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사용한 키보드의 키감은 아무래도 처음만 못하기 마련이다. 작동기 역할을 하는 용수철 혹은 러버 돔이 열화(劣化)되기 때문이다. 용수철은 오래 쓸수록 탄력이 떨어지고 러버 돔은 딱딱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용수철이나 러버 돔의 수명은 의외로 길다. 싸구려 멤브레인 키보드의 러버 돔조차 1년은 버티고, 고급 기계식 키보드의 용수철은 5년에서 10년은 너끈하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슬라이더(Slider) 부분이다.
슬라이더는 아래위로 오르내리며 스위치를 누르는 역할을 한다. 기계식 키보드의 경우에는 스위치 접점을 감싼 하우징(Housing)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고, 멤브레인 키보드에선 외부/내부 프레임에 고정되어 있다. 슬라이더, 하우징, 프레임을 막론하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으니만큼 반복되는 마찰에 의해 그 표면이 조금씩 마모되고 변형된다. 용수철이나 러버 돔의 수명이 끝나기도 전에, 슬라이더의 열화(劣化)로 키감이 뻑뻑해지거나 서걱서걱해지기 일쑤다.

이런 경우에는 구리스(Grease)를 슬라이더와 하우징 사이에 발라서 키감을 어느 정도 회복시킬 수 있다. 타미야의 미니 사륜(4WD)용 구리스가 좋다고들 하는데, 이는 국내에서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다.


미니 사륜용 몰리브덴 구리스 / 세라믹 구리스


하지만 미니 사륜의 차축은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빠른 속도로 회전한다. 몇 차례 주행하고 나면 차축의 구리스를 새로 칠해줘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 혹은 당연하게도 - 미니 사륜은 주 고객인 어린이들이 쉽게 정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구리스를 새로 칠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미니 사륜용 구리스도 점착력과 지속성을 높이는 대신 윤활제로써의 성능을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리스가 제 효과를 발휘하는 기간은 잘해야 한두 달 정도에 불과하다.
불행히도 키보드는 미니 사륜과는 달리 정비하기 쉽잖은 물건이다. 키캡을 죄다 뜯어내고 슬라이더와 하우징 사이에 구리스를 바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중노동이다. 그 짓을 매달 반복해야 한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저으리라.

그런데 일본의 키보드 전문 상점 네오텍의 제품 목록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게 눈에 띈다. 그게 뭔고 하니 ‘키보드 윤활제’ 스무스 에이드다.

스무스 에이드의 주 성분은 미국의 RO59사가 개발한 테프론계 코팅 윤활제다. RO59사의 주장에 의하면 세라믹, 플라스틱, 금속 등에 사용할 수 있으며 정착성이 높아 윤활성능이 오랫동안 유지된다고 한다. 스무스 에이드는 이 RO59 윤활제를 증류수에 1:3 비율로 희석시킨 것이다.

패키지 구성은 매우 단순하다. 스무스 에이드가 들어간 향수병만한 크기의 병 하나(18cc 용량), 일본어로 작성된 설명서 한 장이 전부다. 처음에는 용량이 좀 적지 않나 싶었지만 웬걸, 이 정도면 키보드 10개는 칠하고도 남을 만 했다.
병 뚜껑 안쪽에는 아카데미나 타미야의 프라모델용 접착제와 마찬가지로 작은 붓이 하나 달려 있다. 가지런히 정리된 붓끝은 잘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기 편리하다.

스무스 에이드의 사용법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일단 키캡을 전부 벗겨낸다. 그리고 슬라이더와 하우징(혹은 프레임) 표면의 오물과 먼지를 제거한다. 그런 다음 스무스 에이드를 슬라이더 표면에 칠해준다. 슬라이더와 하우징 사이도 구석구석 잘 칠해준다. 가능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스위치를 완전히 분해해서 슬라이더 전체에 골고루 발라주는 방법도 있다.


Apple IIgs 키보드의 알프스 스위치에 스무스 에이드를 바르는 장면


마지막으로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해 말리던가, 아니면 저절로 말라붙을 때까지 30분 정도 느긋이 기다린다. 단, 헤어드라이어 사용시에는 고온의 열풍에 플라스틱 부품이 변형될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하기 바란다. 완전히 건조된 다음에 키캡을 끼운다.
스무스 에이드는 수성 윤활제이니만큼 너무 많이 칠하면 건조 시간이 늘어난다. 적당한 분량을 얇게 바르는 편이 좋다.

스무스 에이드 투여(?) 결과, 키보드의 키감은 이전보다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코팅 막이 얇기 때문인지 변화의 폭이 그다지 크진 않다. 대략 10~20% 정도 부드러워진다고 생각하면 옳다. 다행스럽게도 코팅 막의 점착성과 지속성은 높은 편이다. 일본 사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10개월 이상 유지되는 모양이다. 시험 삼아 1시간 이상 충분히 건조시킨 다음에 스무스 에이드를 덧칠해 봤더니 키감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일본에서 스무스 에이드의 판매 가격은 953엔. 우리 돈으로 만원 가량이다. 키보드 전용 윤활제로써의 가치와 성능을 따져보자면 가격대 성능비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구리스에 비해 효과는 떨어지지만 내구성은 훨씬 좋다. 서걱거리거나 뻑뻑해진 키감을 부드럽게 만드는 효과도 일품이다.
하지만 스무스 에이드를 만병 통치약으로 생각해선 곤란하다. 키보드 윤활제란 이름에 걸맞게, 슬라이더와 하우징(혹은 프레임) 사이의 마찰을 줄여서 키감을 부드럽게 해주는 것이 전부다. 용수철이나 러버 돔의 열화로 키감이 죽어버린 경우에는 아무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이것은 구리스도 마찬가지다).
현재 모 업체가 수입을 고려하고 있지만 확정되지는 않았다. 대략 만원 정도의 가격이라면 한번 써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 DJ.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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