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널 컴퓨터의 여명기인 70년대, 키보드 개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타이프라이터의 느낌을 재현하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이프라이터의 높은 키 깊이(Key Stroke)와 시끄러운 입력음에 익숙했기에, 컴퓨터 키보드 역시 이 키감을 살려낼 필요가 있었다. 초창기 제품들이 기계식 스위치를 채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그런데 1977년 IBM은 'Buckling spring torsional snap actuator'라는 제목의 특허 신청서를 제출한다.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기계식 스위치는 용수철을 수직으로 압축시켜 필요한 반발력을 얻는다. 그러나 이 버클링 스프링 작동기(Buckilng spring actuator)는 용수철의 좌굴(座屈) 현상을 이용해 타이프라이터와 흡사한 키감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초창기 IBM-PC, PC/AT용 키보드는 버클링 스프링 작동기와 정전용량 스위치의 조합이었지만, 이후로는 멤브레인 스위치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87년도부터 90년대 초까지, 모델 M을 위시한 IBM의 버클링 스프링 키보드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불행히도 90년대 초 IBM은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으며 91년도에는 프린터와 키보드 부문을 묶어 렉스마크(Lexmark)라는 자회사로 분리시켜야만 했다. 이후로는 렉스마크가 IBM 버클링 스프링 키보드의 생산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6년, 역시 경영난에 빠진 렉스마크는 키보드 부문을 유니콤프(Unicomp)에 매각해 버렸다.

이로써 IBM 로고를 단 버클링 스프링 키보드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버클링 스프링 키보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니콤프에서 계속해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제품이 바로 유니콤프의 버클링 스프링 키보드, 커스터마이저(Customizer) 104 한글 키보드다.

제품 사양
제작사유니콤프
제품명Customizer 104 (Korean)
제품가격79$인터페이스PS/2
크기 492 x 210 x 45 (mm) 무게 2.3 kg
키 개수104키키 스위치멤브레인 스위치
키 작동기버클링 스프링키캡 모양원통형(Cylindrical)
자판 인쇄승화인쇄측면배열스텝 스컬쳐 1

- 패키지 및 첫인상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 104는 밋밋한 갈색 무지 박스에 포장되어 있다. 79달러, 약 10만원 하는 고가 키보드답지 않은 포장에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내부 포장은 튼튼한 편이다. 두터운 스티로폼이 키보드의 양쪽과 뒷면을 확실히 받쳐주기 때문이다. 얇은 박스 하나에 의지해 완충재 하나 넣지 않는 체리나 토프레와 구분된다. 스티로폼을 고정한 테이프를 풀면 커스터마이저 104 키보드와 짤막한 매뉴얼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 외관

이러쿵저러쿵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 104는 어딜 어떻게 뜯어봐도... 완벽한 모델 M이기 때문이다!
IBM의 1391401 키보드(93년도 생산품)와 비교한 결과 겉모양은 물론 크기나 무게마저도 완전히 동일했다. 프레임 하단에 스피커 구멍이 없다는 점, IBM로고 자리가 비어있다는 점, LED 자리에 유니콤프 로고가 붙어 있다는 점, 101키가 아니라 104 한글 키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윗쪽은 IBM 1391401 키보드, 아랫쪽이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 104

커스터마이저 104의 특징은 그 엄청난 크기와 무게감에 있다. 상당한 무게를 자랑하던 토프레 리얼포스도, 크기를 과시하던 애플 확장 키보드 I도, 이 앞에선 상대가 안 된다. 너무 크고 무겁다 보니 웬만한 키보드 트레이엔 집어넣을 수도 없다.
남자다운 직선형 프레임과 절묘하게 굽어진 키 프레임의 측면 곡선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LED 아래쪽의 보라색 유니콤프 로고는 그리 멋지진 않지만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LED 명칭을 익숙한 영어 대신 아이콘으로 표시하는 바람에 직관성이 떨어지는 게 흠이다.

하부 프레임과 상단 프레임은 육각 나사와 꺾쇠로 빈틈없이 고정되었다. 우측 상단부에 PS/2 케이블이 내장되어 있으며, 하부 프레임 위쪽엔 높이 조절 슬라이더가 있다. 높이 조절 슬라이더의 생김새나 구조는 역시 모델 M과 동일하다.
뒷면 스티커에 적힌 생산지는 Made in USA, 제품 명칭은 Unicomp Model M이다! 인건비 비싼 미국에서 직접 제조했다는 주장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모델 M'이란 제품명까지 보노라니 황당할 지경이다. 아마도 IBM이나 렉스마크와의 계약상, 대외적으로 모델 M이란 상품명을 내세우진 못하는 모양이다.

어딜 어떻게 뜯어봐도 21세기의 최신 키보드라는 느낌보다는 20년전 천하를 제패한 명품의 느낌 그대로다.

- 키캡 및 레이아웃

키보드 측면배열은 스텝 스컬쳐 1이고 키캡 모양은 원통형(Cylindrical)이다. 겉보기엔 1391401과 똑같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약간의 차이점이 눈에 띈다. 먼저 1391401은 이중 키캡을 채택한 반면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는 단일 키캡이다. 1391401은 일부 자판은 2색 인쇄로 찍어낸 반면 유니콤프는 오로지 검은색 하나로만 일관한다.

하지만 이외엔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키캡 자판은 승화(昇華) 인쇄 방식(토프레 리얼포스 리뷰 참조)으로 깨끗하게 찍어냈다. 편집 키, 커서 키, 특수 키는 눈에 띄는 회색 키캡을 사용한다(특이하게도 Backspace는 흰색 키캡이다). 키캡 상단에는 손끝을 기분좋게 매만지는 미끄럼 방지 요철(凹凸)이 들어가 있다. 마지막으로 키캡에 선명한 게이트 자국이 남았다는 점까지, 93년도에 나온 선배 키보드 1391401과 동일하다.

키 레이아웃은 한글 104키 레이아웃으로 윈도우 키와 오른쪽 메뉴 키가 추가된 대신, 오른쪽 Alt와 Control 키를 각각 한자/한글 변환 키로 사용한다. 명조체 한글 자판은 영문 자판과 맞먹으리만치 깔끔하게 찍혔다. 필자가 입수한 1391401은 일부 한글 자판에서 잉크가 번진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에선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 키 스위치/작동기 특성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 104의 키 스위치는 멤브레인 스위치, 작동기는 버클링 스프링 작동기다(버클링 스프링 작동기의 자세한 해설은 해당 컬럼(Link)을 참조해 주십시오). 키 깊이는 3.8 mm에 촉각 감지 지점(Tactile Feel Postion)의 압력은 72그램으로 상당히 무거운 편이다. 키 스위치의 반복 사용 횟수는 2500만 회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쉬프트 키나 스페이스 바 등 대형 키는 철제 스태빌라이저가 확실하게 받쳐준다.


버클링 스프링 키보드의 압력 변화 그래프 (일본의 [건인] 사이트에서 발췌)

버클링 스프링 작동기의 최대 장점은 앞서 언급했듯이 '타이프라이터와 흡사한' 독특한 키감에 있다.
위 그래프는 IBM의 특허 신청서에 기재된 압력 변화 그래프다. 키 입력이 일어나는 순간, 압력/반발력이 수직으로 급격하게 떨어진다. 기계식 스위치 중에서도 이 정도로 극단적인 압력/반발력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덕분에 키 입력시 순간적으로 키가 쑥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용수철이 휘어지고 공이치기가 스위치를 때리는 순간 '챠캉'하는 소리가 들린다. 타이프라이터를 연상케 하는, 시원시원한 키감과 멋진 입력음은 가히 일품이다.

커스터마이저 104에선 이 맛이 아주 잘 살아난다. 손가락을 받쳐주고 튕겨주는 용수철은 탱탱하기 그지없다. 귀를 울리는 입력음은 아주 창창하다. 72그램의 압력은 숫자만 놓고 따져보면 꽤나 부담스런 편이지만, 실제로 쳐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체리 리니어 키보드에 비하면 도리어 가벼운 편이었다. 게다가 IBM 1391401에선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함이 있었다. 어언 10년 묵은 골동품과 방금 박스에서 꺼낸 신품과의 차이는 과연 크고도 넓은 것이었다.
손끝과 귓바퀴가 이다지도 즐거운 키보드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사무실에서 이걸 두들기노라면 소음공해의 주범으로 낙인 찍히리란 점이 유일한 걸림돌이랄까.

- 결론

비록 IBM 로고가 없을지언정,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는 의심할 여지없는 IBM의 모델 M의 정통 후계자다. 디자인부터 시작해 키감까지 완벽하게 동일한 제품이다.

그런데 모델 M 시리즈는 비교적 구하기 쉬운 아이템이다. 국내 중고가격은 약 6만원 정도. 반면에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 키보드는 미국 가격이 79달러. 운송료를 포함하면 적어도 12만원에서 13만원 정도에 이른다.
허나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에는 두 배 이상 되는 가격 차이를 만회하는 장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신품'이란 사실이다.

IBM의 모델 M이 마지막으로 생산된 지 이미 10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였으니, 그 동안 계속 키보드를 쓰노라면 키감이 떨어지는 거야 당연지사. 모델 M의 내구성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예외는 아니다. 실제로 이번 리뷰를 위해 지인(知人)에게 빌린 IBM 1391401의 키감은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세월을 이기지 못해 키캡이 떨어져나가는 등, 상당히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쌩쌩한 키감이 살아있는 신품 IBM 모델 M 한글 키보드란 사실,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 104의 최대 장점이자 매력은 바로 여기 있다. 가격대 성능비를 따져봐도 체리 키보드나 토프레 리얼포스 등, 다른 고가 키보드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상쾌한 입력음과 뚜렷한 키감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IBM 모델 M의 키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는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 DJ.HAN -

profile
전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and freedom of world!
영광된 내일을 위하여!   for glorious tomorrow!
해피 키보딩딩!!!  Happy Keyboardingding!!!

 - DJ.H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