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Apple II로 퍼스널 컴퓨터의 시대를 열어젖히며 천하를 호령하던 애플도 80년대 IBM의 도전, 90년대 MS의 맹공을 받으며 비실거리는 처지로 전락해 버렸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던가.
헌데 창립자인 스티브 잡스가 복귀하면서 다 죽어가던 애플은 조금씩 소생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98년, 애플은 아이맥(iMac)을 내놓으며 결정적인 기사회생(起死回生)의 계기를 마련한다.
아이맥은 모니터 일체형의 매킨토시로 철저하게 개인용 시장을 노린 상품이었다. 그러나 매킨토시는 물론이고 여타 PC와도 크게 차별되는 점이 한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디자인(Design)에 있었다.
아담한 크기, 짙은 청색 톤, 유려한 반투명 케이스의 아이맥은 데스크탑 컴퓨터 디자인의 상식을 혁파한 제품이었다. 전문적인 평론가들은 이런 장난감 같은 제품을 누가 사겠냐며 비웃기 바빴지만, 그들 모두는 얼마 가지 않아 한가지로 비웃음의 대상이 될 운명이었다. 왜냐하면 아이맥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비슷한 디자인의 아류작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 거야 당연지사.
이후 애플은 파워맥, 큐브, 파워북, 아이팟 등에서 계속해서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며 컴퓨터 산업 디자인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가전제품처럼 컴퓨터에서도 성능보다 디자인을 중시하는 풍조가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은 게다.

본체가 그럴진대 주변기기 디자인이 뒤질 리 만무하다. 하지만 초기 아이맥의 동그란 퍽(Puck*) 마우스와 반투명한 표준 USB 키보드는 많은 사용자들의 원성을 샀다. 동그란 마우스는 손에 쥐기 힘들고, 키보드엔 편집 키도 없는데다 키감마저 밋밋했기 때문이다.
(* 하키 퍽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개중엔 P를 F로 발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런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제품이 2000년도에 등장한 흑연색(Graphite)의 애플 프로 마우스와 프로 키보드다. 프로 마우스는 손으로 잡기 쉬운 길쭉한 모양새의 광학 마우스였고, 프로 키보드는 108 키를 갖춘 풀 사이즈의 멤브레인 키보드였다.
이 두 제품은 수 차례의 마이너 체인지를 거쳐 지금껏 생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애플의 주력 데스크탑 키보드의 중시조(?), 그래파이트 애플 프로 키보드 초기형의 성능은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제품 사양
제작사애플 컴퓨터
제품명Apple Pro Keyboard (Graphite)
제품가격약 12만원인터페이스USB
크기 465x213x50 (mm) 무게 약 1000 g 대
키 개수108키키 스위치멤브레인 스위치
키 작동기러버 돔키캡 모양원통형(Cylindrical)
자판 인쇄실크 스크린측면배열스텝 스컬쳐 1

- 외관

이번에 리뷰한 제품은 애플 키보드 초기형(속칭 그래파이트 키보드)로 반투명한 은빛 프레임과 검은색(정확히는 짙은 흑연색) 자판의 대비가 아주 선명하다. 중기형인 애플 키보드(속칭 화이트)에선 프레임과 자판이 흰색으로 바뀌었고, 현재 출시되는 유/무선 프로 키보드(속칭 누드 키보드)에선 프레임 여백이 없어지다시피 했다.
(누드 키보드 등은 나중에 별도로 리뷰할 예정입니다)

어쨌건 프로 키보드의 걸출한 디자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드럽게 휘어진 투명 아크릴 프레임 내부는 밝은 은빛이고 반투명한 키캡은 짙은 흑연색이다. 프레임 상단에는 안쪽에서 음각(陰刻)된 애플 마크가 눈에 띈다(초기 모델은 하부 프레임 한가운데에도 애플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상, 하부 프레임은 꺽쇠와 나사, 접착제까지 동원해 단단히 결합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분해하면 원상 복귀는 불가능하다.

상부 중앙에는 본체와 연결되는 USB 케이블이 붙어 있고 좌,우측에 각각 1개씩 총 2개의 USB 포트가 붙어 있다. 무전원 USB 허브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마우스 등을 연결할 때 사용할 수 있다. 본체와 연결되는 USB 케이블의 길이는 약 80mm에 불과하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별도의 연장 케이블(약 90mm)이 포함되어 있다.
Caps Lock, Num Lock 키를 누르면 반투명한 키캡 아래 녹색 LED가 은은하게 빛난다. 일반 키보드에 비해 크기가 작다 보니 최상부의 펑션 키와 미디어 키가 일반 키와 근접해 있다. 오타 방지를 위해 펑션 키와 미디어 키의 전면 경사각을 크게 기울이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하부 프레임에는 미끄럼 방지용의 반투명 실리콘이 네 군데 붙어 있다. 다른 키보드처럼 검은색 고무가 붙어 있었다면 얼마나 보기 흉했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열었다 접었다 하는 플립형 높이 조절 받침대도 키보드와 하나된 듯 하다. 상단 안쪽에는 장중하고 은은한 회색조로 인쇄된 제품 레이블이 감칠맛을 더해준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제품 생산지는 말레이시아였다.


플립형 높이 조절 받침대 (애니메이션)

전체적으로 보기 좋은 것은 물론이요 세세한 부분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했으니 디자인은 물론이요 완성도 역시 나무랄 데가 없었다.

- 키캡 및 레이아웃

키보드 측면 배열은 스텝 스컬쳐 1 방식을 따르고 키캡 모양은 원통형(Cylindrical)이다. 앞서 말했듯이 키캡 색상은 짙은 흑연색이고, 그 면적이나 높이는 평균보다 약간 적은 수준이다. 상단에는 아주 얕은 미끄럼 방지 요철(凹凸)이 새겨져 있다.

국내에서 정상적으로 유통되는 키보드답게 영문과 한글 자판이 동시에 찍혀 있다. 키캡과 대비될 수 있도록 자판은 흰색 실크 스크린 인쇄로 찍어냈다. 상당히 도톰하게 찍어냈기에 인쇄가 지워질 염려는 없지만, 오래 쓰다 보면 하얀 자판에 손때가 묻어 지저분해지는 것만은 피할 길이 없다.
손가락 위치를 잡아주는 F 키와 J 키의 기준 돌기는 키캡 중앙에 작은 원형으로 솟아 있다. 언더바(_) 형태의 돌기에 익숙해졌다면 약간 생소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지난번 켄싱턴 스튜디오보드 키보드 리뷰에서도 언급했듯이 PC와 맥 키보드 배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1. 소프트 파워 온/오프 키 (최근의 맥 키보드에선 사라졌음)
  2. Print Screen/Scroll Lock/Pause 키 대신 F13, F14, F15까지의 펑션 키
  3. Windows 키 대신 Command 키
  4. 17개의 텐키 대신 18개의 텐키(=키 추가되어 연산자 키 배열이 PC와 다름)
  5. 텐키 윗쪽에 4개의 미디어 키(Volume Up, Volume Down, Mute, CD Eject 키)
  6. 한영, 한자 전환 키 없음

프로 키보드는 1번의 소프트 파워 온/오프 키가 없어진 108키 배열의 맥 키보드다. 맥 외에 PC에 연결해 사용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1. Print Screen/Scroll Lock/Pause 키 사용 불능
  2. 익숙치 않은 텐키 배열
  3. 미디어 키는 Windows XP 이상에서만 사용 가능(CD Eject는 사용 불능)
  4. Command 키가 Windows 키로 할당됨

가장 큰 걸림돌은 4번인데, 이는 KBDMania.net에서 개발 중인 KeyFree를 이용하거나 Windows 레지스트리 조작으로 해결할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Windows 환경에서도 애플 프로 키보드를 큰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 키감 및 사용감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는 옛 말이 있다. 그렇다면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애플 키보드의 키감은 어떨까.

애플 프로 키보드 내부에는 멤브레인 스위치/러버 돔 작동기가 탑재되어 있다. 헌데 그 키감은 평범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좋게 말하면 부드럽고 나쁘게 말하면 물렁하다고나 할까.
키를 눌렀는지 안 눌렀는지 판별하기 힘들 정도로 손끝이 무디고, 키 깊이가 얕아서 시원하게 타이핑하는 맛이 떨어진다. 뿐만 아니라 저가형 멤브레인 키보드에서 흔히 보이는 스위치 오작동도 종종 눈에 띈다. 키캡이 건들대는 현상은 차라리 애교에 속한다..

이러니 손이 절로 피곤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오타도 잦은 편이다. 아무리 따져봐도 그 키감이나 사용감은 10만원대 고가 키보드에 어울리지 않는 수준이다.

- 결론

만점 짜리 디자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애플 프로 키보드는 당당히 만점을 받을 자격이 있다. 문제는 디자인을 뺀 나머지 부분이다. 가격만 해도 물경 12만원. 게다가 겉포장을 한 꺼풀 벗겨보면 평범한 수준의 멤브레인 스위치와 물렁한 러버 돔 작동기가 드러난다.

가전제품은 물론이고 컴퓨터를 선택할 때도 디자인을 중시하는 시대라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성능이 비슷할 때의 이야기다. 성능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좋은 디자인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애플 프로 키보드에 후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과거의 명기(名器)인 IIgs 키보드나 확장 키보드 I이 그리워질 뿐이다.

겉모양보다 키감을 중시하는 실속파라면 애플 프로 키보드는 거들떠볼 가치조차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폼은 잡고 죽어야겠다는 디자인 중시파, 혹은 극소수의 맥 유저라면 잠시 고민해 볼만 하다. 하지만 그럴 돈이 있다면 다른 키보드를 물색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 DJ.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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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J.H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