판의 품질은 꽤 좋은 편이었다.

키 개수는 총 86개. 영문 103키 키보드에서 텐 키 자리의 17개 키가 생략된 모양새다. 대부분의 미니 키보드는 별도의 fn (Function) 키와 일반 키의 조합으로 편집 키 혹은 텐 키 기능을 사용하지만, FKB-86E에선 fn 키를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변칙적인 레이아웃을 채택하고 있다.


Alt와 스페이스 바 사이의 Insert/Delete 키


커서 키는 오른쪽 쉬프트(Shift) 키 하단에 역 T자 형태로 자리잡았고, Home / End / Page Up / Page Down 은 기역(ㄱ)자형 리턴 키 옆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 그리고 Insert와 Delete는 놀랍게도 스페이스 바와 왼쪽 Alt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뭣 때문에 Insert/Delete 키가 이런 곳에 자리잡고 있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를 일이다. 그나마 큼직한 백스페이스 키가 위안이 된다.

- 키감 및 사용감

필코 FKB-86E에는 클릭 방식의 알프스 키 스위치가 탑재되어 있다. 키캡을 벗겨 보면 검은색 플라스틱 하우징 위에 ALPS 로고가 선명하다. 같은 클릭 스위치를 탑재한 아테사 클리어 101E의 슬라이더 색상은 검은색이었지만, FKB-86E의 슬라이더는 흰색이었다.

키감은 전형적인 알프스 스위치의 그것이다. 처음 키를 누를 때는 가볍지만 다음 순간 확실한 압력 변화와 함께 알프스 특유의 클릭음이 귓전을 때린다. 다만 기존에 리뷰한 알프스 키보드, 즉 켄싱턴 스튜디오보드와 아테사 클리어 101E과는 미묘하게 차별화된 맛이다. 스튜디오보드가 둔중하다면 아테사 클리어 101E는 경쾌하고, 필코 FKB-86E는 단단하다고나 할까.

왼쪽 쉬프트 키, 백스페이스, 스페이스 바, 리턴 키는 철제 스태빌라이저로 받쳐진다. 비교적 길이가 짧은 오른쪽 쉬프트 키에는 스태빌라이저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좌우로 건들거리는데다 모서리 타이핑(측면 건타)시 잘 눌려지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Insert/Delete 키는 익숙해지면 오히려 편리하다. 오른손을 크게 움직일 필요 없이 왼손 엄지를 가볍게 움직여 글자 삽입/삭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Alt 키를 누르다 Insert 키를 누르는 실수가 자주 일어나는 등, 익숙해지기까진 시간이 걸린다.

- 결론

필코 FKB-86E의 일본 내에서의 판매가는 5229엔, 정식으로 수입되는 경우에는 판매 가격이 9~10만원 선에서 정해질 것이다. 비싼 가격이긴 하되, FKB-86E이 컴팩트 키보드와 미니 키보드의 중간에 자리잡은 특이한 키보드란 사실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FKB-86는 텐 키가 생략된 대신 편집 키는 온전히 갖고 있다. 공간 활용도는 미니 키보드에 맞먹지만 사용감은 일반 키보드나 다름없다. 그러면서도 알프스 키 스위치의 탄력 있는 키감을 만끽할 수도 있으니 금상첨화라 하겠다. 비슷한 가격대의 경쟁 상품으로 HHK Lite II가 있지만 펑션 키와 편집 키가 없다는 점은 물론 키감으로도 상대가 되지 못한다.

공간을 적게 차지하면서도 일반 키보드나 다름없는 느낌을 주는 기계식 키보드를 찾아 헤매던 사람에게 FKB-86E는 구세주나 다름 없으리라. 하지만 텐 키를 필요로 하는 사람, 멋들어진 디자인을 원하는 사람에겐 추천하기 어렵다.

- DJ.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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