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가장 존경하는 컴퓨터 컬럼리스트인 박순백님이 쓰신 글을 허락을 받고 저의 사이트에 옮겨놓은 것 입니다. 이 글은 제가 키보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활을 한 글 입니다. 쓰여전 시기가 벌써 십년전의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키보드에 관하여...

박순백, September 29, 1992

어떤 키보드

하이텔의 수퍼스타인 김현국(pctools) 씨가 필자에게 치코니(Chicony) 키보드를 선물하였다. 사실 이 제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다가 김현국 씨의 글을 읽으면서 치코니란 이름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그 후 이 키보드를 사용하는 몇 사람으로부터 또 이 키보드에 대한 얘기를 듣고나서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알고 보니 하이텔 사용자들의 치코니 키보드에 대한 관심은 그 진원지가 김현국 씨였다. 하여간 예술적인(state-of-the-art) 키보드라면 전설적인 셀렉트릭(Selectric) 전동 타자기의 키보드, 키트로닉(Keytronic) 키보드, 오리지널 애플 ][의 키보드 등 PC 초기 시절의 것과 옴니키/울트라(Omnikey/Ultra) 등의 좋은 키보드만을 생각하고 있던 내게는 좀 의외의 정보였다.

일단 선물 받은 키보드를 몇 번 두드려 보았다. 현재 필자가 쓰고 있는 것은 짤깍대는
소리(어떤 분들은 "또깍댄다."고 표현한다)가 별로 안 나는 것인데, 이것은 그 소리가 비교적 셌다. 소위 택타일(tactile) 방식의 키보드인 것이다. 필자는 원래 이런 방식의 키보드를 좋아했으므로 그 건 괜찮다고 느꼈다. 이 치코니(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의 옆모양은 위로 배가 나온 것 처럼 생겼다. 놀라서 자세히 보니 키보드의 글자판 자체는 그렇지 않은데 단지 옆면의 양단만을 위로 둥글게 처리한 것이었다. 인간공학적인 면을 고려한다면 키보드들은 옆에서 키의 배열을 볼 때 가장 하단과 최상단이 가장 많이 튀어나오고, 중간은 배가 들어간 모양이라야 한다. 치코니는 가장 보편적인 구형 BTC(큐닉스의 옴니 스테이션이 이 키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처럼 밋밋한 평면형은 아니고, 올텍(Ortek) 등과 비슷한 정도였다. 즉, 인간공학을 중시하는 회사들의 것 만큼 둥글게 처리되지는 않고 있었다.

치코니를 분해하고 난 느낌

필자는 84키보드만을 쓰므로 101키 타입의 키보드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이것은 하필
이면 101키 타입이었다(하기사 요즘은 84 키를 보기가 더 힘들다). 하지만 치코니 키보드에 대한 관심이 있던 차여서, 필자는 이 키보드를 뜯어보기로 했다. 뜯는 데는 불편했다. 두 개의 드라이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키보드들은 대체로 4개 내지 5개의 너트로써 고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안 좋은 키보드일수록 이 너트의 개수가 불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너트의 수가 적은 키보드들은 상하의 플라스틱 모울드가 서로 결합될 수 있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너트는 이미 결합된 것을 좀 더 확실하게 지탱해 주기 위해서만 필요할 뿐이다. 너트를 많이 사용하는 것들은 상판은 플라스틱으로 만들고, 밑의 판은 철판 등으로 만들어 이를 모두 너트로 조이기 때문에 오히려 안 좋은 것이다. 상하의 플라스틱 모울드가 결합되지 않는 타입의 것들도 있는데, 밑판을 철판으로 댄 것과 이렇게 따로 떨어진 플라스틱을 너트로 조인 키보드들은 오래 쓰다 보면 괜한 잡소리가 나는 수도 있다. 요즘은 보통 결합식을 쓰며, 같은 굵기의 너트로 고정을 하는데, 이 치코니는 세 개의 큰 너트와 아주 작은 두 개의 너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작은 너트를 중간 크기의 드라이버를 사용해서 풀다가 너트의 홈이 뭉개져 버렸다(그래도 분해에는 성공을 했고, 나중에 대체 너트를 구해서 다시 조립했다).

치코니를 외관상으로 볼 때 한 가지 불만이 있었던 것은 코드가 키보드로 연결되는 부분이었다. 이것이 정확히 들어맞지 않고, 이상하게 조금씩 움직여서 좀 성가셨다. 모울드를 조악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되었다(태국제라는 이미지 때문에 그러한 의심이 들었음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뜯어보니 별 문제는 없는 것이었다. 연결 부위에서만 틈새가 있어서 코드가 불안정하게 고정된 것으로 보였을 뿐 키보드 바로 안쪽에서는 이를 완벽하게 고정하는 플라스틱의 홈이 있었던 것이다. 이 키보드는 우리 나라에서 특별히 주문하여 생산한 것이라는 걸 외관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한글 자판은 물론, 한자 키와 한/영 키를 따로 가지고 있는 걸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뜯어보니 모울딩된 상하 판이 매우 정교하게 들어맞아 있었고, 키 스위치들이 고정되어 있는 중간의 판이 밑의 모울드에 매우 견고하게 끼워 맞춰 있었다. 그 정도면 일단 필자의 규격(?)에 비추어 봐도 합격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모울딩된 플라스틱에는 푸른 스탬프로 Daewoo라고 찍혀 있었으며, 컨트롤 칩은 한국에서 제작된 듯 Korea라고 쓰여 있었고, Chicony - Ver-K라고 쓰여 있는 것이 Ver(sion)-K(orea)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키 스위치는 일본제 알프스 사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이 알프스 사의 제품이라는 것은 일단 이 키보드가 키 스위치의 수명에 있어서는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알프스 사의 키는 그 성능에 있어서 평균고장시간(MTBF) 간격이 타사의 1.5배 이상 3배 정도나 긴 것이 보통
이기 때문이다(그럼 문제는 이제 키보드의 케이스를 얼마나 잘 만들었는가 등으로 압축된다).

이의 명세서에는 XT/AT 절환 스위치가 오른편 밑바닥의 리트랙터블(접을 수 있는) 받 침대를 올리면 나온다고 써 있어서 필자를 실망시켰다. 요즘은 키보드가 시스템이 XT인지 AT 인지를 자동 인식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AT 초창기의 제품처럼 스위칭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때문이다(그리고 XT가 거의 사라진 지금 이런 장치가 무엇에 필요한가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 KB-5191R이란 모델은 역시 자동 인식형이었다. 이 키보드의 플라스틱 모울드 는 예전 모델의 것을 그냥 쓰고 있는지 그 자리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밑으로 PCB 기판이 보였다.

일단 모든 면을 살펴보고 다시 타자를 해보았다. 택타일 방식이어서 여기서 나는 짤깍대는 소리는 비교적 경쾌했다. 가장 경쾌한 느낌을 주는 IBM의 셀렉트릭(전자 타자기) 키보드에 비해서는 덜 경쾌했지만, CPT 등의 오우디오 택타일 휘이드백(audio tactile feedback: 소위 택타일 방식의 공식 명칭) 방식의 키보드보다는 더 경쾌했다. 타자를 하면서 나는 소리는 무조건 경쾌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필자는 키 캡이 가장 많이 눌려졌을 때 약간 탁한 느낌이 드는, CPT나 Wang, Rainier 등, 거의 모든 본격적인 전용 워드 프로세서의 키보드도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취향이란 것은 변덕스러운 것이어서 셀렉트릭 키보드를 사용할 때의 대단한 경쾌함도 즐겁지만, CPT 키보드 등의 뒤끝의 음이 퍼지는 감촉도 매우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셀렉트릭의 키보드는 타자를 할 때 키보드가 결코 무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눌림에 있어서는 약간의 저항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이것이 손가락 끝에 약간의 긴장을 가져오게 되며, 이는 타자에 임하는 사람에게 긴장감을 줄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 자세까지 바꿔 놓게 된다. 울림이 영롱한 짤깍거림도 타자수에게 긴장감을 부여하는 요소가 된다. 이에 비하여 본격적인 워드 프로세서들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은 거의 저항감이 전혀 없이 가벼우나 키를 누르는 마지막 터취가 마치 살짝 튀어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키 스위치가 고정된 철판의 아래 부분에 설치된 실리콘 패드에 의해 철판의 울림이 희석되도록 한, 약간 탁한 음이 들리는 것도 이의 특징이다.

이 두 가지의 느낌과 비교할 때 치코니의 것은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정도의 느낌을 주고 있었다. 요즘 한국 시장에 많이 들어오고 있는 대만제 올텍의 것과 키를 누르는 느낌은 거의 같았지만, 그 차이는 올텍의 키를 세게 치는 경우 가장 끝음이 지나치게 많이 퍼지는 것 같고, 치코니의 것은 퍼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키 스위치가 잘 고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에 비하면 BTC의 대부분의 제품들은 지나치게 쉽게 키가 눌려지기 때문에 키보드를 누른다는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택타일 방식처럼 어느 만큼 눌렀을 때 글자가 발생되는지의 감도조차 느껴지지 않는 등 매우 재미가 없는 것이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저항감도 없이 눌려진 키보드가 가장 깊이 눌려진 상태에서는 지나치게 탁한 음을 내므로 타자의 맥을 끊는 것도 이 키보드의 문제라고 하겠다. 올텍은 가격에 비해서는 좋은 키보드이다. 이것은 다른 것과 달리 키보드 코드를 끼워 넣고 고정할 수 있는 홈이 키보드의 중앙 하단에 양쪽으로 파여 있어서 컴퓨터를 설치한 후 키보드 코드의 방향을 정하기 편하게 되어 있다(별 것이 아닌 듯 하면서도 이는 매우 세심한 배려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몇 가지 소프트웨어를 위해 빳빳한 종이에 인쇄된 여러 장의 템플릿 (template)을 제공하고 있으며, 사용하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이를 쉽게 넘겨볼 수 있는 장치가 키 보드 상단에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치코니에는 이런 배려까지는 되어 있지 않다.

한/사/모/의 오재철 씨는 이 키보드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문자 키와 기능 키 간의 간격이 너무 좁아서 불편하고, 그래서 다른 키를 건드리지 않도록 손가락을 길게 뽑아서 기능 키를 누르는 것도 고역이라는 것이다. 이 키보드는 타자시 약간의 잡음을 내고 있는데, 이를 두 손으로 들고 좌우로 세게 흔들어 보면 키 캡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이므로 이 키들이 제대로 고정되어 있는가를 의심케 하기도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하지만 필자가 본 것은 매우 잘 고정되어 있는 것이어서 이런 문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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