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이러다 사람 죽겠어!"

메나인은 황급히 하틴 소위에게 달려들어 그 손가락을 뜯어내려 했다. 하지만 목을 죔쇠처럼 조이는 손가락은 아무리 밀고 잡아당겨도 요지부동으로 움직이질 않았다. 불쌍한 소위는 눈을 까뒤집고 혀를 길게 내민 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였다.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군. 저러다 정말 죽이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그렇게 생각한 카디엔 중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스키더 소령님. 이제 그만 하시죠."

푸른 머리카락의 야수, 스키더 소령이라 불린 사나이는 카디엔 중위를 힐끔 쳐다봤다. 

"넌 또 뭐냐?"

무관심이 배인 냉혹한 시선,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카디엔 중위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품에서 얇은 금속제 명함을 꺼내 들었다. 원형을 이룬 열 개의 행성, 십성 동맹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 새겨진 명함이었다.

카디엔 중위는 명함의 한쪽 끝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자 십성 동맹의 문장 한가운데에서 여러 갈래 빛의 다발이 쏟아져 나와 카디엔 중위의 얼굴과 이름, 계급을 입체 영상으로 그려냈다.

"저는 십성 동맹군의 니일 카디엔 중위입니다." 그는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고,

 - 십성 동맹군 중앙 정보국 잉야르-에졸 지부 소속, 니일 카디엔 중위입니다 - 사념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무관심이 관심으로 돌변하며 공간에서 악의적인 사념이 거둬졌다. 그와 동시에 기진맥진한 소위의 몸뚱이가 실이 끊긴 인형처럼 무너져 내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구경꾼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와 함께, 실내를 팽팽하게 채운 긴장감이 날아갔다.

하틴 소위는 친구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통스런 얼굴로 목을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카디엔 중위는 소위 쪽으로 명함을 돌리고 반대편 끄트머리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렀다. 명함에 내장된 원거리 스캐너가 하틴 소위의 견장에 기록된 인식 번호를 읽어 들여, 그 신상 정보를 허공에 투사했다. 

"해군 제 29사단 소속, 아이징거 하틴 소위. 현재 3박 4일의 정기 휴가 중이라……" 카디엔 중위는 명함을 갈무리하며 하틴 소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됐지만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게. 그 편이 좋을 거야."

하틴 소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머리에 붙여 경례를 하며, 목 메인 소리로 더듬거렸다.

"카디엔 주, 중위님이라고 하셨습니까? 대체 저, 저 사람이 뭐, 뭐, 뭐길래, 가, 감싸는 겁니까?"

그러자 카디엔 중위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 자네는 저 사람이 누군지 몰랐던 모양이군. 하기야 알고 있었다면 괜히 시비를 걸지도 않았겠지."

"대체 저게 누구란 말입니까?" 하틴 소위가 재차 물었다.

"저 얼굴을 봐. 뭐 생각나는 거 없나? 해군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카디엔 중위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짓으로 스키더 소령의 얼굴을 가르켰다. 푸른 머리카락의 짐승, 상처 입은 야수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 얼굴을 멍청하게 쳐다보던 하틴 소위의 머릿속에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에 눈을 부릅뜨고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스카리인!"

외마디 소리가 전류처럼 질주하며 장내를 강타했다. 사람들은 공포심과 경외심에 뒤섞인 눈으로 스키더 소령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스카리인이라고?"

"그 반십자군(反十字軍)이란 말야?"

스카리인, 반십자군, 그것은 화려한 가명(假名)이었고 엄숙한 법명(法名)이었고 막강한 위명(偉名)이었다. 그리고 찬란한 악명(惡名)이기도 했다. 그 이름이 광채를 내면서 랏스 연합 해군 소령, 데스 스키더라는 본래의 소속과 직함과 이름은 어두운 그림자에 파묻혀 사라졌다.

"그래, 다들 나를 그렇게 부르더군." 스키더 소령의 말이었다.

그는 십자 연맹을 상대로 대담무쌍한 전투를 감행하는 해적이었다. 랏스 연합의 배신자들에게서 무자비하게 피값을 받아내는 살인자였다. 그러나 반역자의 목숨만을 요구하는 법률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가족과 친지들에게도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살육이란 이름의 씨앗을 뿌리고 두 손을 피로 물들여 파멸이란 이름의 과일을 수확하는 잔혹한 도살자, 그가 바로 스카리인이었다.

하틴 소위는 스카리인의 눈치를 살피며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스카리인, 아니, 스키더 소령님. 그,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맘대로 해."

스카리인은 짧게 말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술집 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새 잔을 받아, 독한 술을 가득 채우고, 그것을 차분히 음미하며, 한때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그 술을 함께 즐겼던 벗과의 추억을 되새기는데 몰두했다. 철부지 소위는 이미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하틴 소위와 선원 친구는 서둘러 술값을 치르고 꽁무니를 뺐다. 그들이 잃은 것은 보잘것없는 자존심, 얻은 것은 제아무리 비위에 거슬리는 상대일지라도 대화를 할 때는 인내와 겸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이었다.

술집 주인, 클라루즈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보면서 끌끌 혀를 찼다.

"데스, 잔도 깨먹고 멀쩡한 손님을 둘이나 쫓아 보내면 대체 난 뭘 먹고 살라는 거야?"

"그만큼 내가 마시면 되지." 스카리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카디엔 중위를 향해 손짓했다. "중위, 같이 술이나 한 잔 합시다."

- 이젠 숨어서 감시할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오 -

- 그도 그렇군요 -


카디엔 중위는 반 이상 남은 흑맥주를 단숨에 비우고 입가를 쓰윽 훔치면서 스카리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갈선주(褐仙酒)는 어떤가?"

"좋습니다." 카디엔 중위의 대답이었다.

갈선주를 마시는 잔은 넓은 원뿔을 뒤집은 듯한, 마치 팽이처럼 생긴 유리잔이다. 위쪽의 지름은 손가락 두 마디, 높이는 한 마디 반이다. 술을 깨끗이 비우고 뒤집어서 내려놓기 전에는, 술잔을 손에서 뗄 수가 없다.

스카리인은 투박한 유리병을 기울여 구릿빛 유혹을 따랐다. 술잔의 가장자리가 찰랑거리도록.

"그럼 건배하지. 양국의 우정을 위해." 스카리인은 잔을 들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카디엔 중위는 챙 소리가 나게 잔을 부딪히며 비꼬듯이 말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술을 비웠다. 화공약품을 방불케 하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침울함이 잿빛의 앙금이 되어 가라앉은 갈선주의 맛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흑맥주에 어울리는 소란스런 분위기가 가시고 어색한 침묵이 낮게 깔린 술집에는 불편하게 소곤대는 소리와 조심스레 홀짝이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여기 온 지는 얼마나 됐나? 1년, 아니면 2년?"

스카리인이 빈 잔에 술을 채우며 질문을 꺼내자, 카디엔 중위는 잠시 생각한 뒤에 이렇게 답했다.

"여기 시간으로 1년 하고 3개월이 넘었습니다."

"그런가?" 스카리인은 재차 잔을 비웠다. "나한테 감시를 붙이는 걸 보아하니, 뮬 소령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나 보군." 

카디엔 중위는 씁쓸하게 웃으며 반박했다.

"남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분이 자꾸 이런 식으로 말썽을 피우니 감시가 붙을 수밖에 없겠죠."

"쓸데없는 참견이었어. 설마하니 내가 우물안개구리를 상대하는데 전력을 쏟아 부을 줄 알았나? 적당히 혼만 내주고 끝낼 생각이었네. 그리고 현상금 사냥꾼 따위는 걱정하지 말라고. 내 몸은 내가 책임질 수 있으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따라야죠." 카디엔 중위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뷔라아민이 소령님 목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걸었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발 몸조심 하십시오."

스카리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코웃음 쳤다.

"아들놈의 가죽을 벗겨 보냈더니 오줌을 지리면서 도망친 겁쟁이 녀석 말인가? 녀석이 내 목에 얼마를 걸든 전혀 개의치 않네. 왜냐하면 내가 먼저 그 놈의 모가지를 따버릴 테니까 말이지."

단호하고 자신만만한 말투. 카디엔 중위는 그 자신감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지 못했다.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옛 사건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다면 예나 그룹의 부사장 키튼 뷔라아민의 가죽을 벗겨 뷔라아민 회장에게 보냈다는 건 사실이었나요?"

"틀림없는 사실이지."

그는 담담하고 당당하게, 죄의식이라곤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단언했다. 카디엔 중위는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참지 못하고 비아냥 섞인 질문을 던졌다.

"그런 짓을 하니까 즐겁던가요?"

"나름대로 즐겁긴 했어." 스카리인의 양 눈썹 사이에 가느다란 잔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더군. 숨이 떨어질 때까지 줄창 돼지처럼 꽥꽥 울어대는 바람에 시끄러워서 귀가 떨어질 뻔 했거든."

사람들의 어깨 위로 무시무시한 정적이 철퇴처럼 떨어졌다. 몽롱한 취기로 물든 평화로운 세계가 깨지고 부스러져 가루가 되었고, 끈적이는 피와 붉은 비명으로 점철된 고문과 살인의 세계가 날개를 펼쳤다.

"이제 그런 짓은 두 번 다시 안 하겠군요." 카디엔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글쎄, 그야 모를 일이지. 하지만 다음에 가죽을 벗길 기회가 있다면 먼저 혀부터 잘라낼 거야. 그러면 최소한도 시끄럽게 떠들진 못하겠지."

그는 광기로 얼룩진 눈을 빛내며, 웃었다.

카디엔 중위는 몸서리를 쳤다. 그는 술을 물처럼 들이키며 몸을 의자에 밀착시켰다. 아무리 듣기 싫은 이야기라고 해도 싫은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이것도 일종의 접대였으니까.

하지만 손님들은, 순수하게 술을 즐기러 온 사람들은,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억지로 자리에 앉아, 억지로 싫은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 사람이 일어서자 두 사람이 뒤를 따르고 나머지 사람들이 줄지어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술집 안에는 쓸쓸함이 퀴퀴한 냄새에 섞여 진동했다. 남아 있는 손님이라곤 인사불성이 되어 탁자에 엎어진 주정뱅이 네댓 명이 고작이었다. 클라루즈는 그 광경에 절망했는지 고개를 푹 떨구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고맙네그려. 데스, 자네 덕분에 오늘 장사는 완전히 공 쳤네."

"언젠가 무릎 위에 손자들을 앉혀놓고 들려주기 딱 좋은 얘깃거리 아닌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게나."

"내 친구가 사람 가죽을 벗긴 이야기를 자랑스레 늘어놓는 바람에 술집 손님들이 죄다 내뺐다는 이야기를 손자들에게 하라고? 제정신이야? 게다가 내 딸자식은 아직 열 여섯이야. 시집가려면 한참 남았어!"

갑자기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두들기며 낄낄대고 웃었다. 존경 받아 마땅한 서부 법회(西部法會) 성인(聖人)의 이름[주 1])을 악마에 버금가는 이름으로 타락시킨 장본인이 천진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카디엔은 엄청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어.'

친구와 농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스카리인, 철없는 청년을 반쯤 죽이려 드는 스카리인, 사람 가죽을 벗기며 기뻐하는 스카리인, 처음 보는 사람과 스스럼없이 술잔을 부딪히며 이야기를 나누는 스카리인, 차가운 바다에서 우주선을 약탈하며 환희에 젖는 스카리인, 어느 쪽이 진짜 스카리인일까, 그는 머리를 저으며 복잡한 고민을 포기했다. 그 대신, 후각을 마비시키고 머리를 새하얗게 달구는 술을 마시는 일에 전념하기로 작정했다.

다시 삐걱, 여닫이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두 사람이 나란히 들어왔다. 앞장선 것은 아까의 천사,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작달막한 중년 사내였다. 

사내는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를 무릎까지 내려오는 하얀 코트로 정중하게 감췄다. 하지만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거침없이 훌떡 벗겨진 머리는 무관심 속에 그대로 방치했다. 얼굴은 둥글넓적했고 햇볕과는 인연이 없는 창백한 피부는 밀랍처럼 반들거렸다. 그는 조그만 눈을 쉴새 없이 깜박이며 주먹만한 코 위에 얹혀진 두꺼운 안경에 비친 풍경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더니 천진난만한 어린애가 지을 법한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놈의 술집은 뭐가 이렇게 조용해?"

"방금 데스가 손님들을 다 쫓아 버렸어. 염병할 노릇이지." 

클라루즈의 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불평보다는 순수한 즐거움이 묻어났다.

"오랜만일세, 자비오프."

스카리인이 손을 들어 반겼다. 안경잡이 사내, 자비오프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데스, 정말 오랜만이야! 이게 대체 얼마만이지?"

친구와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며, 스카리인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표준시간으로 3개월, 아니, 4개월만인가?"

"여기 시간으로 다섯 달이 넘었다는 건 확실해." 

거기까지 말한 자비오프는 곁눈질로 카디엔 중위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런데 여기 이 분은?"

카디엔 중위는 옆으로 비켜 앉아 자리를 내 주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십성 동맹군의 니일 카디엔 중위입니다."

"아, 나는 안톤 자비오프, 예전엔 랏스 연합군의 군의관이었소. 지금은 이 근방에서 내과 의원을 하고 있소."

자비오프는 자기 소개를 마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다음에는 소녀의 차례였다. 그녀는 카디엔 중위에게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디엔 중위님. 세시나 레인이라고 합니다."

세시나 레인, 스카리인의 충실한 '노예'이자 단 하나뿐인 동반자. 신문과 방송과 잡지에서는 스카리인을 잔인 무도하고 무시무시한 마왕(魔王)으로, 그녀를 흉측하고 추악한 마녀(魔女)로 묘사했다. 하지만 그녀의 맑은 눈동자와 온화한 미소 앞에서, 카디엔 중위는 소문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매스컴의 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새삼 절감했다.

"아, 예. 처음 뵙겠습니다……." 

카디엔 중위는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를 반짝이며 눈앞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세시나는 마녀라기보다는 성난 사자를 달래는 조련사에 가까웠다. 그녀가 옆에 앉자, 스카리인의 눈에서 악의로 똘똘 뭉친 광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희미한 선의가 침착하게 떠올랐다. 

광기가 먼저일지 선의가 먼저일지 하는 문제에서, 카디엔 중위는 '인간은 본디 선한 존재'라고 설파하는 서부 법회의 신도답게 후자(後者)가 옳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살육 속에서 광기가 싹튼 것인지 아니면 광기가 살육을 초래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어쩌면 둘이 동시에 생겨났을지도 모르지.' 그는 그렇게 뇌까렸다.

노예 제도를 부정하는 문명권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종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추측해 보았다. 티 한 점 없이 맑고 순수하고 따스하지만 한 줄기 슬픔이 섞인 눈길로 자신의 주인을 지켜보는 세시나에게선, 그와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가 읽혀졌다. 반면에 스카리인은 냉엄한 몸짓으로 일관하며 그녀와의 사이에 선을 그으려 애썼다.

'한쪽은 가까이 있기 위해서, 한쪽은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라? 이해하기 어렵군.' 카디엔 중위는 무심결에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남녀관계는 언제나 알 수 없는 법이지'

그가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는 사이, 스카리인은 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그럼 이틀 뒤, 오후 3시에 오게나. 예약을 전부 취소하고 기다리고 있겠네." 

자비오프는 온몸을 들썩이며 딸꾹질을 했다. 스카리인은 텅 빈 술잔을 엎으며 짧게 답했다.

"그래, 이틀 뒤." 

"그나저나 데스, 뮬 소령과 만나보는 게 어때?" 클라루즈가 빈 병을 치우며 조언했다.

"뮬 소령을?"

"자네한테 이렇게 미행까지 붙인 걸 보아하니 뭔가 좋지 않은 낌새가 포착된 모양이야. 게다가 아까 말한 '유령선'에 관해서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 겸사 겸사해서 한 번 만나보는 편이 좋지 않겠나?"

클라루즈의 설명에 스카리인은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주억였다.

"그렇군. 자네 말이 맞아." 그는 카디엔 중위를 쳐다보며 물었다. "중위, 지금 당장 뮬 소령을 만나고 싶군. 물론 안내해 주겠지?"

요청이라기보단 명령에 가까웠지만 카디엔 중위는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지옥보다 참혹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장교가 경험으로 습득한 마술 같은 지도력에 압도된 것일까? 그렇진 않다, 그저 늑대처럼 고독하게 투쟁하는 사나이의 힘찬 목소리에 매료되었을 뿐이겠지……. 카디엔 중위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아 있는 술을 마저 비우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전화기를 찾았다.

"예, 하지만 먼저 뮬 소령님한테 허락을 받아야겠군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 계속 -

[주 1] (여기서 언급한 서부 법회의 성인은 제이얀 스카리인이다. 그는 서부 법회의 '전설시대'에 속하는 제 2차 성경전쟁(聖經戰爭) 당시, 반십자군 측의 지휘관으로 수많은 전공을 세우며 서부 법회를 존속시켰다. 먼 훗날 그가 성인으로 추증(追贈)된 뒤에 '스카리인'은 반십자군을 의미하는 일반명사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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