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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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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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신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목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무어라 말을 하려 하지만 잘 되지를 않습니다. 괴로운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이내 거친 신음을 토해냅니다. 당신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절망과 체념, 그리고 비애감…….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내 손으로 당신의 숨을 끊어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거,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잖아요.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
당신이 고개를 내젓습니다. 그리고 잘 움직이지도 않는 손을 들어 내 손위에 포개어 올립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옵니다. 동시에 당신의 손을 뿌리칩니다. 아시잖아요. 나는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거.
당신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사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사내의 얼굴을 마주 본 채로 계속 눈물을 쏟아냅니다. 여전히 사내는 역겹고 흉측한 표정 그대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편합니다. 이 사내 앞에서는 눈물을 감추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사내는 나의 눈물을 놀리지도, 조롱하지도 않을 테니까요. 더러운 년놈들이라며 우리를 매도하지도 않을 테니까요. 물론, 지금 저 사내가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겠지요. 상관없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내가 왜 나를 잡아먹고 싶어 저리도 안달이 났는지, 왜 저들은 항상 배가 고프고 괴롭기만 한지 나 또한 알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합니다. 꺼억, 하는 신음인지 울음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괴성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억지로 짜내는 소리의 마디마디마다의 애원을, 절박함을 사무치도록 느낄 수 있습니다. 아, 이제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건가요. 행동해야만 할 때인 건가요.
당신의 목소리가 점점 흐느끼는 듯합니다. 나는 눈을 감습니다. 당신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집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뭅니다. 급기야 당신은 밭은기침과 함께 괴로움이 그득한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합니다. 도무지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그만, 내 귀를 틀어막고 맙니다.
***
"제 건 줄 알았어요."
고개를 푹 숙인 채, 당신의 따님에게 맞아 부은 볼을 부여잡고는 중얼거렸습니다. 그녀는 내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앉아 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그런 그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똑바로 앉아!"
그녀가 마지 못해 자세를 바로 합니다. 선생님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잠시 일별한 뒤 다시 내게 말을 걸었습니다.
"뭐라고?"
"진짜에요."
고개가 더 수그러듭니다. 선생님은 답답하다는 듯, 내 턱을 살짝 잡아 위로 치켜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 당황해서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립니다. 어쩌지. 어떡하지. 선생님은 내 턱을 몇 번 흔들어보다 김이 샌 듯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얘 도대체 뭐라는 거니?"
"지 건 줄 알았다는데요."
"응?"
용기를 내어 다시 입을 엽니다.
"정말이에요. 거기에 이름이……."
"하!"
그녀의 코웃음 소리에 주눅이 들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맙니다.
"이름? 장난해? 말이 돼? 니 거 내 거가 구분이 안가?"
그저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택배상자를 열어 본 게 전부였습니다. 단지 그 뿐이었습니다. 그냥 조금 기분 나쁘고 말 일이었습니다. 가벼운 사과 정도면 웃고 넘어갈만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녀와 나 사이의 관계가 상당히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지만 이번 일이 그렇게까지 패악을 부릴 일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조금 의문입니다.
내가 상자 안의 두툼한 봉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그녀가 교실 안으로 후다닥 들이닥쳤습니다.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나와 내 앞의 택배상자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나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상자와 그녀를 번갈아 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입매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내 손에 들려 있던 상자를 빼앗아 자기 자리에 던져놓고는, 다짜고짜 내 얼굴에 손을 날렸습니다. 찰싹.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녀의 손바닥이 또 한 번 날아왔습니다. 찰싹.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맵디 맵게 찰싹. 그리고 이어지는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분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용기를 짜내 고개를 듭니다. 적어도 그녀에게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당당하게 항변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내가 악당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 친구 모두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우리를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
그뿐입니다. 그녀는 나를 때렸으니 가해자고, 나는 일방적으로 얻어맞았으니 피해자가 되어야 정상인 그런 상황. 그런데 왜 그녀는 저리도 당당한 거고 나는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 도둑취급을 받고 있는 걸까요. 변명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내 입장을 설명해야 하는데 왜 나는 입도 벙긋 못하고 그저 쩔쩔 매고만 있는 걸까요. 그녀의 카랑카랑하고 당당한 목소리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제법 조리가 있습니다. 반면, 나는 변명은커녕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내 발끝을 상대로 눈싸움만 열심일 뿐입니다. 점점 그녀의 행동은 정당해지고 있고 나는 도둑이 확실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이건 아니야.'
아무리 그녀가 교내 스타라 할지라도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급우에게 손찌검을 했으니 그냥 넘어가기는 힘든 일일 겁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다지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서로 적당히 화해하는 선에서 좋게 마무리가 되는 쪽이 확실히 괜찮은 모양새일거라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뭐, 선생님 입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녀의 교내에서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일을 더 이상 키워봤자 선생님에게 득 될 것이 없을 테니까요. 결국, 남의 물건에 손 대는 것은 큰 잘못이지만 그래도 폭력은 안 된다. 그러니 서로 사과하고 없던 일로 하자. 이것이 선생님이 심사숙고 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나와 그녀, 모두에게 지금의 이 불미스러운 사건의 책임이 있다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하지만 난 잘못한 게 없는 걸.'
"난 잘못한 게 없다니까요!"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 그때였습니다. 상담실 문이 열리며 당신이 들어섰습니다. 우리모두의 시선이 당신을 향했습니다. 당신은 피곤한 표정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당신의 등장에 선생님은 놀라 엉거주춤 일어섰습니다. 당신과 선생님 사이에 짧은 인사가 오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는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딸아이가 여기 있다 길래……."
당신의 말을 자르고 그녀가 끼어듭니다.
"왜 왔어요? 여기."
그녀를 흘끔 훔쳐봅니다. 순간 움찔합니다. 그녀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튀어 오르고 있습니다. 분노와 혐오, 경멸 등의 감정이 온통 뒤죽박죽으로 얽힌 시선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왜 왔냐구요. 여기."
당신은 그저 얼굴을 찌푸리고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합니다. 당신과 그녀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선생님의 표정이 난처해 보이기 그지 없습니다.
"네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오해라니!"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빽 지릅니다.
"그 거지같은 걸 학교에서까지 받아보게 해놓고서는 오해라니!"
그리고는 문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갑니다. 그러다 당신 앞에 잠시 멈춰 서서는.
"더러워."
하고 밖으로 나가 버립니다. 당신은 굳은 표정으로 그대로 서 있습니다. 선생님은 무안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당신과 상담실 문을 번갈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의자에 주저 앉은 채로 주변의 눈치만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과 얼굴이 마주치고 맙니다. 동시에 이 애매한 상황에 대한 선생님의 짜증이 나를 향해 폭발해 버립니다.
"넌……. 그래, 내일 오전에 부모님 모셔 와라."
"……네?"
순간 하늘이 노래집니다.
"못 들었어? 네 어머니나 아버지를 뵙고 이야기하자고."
"선생님, 저기……."
나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지만 선생님은 매정하게 내 말을 잘라버립니다.
"아, 됐으니까 그만 나가 봐."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뭐해, 안 나가고?"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선생님의 짜증을 풀어야만 합니다. 싹싹 빌어서라도 선생님의 심기를 누그러뜨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게 되지를 않습니다.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마주 보는 것도 두렵고, 입을 열어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해도 혀가 굳어버렸는지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습니다.
"아, 진짜 얘는 속에 뭐가 들었을까……."
선생님이 손에 들고 있는 회초리로 내 어깨를 톡톡 칩니다.
"안 일어나니?"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날카로워집니다.
"안 일어나?"
버팁니다. 그냥 눈을 꾹 감고, 버텨 봅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나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나는 절대 부모님을 모셔와서는 안됩니다.
"얘 도대체 왜 이래?"
이때.
"그만 됐습니다."
당신의 목소리입니다. 당신의 발자국 소리가 나를 향합니다. 이어 무언가 부스럭하는 느낌. 당신이 내 앞에 쪼그려 앉고 있나 봅니다. 당신은 내 어깨 위에 살짝 손을 올려놓으며 말을 걸어 왔습니다.
“이름이 뭐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습니다. 아, 또 이 몹쓸 버릇. 아마 당신도 당혹스럽겠지. 그리고 다른 이들처럼 나를 외면하게 되겠지…….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마 나도 너를 야단칠 까봐 그러는 거야?”
당신이 내게 건넨 말입니다. 어떻게든 대꾸를 해야 하는데, 무어라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를 않습니다.
“…….”
“뭐가 그렇게 무섭니?”
당신 말대로 나는 무엇이 무서운 걸까. 왜 지금 이렇게 떨고만 있는 걸까.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데?"
맞아. 두려움. 그냥 두려움 그거. 나는 그저 모든 게 너무나도 무서웠던 거뿐이야. 나는 열심히 살았어. 항상 최선을 다 했어. 그런데, 그런데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
"뭐가 그리도 무서워서 고개를 못 드는 거야?"
갑자기 심장에서 쿵, 하는 소리가 울립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바보인 걸까. 그리고 가슴을 싸하게 잡아채는 통증. 힘겹게 고개를 듭니다. 당신이 나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 이렇게 간단한 걸. 순간 깨닫습니다. 왜 그토록 힘들었는지. 왜 그토록 괴로웠는지. 왜 발버둥을 쳐도 아무 소용이 없었는지. 바로 당신을 통해 처음 깨닫고 맙니다.
그래, 그것은 두려움. 그것이 나를 고개 들지 못하게 하고, 타인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게 한 겁니다. 모두가 내 잘못이었던 겁니다. 바보같이 그걸 이제서야 깨닫다니. 점점 머리 속이 멍해집니다. 짙은 회한이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치솟아 올라옵니다. 억지로 삼켜보려 하지만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오열이 터질까 두려워 입을 꽉 앙다물어 봅니다. 그런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당신의 목소리……. 당신이,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통증. 그리고 마법이 일어났습니다.
‘아!’
당신이 내 가슴 위의 명찰에 시선을 멈추고는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게 보여준 적이 없는 배려 가득한 표정으로 말입니다. 아아, 이 기분은 무얼까요. 그냥 서러움. 지독한 서러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서러움.
“우리 애하고 친하게 지냈으면 좋았을 걸.”
당신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쉽니다. 순간, 눈물이 쏟아집니다. 철이 든 이후로는 한 번도 흘려본 적이 없는 눈물. 아니, 내 기억이 미치는 곳 어디에서도 단 한 번도 흘려본 적이 없는 눈물이 이날 처음으로 주체 못하도록 쏟아져 내립니다. 처음이었으니까요. 당신을 만난 것도, 당신이 나를 알아준 것도 모두 처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느닷없는 내 흐느낌에 조금 당황한 듯합니다.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당신은 이내 나를 향해 사람 좋은 웃음을 보여주고는 내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두드립니다. 그리고 돌아섭니다. 당신의 넓은 등이 점점 멀어집니다. 문득 당신의 등 뒤로 숨어버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만 같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향해 뛰어가고만 싶습니다.
'안돼.'
다리에 힘을 주고 꾹 참습니다. 내 마음을 처음으로 들여다 보아준 당신입니다. 그 분에게 더 이상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참자. 참아야 해.
당신은 넓은 등을 나에게 내어 준 채로 선생님과 마주 보고 섭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또 한 번 왈칵 눈물이 쏟아집니다.
"우리 아이 문제입니다. 저 아이는 상관없잖아요."
4.
창 밖의 사내가 입을 벌리며 썩은 숨을 토해냅니다. 흡사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사내는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겁니다. 저들은 그저 고통을 모를 뿐 초인적인 힘을 가진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처럼 도구를 사용하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이렇게 보고 있자면 저들이 그다지 해로울 것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동물원의 사자나 호랑이들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도, 마치 동물원의 철창 같이 적당히 서로의 접점을 가로막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냥 서로 있는 듯 없는 듯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자칫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때는 동족이었던 이들을 저버린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 아닐까요.
사내의 입주변이 실룩거리듯 경련을 일으킵니다. 왼뺨의 상처가 벌어지며 안에서 썩은 고름이 왈칵 터져 쏟아집니다. 그리고는 턱 선을 따라 흐물흐물 흘러내립니다. 제법 밝은 달빛 덕택에 이 모든 혐오스러운 광경이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정말, 지켜보기가 역한 광경입니다. 사내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싶습니다만……. 자칫 당신의 고통 어린 표정과 마주하게 될까 두려워집니다. 결국 사내와의 고역스러운 눈싸움을 계속 하는 쪽으로 내 스스로와 타협하고 맙니다.
사내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 여자의 믿음직한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였을 겁니다. 다른 보통의 가장들과 마찬가지로, 사내의 삶의 이유 또한 가족 그 자체였을 테지요. 그의 가족들은 그런 사내를 지극히 사랑했을 게 분명합니다. 아내가 그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실제, 그의 아내는 중독된 사내를 어떻게든 살려 보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무모하게도, 누군가-아마도 정계의 VIP로 짐작되는-를 위한 해독제의 수송차량을 습격할 궁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라고 별 승산이 없는 바보짓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녀가 어떻게 수송차량의 정보를 알아냈는지에 대해서는 짐작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녀에게 해독제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뭐, 요즘 같이 서로 간의 배려와 신뢰보다는 경쟁이, 생존이 절대가치가 되는 시절이라면 비밀이 비밀이기도 힘든 노릇이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극소수의 요인들에게만 제공되는 귀한 해독제에 관한 정보를 그녀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긴 합니다만.
그녀는 탈영장교의 시신에서 군용 권총을 확보했습니다. 권총을 이용해서 쓸만한 승용차도 강탈했습니다. 그녀는 수송차량이 지나갈 예정의 길목에 미리 매복을 했습니다. 그녀에게는 확실한 정보가 있었습니다.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녀의 시야 끝자락에 낡은 승합차의 실루엣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수송차량입니다. 결단의 순간, 그녀가 잠깐 망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해도 불길한 상상의 찌꺼기 모두를 말끔히 떨쳐내기는 힘들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절박함은 결국 그녀를 행동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엑셀을 힘껏 밟았습니다.
동시에 그녀의, 아니 당신과 나의 은색 세단이 길 한복판으로 갑작스레 튀어나갑니다. 우리의 난데 없는 난입에 수송차량은 무리하게 급정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추돌사고, 아무래도 세단보다 무게중심이 높은 수송차량은 보기 좋게 전복이 되고 맙니다.
아내가 우리를 돌아봅니다. 손에는 칼이 들려 있습니다. 우리는 뒷좌석에 결박된 채로 짐짝처럼 실려 있는 중입니다.
"무슨 짓이요."
당신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립니다. 그녀는 별다른 말을 않습니다. 마치 양해를 구한다는 듯,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우리를 결박하고 있던 나일론 빨랫줄을 칼로 끊습니다. 그리고는 조수석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그녀의 남편을 처연한 시선으로 잠시 일별합니다.
"미안해요. 이 사람마저 잃을 수는 없거든요."
그녀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그녀와의 불편한 동행 이래로 그녀가 제대로 입을 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아이를…… 우리 아이를 잃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까지 잃어버리면 안되거든요."
그녀는 자신의 남편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는 창 밖을 살피며 잠시 망설였습니다.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이내 결심이 선 듯 남편에게 진하게 입을 맞추고는 남편의 무릎 위의 권총을 집어 들었습니다. 문을 여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여자야."
그녀가 뛰쳐나가자마자 당신이 한 말입니다. 당신은 밖의 눈치를 보며 운전석 쪽으로 신중하게 자리를 옮겼습니다. 눈짓으로 조수석의 사내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습니다.
"이 자는 밖으로 던져버려야겠어. 그 전에……. 여기서 발을 빼자구."
창 밖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수송차량에서 경비업체 직원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기어나오며 주춤주춤 손을 머리 위에 얹고는 그녀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당신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당신이 내게 손을 내밀어 보였습니다. 자동차의 열쇠입니다. 그녀는 자동차 열쇠를 그대로 버려둔 채 뛰쳐나갔나 봅니다.
"정말 어리석은 여자야. 우리를 풀어줘서는 안됐는데."
저는 속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습니다. 저 여자는 어리석지 않아요. 다만 천성이 선했던 것뿐이라고요. 밖의 여자와 직원은 여전히 신경전 중입니다. 그녀는 직원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앗아 멀리 던져버립니다. 직원이 반항하듯 몸을 뒤로 빼자 그녀의 언성이 높아집니다. 직원은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양 손바닥을 펴 보이며 무어라 소리칩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그녀의 뒤로 또 다른 직원 하나가 살금살금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단단해 보이는 진압봉이 들려있습니다. 물론 그녀는 이를 눈치채지 못합니다. 아, 안돼.
"젠장, 시동이 잘 걸리지를 않잖아."
당신이 화를 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지만 이미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창 밖의 여자가 위험합니다. 뒤의 직원이 진압봉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내리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권총을 떨어뜨립니다. 그 순간 그녀의 정면의 직원이 달려듭니다. 그녀를 걷어찬 후 총을 집어 듭니다.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깁니다. 총소리. 여자의 관자놀이가 피를 뿜습니다. 이와 동시에 당신은 차의 시동을 거는데 성공합니다.
"어리석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여자야. 우리를 풀어줘서도 안됐고 저렇게 무모했어도 안됐어."
아닙니다. 저 여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그녀는 결코 남편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남편을 위해 행동한다면, 이리 될 수 밖에 없을 것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풀어준 겁니다. 차마 우리까지 죽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 겁니다. 그렇기에 저 여인은 결코 어리석은 여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하고 헌신적인 여인입니다. 적어도 나는, 그녀를 용서할 자신은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이제 직원 두 명이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옵니다. 두 눈이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여자의 동료로 생각할 테니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은 급하게 후진기어를 넣습니다. 차가 후진을 시작합니다. 직원이 우리를 향해 권총을 겨눕니다. 또 다시 총성 한 발이 울려 퍼집니다.
비명소리. 내가 아닙니다. 당신도 아닙니다. 사내의, 이제까지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사내의 비명소리입니다. 사내의 왼뺨에서 피가 콸콸 솟고 있습니다. 총에 맞은 상처입니다. 갑자기 사내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당신을 덮칩니다. 당신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자동차 열쇠를 뽑아 버립니다. 놀란 당신은 어떻게든 열쇠를 빼앗아 보려 하지만 사내의 완력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차창 밖의 두 직원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갑자기 사내가 당신의 목을 물어뜯었습니다. 당신의 외마디 비명. 내가 무얼 어찌할 새도 없이 갑작스레 벌어진 일입니다. 막아야 하는데……. 말려야 하는데, 너무 놀란 나는 미동도 못한 채 그저 넋 놓고 지켜보기만 할 뿐입니다. 심지어 비명조차 터져 나오지를 않습니다. 창 밖의 직원 중 하나가 사내에게 총을 겨눴습니다. 다시 총소리가 귀청을 울립니다. 사내의 피가 뒷좌석까지 튀어왔습니다. 사내는 당신을 내팽개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곧, 직원들에게 덤벼듭니다. 놀란 직원들은 사내에게 총을 쏴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내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까도 그렇고……. 아,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사내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원 중 하나의 목뼈가 꺾입니다. 사내의 손에는 여전히 자동차 열쇠가 들려있습니다. 사내는 그것으로 직원의 얼굴을 마구 난자합니다. 사내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철벅철벅, 직원의 얼굴에서 피가 튑니다. 고개를 돌려야 하는데, 저 끔찍한 장면에서 시선을 떼야만 하는데, 몸이 굳어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직원이 사내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등 뒤에 매달려 그를 떼어내 보려 합니다. 물론 별 소용없습니다. 사내는 손에 들려 있던 시신을 내팽개치고는 등 뒤의 직원을 움켜 잡습니다. 사내의 이빨이 직원의 목덜미를 깨뭅니다. 직원은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지릅니다. 직원의 손가락이 사내의 오른쪽 눈을 후벼 팝니다. 직원의 손이 부르르 떨립니다. 점점 더 힘이 실립니다. 사내의 안구가 밖으로 튀어 나옵니다. 하지만 사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직원의 목에서 피가 콸콸 솟기 시작합니다. 대동맥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모골이 송연 해지는 광경. 외면하고 싶습니다. 제발, 제발 내 몸이 움직여주었으면……. 하지만 몸은 옴짝달싹 하지 않습니다.
치명상을 입은 직원은 이내 축 늘어져 버립니다. 사내가 내 쪽을 바라봅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동시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눈치챕니다. 사내가 뛰쳐나갔던 앞의 조수석의 문이 아직 열려있는 채입니다. 정신이 퍼뜩 들어 문을 냉큼 닫고는 잠금 장치를 겁니다. 사내는 여전히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습니다. 차 주변을 배회하고는 있지만 그 이상은 어쩌지를 못합니다. 일단, 당신과 나는 안전한 셈입니다. 서서히 몸의 긴장이 풀립니다. 당신의 상태를 살핍니다. 당신은 의식을 잃은 채 신음을 내뱉고 있는 중입니다. 아…….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깊은 절망감.
첫째 날, 사내는 안면이 난자 당한 직원의 시체를 먹었습니다. 둘째 날, 또 다른 직원의 시체를 뜯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내는 자신의 아내의 시체를 먹어 치웠습니다. 사내의 몸은 빠르게 썩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총상으로 피를 흘리던 상처들은 썩어 문드러지며 서서히 뼈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내는 그 흉한 모습으로 나를 보며 침을 흘리고 있습니다.
***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고등학교 3년의 어두운 터널의 끝에서, 저는 울고 있었습니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의, 희망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날, 내 손에는 꽤 평판이 좋은 국립대학의 합격증서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제야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되었구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제 진짜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되었구나. 그 동안 참고 참았던 그리움이 물밀 듯 밀려 올라왔습니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당신을 향해 달렸습니다.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난생 처음 나를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 보아 준 단 한 사람. 빨리 만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당신 앞에 열어 놓아야 했습니다.
당신과의 운명적이었던, 하지만 비루했던 첫 만남 이후, 나는 결심했습니다. 당신의 여자가 되기로. 당신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여자가 되기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양부모님께 짐 되기가 싫어 반쯤은 포기하고 있던 대학진학 또한 욕심을 부릴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도 이어진 당신의 따님의 괴롭힘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저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으니까요. 그것도 나름 쓸만한 어른이 되어야만 당신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의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한 번쯤은 당신 혼자 문 밖을 나설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해가 하늘 꼭대기에 걸렸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습니다. 당신 앞에 나서기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들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해가 뉘엿뉘엿 지고 밤이 되도록 당신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찼습니다. 참고 기다렸습니다. 목도리를 여미고 준비해 온 빵과 우유를 먹었습니다. 보온병에 따뜻한 커피라도 받아 올걸, 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렸을까. 희부옇게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꽁꽁 언 발을 동동거리며 당신의 집 대문을 지켜보았습니다. 아, 드디어 당신이, 당신이 대문 앞을 나서고 있습니다! 트레이닝복에 가벼운 점퍼차림의 당신!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과 나, 단 둘뿐입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당신을 향해 다가섭니다.
당신은 상기된 표정으로 합격증을 내미는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저, 이제 대학생이에요."
당신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단 한 번 만나봤을 뿐인, 그것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로 스쳐 지나갔을 뿐인 어린 꼬마 여자아이를 당신이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뭐, 이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라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차분한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 때의 당신의 모습, 내가 조용조용 말을 이어갈 때마다 점점 커지던 두 눈, 어안이 벙벙해져서 반쯤 벌어진 그 입, 누구라도 볼까 전전긍긍 주변을 둘러보는 당혹감에 가득 찬 표정, 그 모두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나는 당황한 당신이 왠지 귀여워 보여 푹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제 웃음 소리에 당신이 조금 여유를 되찾았는지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습니다.
"도, 도대체 넌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냐?"
나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생각해보세요. 남자의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여자를, 그 아픔을 위로하고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싶어하는 여자를, 남자를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저미고 심장이 콩콩 뛰어버린다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남자가 그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다가 나는 매우 젊고, 제법 예쁘기까지 합니다. 당신의 따님이 은근 질투할 정도로 말입니다.
- 계속
왼 손에는 커피 오른 손에는 마우스.
키보드는 그냥 눈으로 즐기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