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방랑자


바다에서 들리는 것은 무거운 침묵뿐이다.

바다에서 보이는 것은 아득한 별빛뿐이다.

발 아래부터 시작해서 머리 위까지, 눈 앞에서 등 뒤까지 사방에 펼쳐진 전방위(全方位) 스크린에는 침중한 어둠이 깔렸고 솜덩이처럼 뭉글뭉글한 가스가 흐르는 너머로 수억을 헤아리는 별들의 광채가 아른거린다. 멀리 혹은 가까이에선 울퉁불퉁한 얼굴의 소행성들이 서로 박자가 맞지 않는 춤을 추며 흘러간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흘러가는 거지.' 스카리인의 생각이었다.

그는 랏스 연합의 새까만 해군복을 입고 있었다. 목 깃은 자유롭게 풀어헤치고 손가락 구멍이 뚫린 갈색 가죽 장갑을 끼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시커먼 장화를 신고, 수백 년의 세월을 머금은 왕좌처럼 엄숙한 조종석에 앉았다.

'불확실한 흐름에 몸을 내맡기고 기다리는 건, 언제나 지루한 일이야.'

깜박, 눈꺼풀이 깜박인다. 정면에 놓인 계기판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가로지른다.

'하지만 바다를 떠도는 사람은 인내를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고…… 분명히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었지. 그게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쓰게 웃었다.

조종석의 넓은 팔걸이에는 두 개의 보조 스크린과 커다란 트랙 볼이 딸린 조작 패널과 키보드가 나란히 붙었다. 왼쪽엔 항해 일정과 화물 내역이 평면적으로 보여졌고 오른쪽엔 에카무드의 내부 상태와 무장 상황이 입체적으로 표시되었다. 얇은 가죽 쿠션이 붙은 등받이 뒤엔 전기 의자의 머리덮개와 흡사한 검은색의 헤드기어가 얌전하게 접힌 채 굵고 얇은 케이블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양쪽에 두 개씩 붙은 발판 사이로 은회색의 조종간이 길게 솟아났다.

강철과 납의 조종석, 그는 허리와 어깨를 두터운 쿠션이 붙은 안전 장치로 고정하고 두 발을 발판에 찰싹 붙이고 눈으로 계기판에 다닥다닥 붙은 보조 스크린에 떠오른 숫자와 그래프에 주의를 기울이고 양손으로는 계기판 곳곳에 붙어 있는 버튼과 키보드를 누르고 귀로는 스피커가 뱉어내는 경고음을 들었다.

'어쨌든 이곳도 정말 오랜만에 와 보는군.'

그는, 눈을 들어 스크린을, 스크린 너머를, 알시트 해역을 바라본다.

알시트 해역은 반지름 50해리(海里:약 600만 킬로미터)의 둥글넓적한 원반이었다. 원초적인 어둠, 그 광막한 캔버스 위로 수소와 헬륨 원자와 티끌만한 먼지가 엉성하게 뭉친 희끄무레한 가스층이 강물처럼 흐르고 자잘한 소행성이 유유자적 떠다녔다. 그리고 곳곳에 십자 연맹(十字聯盟)과 십성 동맹(十星同盟)을 연결하는 27개의 순동구(瞬動口)가 흩어져 있었다.

이곳은 예전부터 약삭빠른 무역선과 사치스런 호화 여객선이 활발히 오가는 항로였고, 수많은 해적들이 약탈감을 찾아 파리떼처럼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랏스 연합 시절에는 거대한 이동 요새, 알시트 14를 배치시켰다. 국경을 지키고 사나운 무법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하지만 이젠 다 지난날의 이야기, 과거일 뿐이지.'

전쟁, 패배, 그리고 극적인 몰락이 찾아왔다. 알시트 14는 사라졌다. 활기차게 오가던 무역선도, 빈틈을 노리던 해적선도, 언제나 긴장하고 있던 전함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가끔 가다 가난한 상선(商船)과 싸구려 여객선이 오락가락 하는 게 고작이었다.

"반경 20해리 안의 순동구 분석이 끝났습니다. 상대방위 0-3, 거리는 약 18.1해리 떨어진 곳에 알시트 6번 순동구가 위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위치 변동 오차는 8%, 출구는 아데르 해역의 잉야르 13번입니다."

세시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퍼진다.

보통의 중전함이라면 운동장처럼 널찍한 함교(艦橋)에 적게는 10명, 많게는 30명이 근무한다. 하지만 에카무드의 전투 함교는 대단히 비좁았다. 바닥은 길쭉한 직사각형, 천장은 반구형, 위아래로 2층 구조, 앞쪽 1층은 조타수와 항해사가 앉는 자리고 뒤의 2층은 관제사와 함장의 자리다.

그리고 항해사는 스카리인, 관제사는 세시나였다.

관제석의 구조는 조종석과 흡사했다. 다만 얕은 머리받이에 귀가리개처럼 생긴 헤드기어가 달려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의자는 기계처럼 딱딱한 직선을 그렸고, 소녀는 몸에 밀착되는 순결한 흰색 겉옷을 입었다. 그것은 명백한 부조화.

'벌써 9년째군.'

키보드로 손을 옮기던 스카리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9년 전 뒤라인의 노예시장, 철창 속에서 비에 젖은 고양이처럼 오들오들 떨던 가녀린 어린 소녀였다. 그는 힐끗 눈을 돌렸다. 보이는 것은 이제 아름다운 장미처럼 자라난 - 하지만 날카로운 가시를 감춘 치명적인 무기, 그리고 충실한 노예.

"항로 수정." 스카리인은 키를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1시간 30분 가량 걸리겠군."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두 달간의 원정(遠征), 여섯 번의 전투, 그 대가로 에카무드는 상당히 깊은 상처를 입었다. 외부 장갑(裝甲)은 20퍼센트 이상 마모되었다. 주포 한 문과, 보조포 세 문이 파괴됐다. 어뢰의 재고는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주 엔진은 모두 무사했지만, 보조 엔진은 전체적으로 출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에카무드를 상대한 적들은 훨씬 더 비참한 꼴을 당했다.

오뤽 11척과 발스레인 23척이 격침되거나 반파됐다. 백여 명의 인간이 원자 단위로 분해되고, 삼백여 명이 우주를 떠돌며 구조대를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파괴와 죽음, 그 뒤에는 언제나 약탈이 있었다. 스카리인은 수십 척이 넘는 십자 연맹군의 전략 물자 수송선을 나포해 이 잡듯이 털어냈다. 하지만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노획품은 강괴(鋼塊)나 우라늄 원석 같은 싸구려뿐, 값나가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스카리인들은 그것들을 아사 족(族) 유랑상인 벨머트에게 70만 지타라는 헐값에 넘겼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뱃머리를 돌려 잉야르로 향했다. 상처를 치유하고 이빨과 발톱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그러나 스카리인은 결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승냥이보다 교활하고 독사처럼 집요한 인간이 자신을 노리고 어딘가에 함정을 파 뒀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렉클, 녀석은 쉬운 상대가 아냐. 비겁하지만 무섭도록 똑똑하니까.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전엔 결코 먼저 움직이지 않겠지.'

드레이트 렉클, 그의 비열한 웃음을 떠올리며, 그의 간사한 얼굴을 떠올리며, 스카리인은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편으로 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어. 그래, 여기 있을 때부터……'

스크린에 지나가는 숫자를 보며 스카리인은 문득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천여 척의 전함을 품에 아우르는 이동 요새 '알시트 14'가 있던 좌표…..

자신의 청춘이 살을 태우는 불길 속에서 무참하게 종결된 무덤이자, 이 배가 태어난 요람, 하지만 지금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공허, 공허, 공허함뿐! 어두컴컴한 바다는 단조로운 침묵을 노래했다.

'그는 이곳에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여 한 줌의 재로 화했고……'

친구를 그리워하는 눈빛은 허공을 맴돌고,

'그녀는 그 죽음이 주는 충격에서 도망치고자 삶을 저버리고 방황하는 영혼이 되었으니……'

야속한 여인을 원망하는 마음은 한숨이 되어,

'나는 대체 언제쯤에나 그녀에게 그 친구의 마지막 흔적을 전해줄 수 있을까?'

기약 없는 앞길은 검푸른 절망의 늪이 되어 사방을 에워쌌다……

15년, 15년 전이었다. 그는 친구의 몸뚱이가 화장터의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장면을 목도하며, 증오와 분노로 얼룩진 맹세를 피를 토하듯이 쏟아내며, 잿더미나마 - 한 줌의 잿더미나마 그녀에게 전해 주겠노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15년 전에!

매일같이 피바다를 헤매며 온몸에 피갑칠을 하고 미약한 자취를 쫓아 먼 바다를 떠돌았지만 맹세를 이루고 약속을 지킬 날은 요원하기만 했다. 한 해, 한 해가 거듭될수록 초조해졌다. 좌절을 곱씹었다. 그리고 그리움이 더해졌다. 허망하게 상실한 청춘에 대한 그리움이.

이곳에서 유령선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헛된 기대를 품기도 했다. 하지만 십성 동맹 정보국은, 그것을 상상력 풍부한 선원들의 창작으로 폄하했다. 랏스 연합 정보부의 친구들은, 그것이 십자 연맹의 신형 전함일 것으로 추정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어느 쪽이건 실망스런 이야기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이곳에 돌아올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지. 그를 잃어버린 장소로, 그와 영원히 이별한 장소로 새삼스레 되돌아올 리가 없잖아.'

불안한 어둠 속에서 위태롭게 비실거리는 정적과 강가에 피어 오르는 아침 안개만큼이나 몽롱한 회상은 갑자기 튀어나온 세시나의 새된 목소리에 망치로 두들겨 맞은 유리판처럼 산산이 깨어지고 부스러져 흐트러졌다.

"질량 반응과 중력장 확인, 적함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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