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키보드들

필자가 IBM 메모리 타자기를 사용한 직후에 써 본 키보드는 바로 실리콘 패드 타입으로서 탠디 래디오 색(Tandy Radio Shack) 사의 것이었다. 값은 비싼 것이었지만 그것은 메모리 타자기의 좋은 키보드에 익숙한 내게는 매우 흥미 없는 키보드였다. 그후에는 청계천에서 만든 복사판 애플의 키보드를 써 보았는데, 이 건 그야말로 악몽 같은 것이었다. 당시의 복사판 애플은 몸체도 플라스틱이 아니고 철판을 구부리고, 땜질해서 만든 것인데다가, 아주 조악한 대만제나 국산 키보드가 붙어 있었는데, 이것은 키가 잘 눌려지지도 않았고, 타자를 하다 보면 키 캡이 자꾸 밀려 올라오기도 하는 희한한 것들이 태반이었다. 게다가 타자를 할 때면 키보드를 누르는 탁한 소리가 철판 통속에서 울려나오기까지 했다. 그래서 애플의 키보드에 대해서는 아주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오리지널 애플의 키보드를 사용하면서 그 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복사판의 무겁고, 삐걱거리며, 분명히 눌렀음에도 글자가 입력되지 않고, 툭하면 키 캡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는 달리 매우 가벼운 촉감에, 살짝 눌러도 조금도 실수없이 문자가 입력되는 그런 제품이었던 것이다. 단지 이것이 가진 문제는 몇 개의 키보드의 배열이 업계의 표준이었던 셀렉트릭 전동 타자기의 것과 다른 점, 그리고 대, 소문자가 쉬프트(Shift) 로써 구별되지 않고 대문자만 나오는 점 등이었다. 애플 컴퓨터 사는 "애플 IIe"라는 모델을 작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워드 프로세싱에도 적합할 정도의 키보드를 갖추게 되고, 나중에
리자와 매킨토시의 발표에 이르러서는 드보락 자판까지 지원하는 예술적인 수준의 키보드를 선보이게 된다.

16비트 PC 시대에 이르러서

IBM이 PC를 만들면서 키보드에 대한 상황이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PC들은 대부분 워드 프로세싱을 고려하여 만들어 진 때문이다. 특히 지금은 망해서 갑일 전자로 넘어간 미국의 텔리비디오(TeleVideo) 사의 터미널이나, 이 회사의 PC에 부착되어 있던 키보드는 워드스미스(Wordsmith)들을 감동시키기에도 충분할 정도의 키보드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의 키보드가 주는 감촉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아주" 좋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것이 덩치가 큰 구인들을 대상으로 만들었기에 키가 무겁고 우리처럼 힘이 약한 사람들은 쓰기가 힘이 들었던 때문이다).

이 당시에 IBM 사는 자신들이 세운 셀렉트릭 표준의 키보드 배열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셀렉트릭 표준 배열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84 키보드의 배열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은 "ENTER" 키의 위치를 바꾸고, 그 키를 조그맣게 만들었으며, "Z" 키 옆에 백 슬래쉬 키 등을 배치함으로써 기본적인 키의 혼동과 함께 쉬프트(Shift)키를 누르려다가 백 슬래쉬 키를 누르게 하곤 했다. 이 결과 모든 키가 원래의 셀렉트릭 표준의 자판 배열대로 놓여 있고, 또 인체 공학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키트로닉(Keytronic) 회사의 키보드가 불티나게 팔려 나가게 된다. 필자는 이 키트로닉 사의 애플용 키보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현재 PC의 84 키보드와 거의 같은 것이었다. 애플 컴퓨터는 기능 키가 두 개 밖에 없으며, 뉴메릭 키 패드가 없는데, 이것은 열개의 중요한 베이직 명령어를 포함하고 있는 기능 키가 있었고, 뉴메릭 키패드가 있었으며, 엔터키가 애플과는 달리 커다란 키로 어포스트로피(') 키 바로 옆에 있었고, 애플이 대문자만 발생시키는데, 소문자를 발생시키는 장치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 키보드는 애플의 키보드는 본체에 착되어 있어서 쓰기에 불편한데, 현재의 것들과 같이 긴 코드가 달려 있는 분리형이어서 편히 쓸 수 있었다. 게다가 이것은 케이스가 모울딩된 알루미늄이어서 무게가 엄청나게 많이 나갔으며, 복사판 애플의 키보드를 칠 때 나는 철판 통 속의 울림이 없었고, 택타일 방식이어서 사용하는 느낌도 좋았다(치코니는 키보드의 무게가 가벼워서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는 느낌이다. 한참 사용하다 보면 이것이 앞으로 밀려난다는 불평을 하는 사용자도 있다). 키트로닉은 그야말로 예술적인 키보드의 대명사였고, 컴퓨터 생산 업체가 아닌 본격적인 키보드 업체로서는 최초의 것이었다(요즘의 본격적인 키보드 업체는 옴니키/울트라를 생산하는 노스게이트 사라고 하겠다). 결국 현명치 못하게 만들어진 IBM 사의 키보드는 훨씬 뒤에 나오게 되는 AT 모델에서는 셀렉트릭의 키보드와 같으면서도 키트로닉의 좋은 아이디어를 절충시킨 키보드, 즉 IBM 84 키보드로 재 탄생되는 운명을 맞는다.

다시 처음의 얘기로 돌아가면, 텔리비디오 사는 호환 기종의 초기 시절로부터 희한한 문자 배열을 한 오리지널 PC(5150)와는 달리 올바르게 배열된 셀렉트릭(Selectric)과 동일한 키보드를 채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시 키보드의 제작에 관한 한 올바른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특히, 그들의 AT 모델이 가지고 있는 키보드는 모든 면에서 타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었다. 심지어 이 제품은 놀랍게도 팜 레스트(palm rest)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즉, 스페이스 바의 아랫부분에 타이핑하는 사람의 손바닥이 가볍게 올려 놓여 질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어서, 위에 손바닥을 걸쳐놓으면 팔에 오는 긴장을 없앨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이러한 특별한 장치가 나오기 이전에도 필자는 손바닥을 스페이스 바 밑부분에 올려놓고 타자하는 버릇이 있었으며, 이러한 버릇은 오랫동안 워드 프로세싱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버릇임을 알게 되었다). 만약 하루에 일곱, 혹은 여덟 시간 정도씩 워드 프로세싱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손을 키보드 위에 올린 채로 -- 타이핑을 안해도 좋으니 -- 일곱 시간의 반절만큼만 들고 있어 보자. 그렇게 해보면 왜 워드 프로세싱 전문가들이 손바닥을 키보드의 밑부분에 걸쳐놓고, 혹은 키보드 하단에 그와 같은 높이의 막대 등을 놓은 후에 여기에 손바닥을 의지하고 타이핑하는 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텔리비디오 사가 "팜 레스트"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고, 이러한 장치를 채택했다는 사실은 정말 대단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아직도 팜 레스트를 가진 키보드가 많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하지만 요즘 경화성 플라스틱 거품(foam) 등으로 만들어진 독립된 팜 레스트가 싼값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인간공학을 이해하는 컴퓨터 액세서리 메이커들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수준급인 현재의 키보드들

PC 초기 시절의 키보드들과 최근의 키보드를 비교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어떤 키보드라고 할지라도 대체로 수준급에 올라 있다는 것이다. 인간공학적인 배려가 많이 행해져 있는 것이다. 사실 키보드만큼 인간공학적인 배려를 요구하는 제품은 컴퓨터 시스템 중에서 모니터 등을 빼고는 거의 없을 것이며, 키보드는 모니터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이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제품인 것이다. 하잘 것 없는 키 캡에 있어서도 그같은 배려가 있다. PC 초기 시절의 키보드를 누르면 이것은 키 캡이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정확히 상하 운동만을 하였다. 그러나 IBM PC의 출현 이후의 특징적인 변화는 이의 키 캡을 손끝으로 흔들어 보면 이것이 여러방향으로 살그머니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요지부동이던 키 캡에 익숙하여 있던 사람들은 이를 오해하게 마련이었다. 제작 과정에서 고정을 잘 못하여 그런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한 연구의 결과이다. 이것은 인간의 손이 아무리 키보드에 숙달되었다고 하더라도 정확히 키 캡을 상하로만 눌러 줄 수는 없기 때문에 고안된 것이다. 약간 비뚜로 타이핑을 한다고 할지라도 이 키 캡이 그 움직임을 받아서 살짝 누움으로써 오히려 전 같으면 오타에 연결될 수 있는 것을 바로 잡아 주는 작용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노력의 결과는 어떤 칭찬도 부족할 지경인 것이다(치코니의 키 캡은 이 움직임이 좀 심하다 보니 약간의 잡소리까지 내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물론 이는 필자가 사용해 본 제품에서만 그럴 수도 있다).
현재 사용되는 PC의 키보드들은 대체로 이같이 하잘 것 없이 보이나 실제로는 많은 노하우가 집적된 인간공학의 산물이라고 믿어도 좋다.

IBM 사에 대한 불만과 우리의 어떤 키보드

필자는 여러 글에서 왜 84 키보드를 선호하는가에 대해 말한 바가 있다. 단지 왼 손만으로도 컨트롤, 쉬프트, 앨트(올트) 키와 10개의 기능 키를 동시에 작동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고, 101키 이상의 키보드에서처럼 멀리(아니 높게) 숫자 키 위에 있는 기능 키를 오른 손으로 누르고 왼손으로 컨트롤 키 등을 누르는 비합리적인 일을 하지 않기 위함이다. 또한 커서 이동키를 굳이 따로 독립시켜 숫자 키 패드를 오른편에서 멀리 배치한 것도 불만이다. 특히 AT 시절 이후 에 아무 문제가 없이 사용되어 오던 키보드의 배열을 PS/2의 최초 기종인 모델 30을 만들면서 101키로 전향하여, 컨트롤 키 자리에 캡스록을 넣고, 엉뚱한 곳에 컨트롤 키를 배치하고, 에스케이프 키의 위치를 변경하는 등의 엉뚱한 일을 왜 IBM 사가 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IBM과 같은 대회사들은 괜히 자신들이 하는 일은 모두 옳고, 티가 나야만 한다고 믿으며, 또 남들은 다 자신들을 추종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에 우리 나라 컴퓨터 산업에서도 수출 품목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어느 국산 키보드를 보니 이 건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IBM이 했던 것과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건 그 IBM 사마저도 이젠 더 이상 실수를 안하게 된 엔터 키의 위치 변경과 함께 엔터 키를 전과는 거꾸로 "ㄱ"자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 등의 실수를 하고 있었다.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손에 붙는다는 느낌 등

치코니란 이름은 국제 시장에서는 그리 유명한 이름이 아닌 것 같다. 필자가 본 어떤 외국 잡지에서도 그에 대한 테스트 리포트나 칼럼니스트들의 평가를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 그에 비해서 체리, 키트로닉(요즘은 마우스도 생산하며, 터미널 PC용의 다기능 키보드도 생산한다), 옴니키 등은 매우 유명한 키보드이다. 체리 키보드는 비교적 우리 사용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보석글 워드 프로세서를 소개하여 본격적인 한글 워드 프로세싱을 가능케 한 회사는 삼보 컴퓨터 사이다. 이들은 보석글을 THP의 그래픽 도스 한글을 이용해서 쓸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대만제 호환 기종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그로써 한국 PC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보석글을 삼보의 제품에서 쓰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채택한 키보드가 바로 그 유명한 독일제의 체리 키보드였기 때문이다. 키보드가 손에 붙는다는 느낌에 있어서 이 체리 키보드를 당할 키보드는 없을 것이다. 이는 택타일 방식이긴 했지만 비교적 소리가 적었고, 키가 세게 눌려졌을 때 튀는 느낌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대체로 키보드가 튀는 느낌이 있는 경우에는 오자의 발생이 생기는 것이 많다. 하지만 워드 프로세싱 전용기나 극히 우수한 키보드 중에는 전혀 오자의 발생이 없이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이 많다). 물론 개중에는 1-2년 쓰고 나면 몇 개의 문자가 잘 입력되지 않는 문제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대체로 보아서는 좋은 키보드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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