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컴퓨터 본체는 물론 주변기기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본체만도 기백만 원이요, 키보드 하나에 십만 원은 당연했다. 당시의 키보드는 비싼 만큼 고급스러운데다 키감도 훌륭하여 ‘명품’이란 두 글자가 아깝잖은 물건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전반적인 컴퓨터 가격이 떨어지면서 키보드는 대표적인 싸구려 주변기기로 전락해버렸다. 그 결과 명품이란 말이 어울리는 키보드를 찾아보기는 아주 힘들어졌다. 꼭 뭔가 하나 부족하기 마련이다.
애플의 USB 키보드는 훌륭한 모양새를 뽐내지만 키감은 형편없기 그지없다. 아론의 기계식 키보드는 괜찮은 키감을 가진 반면 마무리는 신통찮은 수준이다. LG나 삼성 등 키감이나 디자인 모두 그저 그런 키보드야 더 이상 일러 무엇하리오.
일반적인 컴퓨터 가격이 4, 50만원대로 떨어졌다곤 하지만 최고 사양의 컴퓨터는 여전히 기백만원을 호가한다. 키감이나 디자인, 완성도가 높은 최고급 키보드 역시 비싸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유니콤프의 Endura Pro, 체리 기계식 키보드 G80-3000은 100달러 이상 - 우리 돈으로 12~3만 원에 육박한다.
그런데 일본 토프레(Topre)의 리얼포스(Realforce) 키보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제품의 일본 내 소매가는 무려 1만6천8백엔, 즉 17만원!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2001년 7월에 첫 선을 보인 이래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본 리뷰에서는 영문 레이아웃의 리얼포스 101을 분석, 그 인기의 비결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제품 사양
제작사토프레(Topre)
제품명Realforce 101
제품가격16,800 엔인터페이스PS/2
크기 456X169X39(mm) 무게 1.4kg
키 개수101키키 스위치정전용량 무접점 스위치
키 작동기러버 돔키캡 모양원통형(Cylindrical)
자판 인쇄승화인쇄측면배열스텝 스컬쳐 2

- 패키지 및 첫인상

리얼포스 101의 포장은 초고가 키보드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갈색 무지 박스다. 하다못해 체리 키보드조차 고급 모델은 화려한 녹색 포장 박스에 담겨 나오건만, 그보다 훨씬 비싼 리얼포스 키보드의 포장이 MS나 로지텍보다 심심하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박스 앞면에는 키보드의 흑백 사진이, 뒷면에는 간단한 사양이 적혀 있다. 안에는 리얼포스 101 키보드와 간단한 취급설명서 한 장이 들어있다.

- 외관

리얼포스 101 키보드의 크기는 여타 103/104 키보드와 별 차이 없다. 하지만 무게는 약 1.4킬로그램으로 꽤 묵직한 편이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요즘은 기계식 키보드 중에서도 이만큼 무거운 물건은 찾기 어렵다.

베이지색 키보드 프레임은 겉멋을 부리지 않은 단순한 직선형이되 외곽은 부드러운 곡면으로 넘겼다. 가만 보면 체리 G80-3000 시리즈와 아주 흡사해 뵌다. 크기가 조금 작은데다, 우상단 LED 자리에 Realforce 101 로고 스티커가 붙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띄는 차이점이다. 헌데 이 Realforce 101 로고는 지난번에 소개한 키트로닉 로고와 쌍벽을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썰렁한 자리를 메꾸느라 급히 끼워 넣은 티가 역력하다. 고급 키보드답게 고급스런 로고를 달아줬으면 하는 바람은 결코 사치가 아니리라.

하부 프레임과 상부 프레임은 꺾쇠로 고정된다. 하부 프레임 위쪽에는 케이블 고정용 물림쇠와 높이 조절 슬라이더가 있다. 가운데에는 모델명, 시리얼 넘버, 제품 리비젼(A)이 적힌 레이블이 붙어 있는데, 오랜만에 보는 Made in Japan이란 문구는 신기하다 못해 황당하기마저 하다(인건비 비싸기로 악명 높은 일본에서 직접 만들다니!). 아래쪽에는 미끄럼 방지용 고무가 붙어 있다.

전반적으로 체리 키보드 못잖게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런 느낌이다. 화려하고 예쁜 디자인을 추구하는 대신, 익숙하고 편안한 디자인을 추구했기에 쓰면 쓸수록 정겹게 느껴진다.

- 키캡 및 레이아웃

키보드 측면배열은 스텝 스컬쳐 2고 키캡은 전형적인 원통형(Cylindrical)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먼저, 키캡에서 게이트 자국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간간이 키캡 아래쪽에 얇은 흔적이 보일 뿐이다. 게다가 자판은 요즘 보기 드문 승화(昇華) 인쇄 방식으로 찍어냈다. 이는 높은 온도에서 잉크를 플라스틱에 직접 흡착시키는 방식으로, 내구성이 높은 미려한 자판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PBT(Polybutylene Terephthalate) 등 내열성이 높은 고가의 플라스틱을 사용해야 하므로 제작비가 많이 먹힌다.
그리고 편집 키, 커서 키, 특수 키 등은 눈에 띄는 회색 키캡을 사용한다. 키캡 표면에 들어간 요철(凹凸)은 체리 키보드만큼 정밀하진 않아도 손끝을 즐겁게 하기엔 충분하다.

키 레이아웃은 영문 101 레이아웃으로 윈도우 키/오른쪽 메뉴 키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리턴 키는 일자(-)형이다). 구시대의 유물로만 여겨지는 101의 재림을 학수고대하던 사람들에게는 마치 복음과도 같다. 거꾸로 말해, 윈도우 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석기 시대 유물이나 다름없다. 여기 대해서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좋고 싫고가 갈릴 것이다.

- 키 스위치/작동기 특성

리얼포스 101의 키 스위치는 정전용량 무접점 스위치, 작동기는 러버 돔이다. (정전용량 무접점 스위치에 대해서는 해당 컬럼(Link)을 참조하기 바란다).
토프레에 의하면 정전용량 무접점 스위치의 장점은 반복 사용횟수 3천만 회를 보장하는 높은 내구성과 ‘N키 롤오버(N-key rollover)’ 지원에 있다고 한다(* 주석 참고).
롤오버(rollover)란 하나의 키를 누른 채 다른 키를 입력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 - 즉, 동시입력 기능을 의미한다. 그리고 2키 롤오버는 2키 동시입력, N키 롤오버는 복수 키의 동시입력을 지원한다는 뜻이다.
보통의 멤브레인/기계식 키보드는 2키 롤오버 혹은 유사 N키 롤오버(Alpha N-key rollover : 3~4 키 가량의 동시입력 가능)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아예 롤오버 기능이 없는 경우도 있다. 고속 타이핑 시 오,탈자가 많이 생기는 이유는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N키 롤오버를 완벽하게 지원하는 리얼포스 101에선 고속 타이핑도 아무 문제없다.

(* 주석 : 하지만 실제로는 멤브레인 혹은 기계식 키보드 중에서도 N 키 롤오버를 지원하는 키보드를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N 키 롤오버 지원 여부는 스위치가 아닌 회로 구성에 의해 결정된다)

키 압력은 손가락 힘에 따라 55/45/30g의 3단계로 나눠진다. Esc키 등 극히 일부만이 55g, 검지와 중지로 치는 대부분의 키는 45g, 새끼와 약지로 치는 키는 35g 압력이 적용된다. 키트로닉의 Ergo Force와 비슷하지만, 5단계가 아닌 3단계란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대부분의 외국산 키보드가 50~55g 압력을 표준으로 삼는 반면, 리얼포스에선 기준을 45g으로 잡았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쉬프트, 스페이스 바 등의 대형 키는 스태빌라이저로 확실하게 받쳐주기 때문에 전혀 건들대지 않는다. 키 깊이(Key Stroke)는 4.0(+-0.5)mm로 여타 키보드와 비슷한 정도, 키 입력 시 작동기 소음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 키감

위 그래프에서 왼쪽은 체리 넌클릭 키보드의 키 입력시 압력/반발력 변화 그래프, 오른쪽은 리얼포스 101의 압력 변화 그래프다. 여기서 입력 지점(Actuating Point) 직후 '스위치 ON 영역'의 압력 변화를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체리 키보드는 필요 압력이 일정하게 상승하는 반면 리얼포스는 완만하게 감소한다. 이것만으로도 둘 사이의 키감은 전혀 다르리라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리얼포스 101의 키감은 아주 독특하면서도 훌륭하다. 기계식 키보드가 순간적인 무게 변화로 손끝을 즐겁게 해 준다면, 리얼포스 101은 손끝을 편안하고 아늑하게 받쳐준다. 구름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기분이란 이런 것이리라.

대부분의 기계식 키보드는 드럼을 치듯이 리드미컬하고 힘있게 타이핑해야 한다. 하지만 리얼포스는 키 압력이 가벼운데다 특성도 다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강아지 털을 어루만지듯 여유롭고 가벼운 마음으로 두들겨도 고속 입력이 가능하다. 서양인 손에 맞춰진 무거운 키감의 기계식 키보드에 익숙한 사람은 이 키보드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필자 역시 오랫동안 기계식 키보드에 익숙해진 처지인지라 리얼포스를 처음 만질 때만 하더라도 좀 밋밋하지 않은가 -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십분 치면 빠져들고 한 시간이면 익숙해지고 하루만에 맛을 들였다. 이쯤 되니 다른 키보드는 쓰기가 싫다. 여기 대면 멤브레인은 치는 맛이 둔탁하고 기계식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중독성이 아주 높다. 정전용량 스위치-러버 돔 작동기 키보드 중에서는 가히 최고이며 러버 돔 작동기 키보드 중에서는 유래가 없을 지경이니, 웬만한 기계식 키보드도 이를 능가하긴 어려우리라.

- 결론

토프레의 리얼포스 101은 오늘날 보기 드문 최고급 키보드다. 스위치부터 자판 인쇄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부분이 없다. 10년, 20년 전의 키보드 중에서도 이만큼 고급스런 사양의 키보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한가지 극복하기 힘든 문제는, 다름아닌 가격이다.
현재 국내에서 모 업체가 수입을 고려하고 있지만, 세금 및 운송비 등을 고려하면 판매가는 23만~25만원 가량 될 것이라 한다. 만원짜리 키보드가 널린 판국에 20만원대 키보드라니! 보통 사람이라면 입이 쩍 벌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예나 지금이나 좋은 건 비싸기 마련이다. 이만큼의 키감과 완성도를 보여주는 키보드라면 그 정도는 아깝지 않다. 도리어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10년, 20년 전의 명품 못지않은 이 시대의 ‘명품’이기 때문이다. 쇠퇴해가는 고급 키보드 시장을 밝히는 횃불과도 같은 존재다.

가격대 성능비로는 최악의 선택일지 모르지만 오로지 성능만을 고려한다면 리얼포스 101은 최선의 선택이다. 단, 아직 정식 수입이 확정되지 않은데다 일본 내에서조차 구하기 어렵다는게 걸림돌이다.

- DJ.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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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J.H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