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키보드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극소수의 매니아에게만 이름이 알려진 존재다. 체리 본사가 독일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유럽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미국이나 일본에선 구입할 방법이나 있다지만 우리나라에선 숫제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명성이 부풀려져 전설이 되는거야 당연지사.

헌데 우리나라에도 몇만대 단위로 체리 키보드를 수입해 사용하는 곳이 있다. 그 꿈같은 직장이 어딘고 하니, 다름아닌 은행권이다.
사실 체리의 주력 상품은 일반 PC 키보드가 아니라 스마트 카드/마그네틱 카드 리더, 바코드 리더를 내장한 다기능 키보드다. 국내 은행에서도 이 타입의 키보드를 대량으로 도입한 것이다.

몇년전인가 우연한 기회에 스마트 카드 리더가 내장된 체리 키보드를 잠깐 써볼 기회가 있었다. 유명한 체리 키보드의 제품을 써본다는 희열에 젖은 것도 잠시, 키감이 이상하리만치 무겁고 둔탁해서 크게 실망했다. 명성이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머리 한구석에 자리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의심은 잘못된 것이었다. 아마도 그 키보드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게 분명하다. 지난 몇달간 클릭 방식 MX 스위치를 탑재한 체리 키보드(일반 PC용)를 테스트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키감을 과시했으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괜한 의심을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런데 며칠 전 넌클릭/리니어 방식 MX 스위치를 채택한 G80-3000 모델을 입수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키보드들은 체리에서 직접 만든 최초의 한글 자판 모델이었다!
하지만 놀라움은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자. 그보다는 이 물건들이 체리의 전설적인 명성을 입증하는데 모자람이 없는지를 확인하는게 옳은 순서다. 일단 본 리뷰에서는 넌클릭 MX 스위치의 G80-3000LQMKO부터 확인하도록 하겠다. 리니어 타입은 다음 리뷰에서 다룰 예정이다.

◎전형적이되 세련된 외관

체리 카탈로그에 의하면 G80-3000의 크기는 폭 470mm, 길이 195mm, 높이 38mm이며 무게는 약 1.4킬로그램이다. 테스트용 제품인 G80-3000LQMKO의 무게는 이보다 좀 더 가벼웠다(대략 1.1에서 1.2킬로그램 정도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PC 키보드다. 겉모양보다 내실을 중시하는 게르만 장인정신의 숨결이 느껴진다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거꾸로 말해 디자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석기시대의 구닥다리 골동품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겉멋과 장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단순함과 세세한 부분까지 사용자를 배려한 편의성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베이지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키보드 프레임 외곽은 부드러운 곡면으로 처리했다. 윗판과 아랫판은 나사가 아닌 플라스틱 꺾쇠로 연결된다. 키보드 아랫판에는 높이 조정용 지지대가 감춰져 있는데, 바닥과 닿는 부분에는 미끄럼 방지 고무가 붙어 있다.

일반 키는 흰색 키캡을, 확장 키는 회색 키캡을 씌워서 변별력을 높였다. 키캡 표면에는 손끝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요철(凹凸)이 들어갔다. 타사 제품도 이런 요철 처리를 필수적으로 하지만 체리 키보드의 경우엔 그 품질 수준이 전혀 다르다. 불빛에 비춰봐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요철이기 때문에 손끝으로 키캡을 만지는 느낌은 상쾌하다 못해 짜릿할 정도다. 키캡 아래위로 게이트 흔적이 남아있는게 아쉽지만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체리 키보드의 디자인에선 시각적인 즐거움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부분까지 사용자를 배려한 편의성과 기능성,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직선의 아름다움은 높이 사줄만 하다.

◎ 키 레이아웃 / 한글 자판

G80-3000LQMKO은 104키 레이아웃의 키보드다. 키캡의 모양새는원통형(Cylindrical))이며 상하 배열은 스텝 스컬쳐 2(Step Sculpture 2) 방식을 따른다. 즉, 1단부터 5단까지 조금씩 다른 높이와 각도를 가진 키캡을 사용해 곡면(曲面)을 만들었다(키 상하배열 및 키캡 모양새에 대해서는 컬럼 '손끝의 느낌을 결정하는 열쇠' 를 참조해 주십시오).

자판은 레이저 인쇄로 새겼으며 한글 역시 마찬가지다. '한/영' 키와 '한자' 키는 따로 만들지 않은 대신 오른쪽 Alt와 Control 키에 할당했다. 자판의 인쇄 품질은 전반적으로 훌륭한 편이었지만, 큼직한 영문 자판 옆에 한글까지 찍으니 키캡이 꽉 차서 답답한 느낌이었다.

아랫판에 붙은 레이블을 보면 G80-3000LQMKO라는 제품 코드를 확인할 수 있다. L은 레이저 인쇄, Q는 넌클릭(소프트 컨택트), M은 윈도우즈 95 호환, 마지막의 KO는 한국(Korea)란 뜻이다. G 000001이란 시리얼 넘버는 이것이 세계 최초의 G80-3000LQMKO 모델이란 사실을 증명해 준다.

◎ 키 스위치 / 키감

G80-3000LQMKO에 탑재된 키 스위치는 하얀색 슬라이더(축(軸))의 체리 넌클릭(*) MX 스위치다. 좌측 그림은 넌클릭 MX 스위치의 키 특성을 그래프로 표시한 것이다.
(* 체리 사에서는 소프트 컨택트(Soft Contact)란 말을 사용하지만 여기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용어를 넌클릭으로 통일했다)

그래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넌클릭 방식은 슬라이더를 누르는데 필요한 압력과 손을 뗄 때의 반발력이 비슷한 곡선을 그린다. 또한 입력 지점(Actuating Point)를 지나면 슬라이더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압력이 급격한 증가세를 보인다. 이렇게 압력과 반발력이 강한 탓에 클릭 방식에 비해 키감이 무거운 편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키감이 무겁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타사 키보드에 비하면 적당한 편이다. 게다가 키감에 익숙해지면 단점이 장점으로 바뀐다. 반발력이 강하기 때문에 쫀득하고 부드럽게 손가락에 달라붙는 맛이 느껴지고, 소음이 적은데다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덜해서 고속 타이핑에 적합하다.

이 제품은 오늘날 구할 수 있는 넌클릭 키보드 중에서는 틀림없는 최고 수준에 속하지만, 불행히도 한세대 전의 알프스 넌클릭 스위치의 '명품'에는 따라갈 수 없다. 애플 확장 키보드 I이나 gs 키보드와 나란히 놓고 보면 키감이 약간 밋밋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 결론

G80-3000LQMKO은 체리의 일반 PC 키보드로써는 최초의 한글 자판 모델이다. 전형적이지만 익숙하고, 편의성과 기능성을 중시한 디자인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러나 전반적인 키감은 클릭 방식 MX 스위치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고, 10여년 전의 알프스 넌클릭 스위치의 한계도 깨지 못했다.

하지만 10여년 전의 명품은 과거의 명품일 뿐이며 오늘날에는 구할 방법이 없다시피 하다. 반면에 G80-3000LQMKO 모델은 무척 가까이에 있다. 이 제품이 국내에 정식으로 출시된다면 현존하는 넌클릭 키보드 중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 분명하다.

- DJ.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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