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지 않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법이지, 스카리인은 속으로 그렇게 뇌까리며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적함의 종류는?"

"오뤽-라팔레스 함(艦) 3척, 종류가 확인되지 않은 발스레인 7척입니다. 상대방위 7-6, 거리 2.7해리, 알시트 19번 순동구에서 출현했습니다."

그는 레이더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계기판 위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농구공만한 크기의 다층(多層) 스크린, 여러 층에 걸쳐 밝은 청록색의 격자선이 촘촘히 그어졌고 한가운데엔 하얀 점이 찍혔다. 그리고 화면의 끄트머리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삼각형의 불빛이 보였다. 앞장선 세 개의 붉은 삼각형이 쐐기라면 뒤따르는 일곱 개의 조그만 오렌지색 삼각형은 넓게 펼쳐진 날개, 각각의 삼각형 옆에는 그 속도와 질량, 예상 함종(艦種)이 적힌 조그만 꼬리표가 달려 있다. 그들의 목표는 중앙에서 빛나는 하얀 점, 에카무드였다.

십자 연맹은 오래 전에 여기서 이동 요새를 철수시키고 인근 소행성에 소규모의 수비 기지만 남겨뒀다. 그곳의 주력은 낡아빠진 오뤽-샤오드 함 아니면 오뤽-크라오네스 함이었다. 중장갑(重裝甲)을 자랑하는 최신예 라팔레스 함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손끝으로 파충류의 비늘을 만질 때 느껴지는 불유쾌한 감각이 스카리인의 등줄기를 내달렸다.

'아직 놈들의 레이더 범위가 미치지 못하는 지금, 소행성 지대로 진입해서 몸을 숨기면 어떨까? 아니,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군. 자칫 잘못하면 완전히 포위당할 수도 있어. 차라리 최고 속도로 놈들을 따돌리는 편이 좋겠군.'

그는 머리를 돌려 세시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십성 동맹으로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순동구는 어디지? 출구는 어디든 상관 없다."

그녀는 스크린을 확인하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현재 열려 있는 것 중에서는 알시트 8번이 가장 가깝습니다. 상대방위 3-11, 거리 약 3.77해리, 변동 오차는 0.5%, 출구는 아데르 해역의 데인바르 3번입니다."

"좋아, 항로를 수정해야겠군." 그는 또다시 키보드를 두들겨 댔다. "최고 속도로 놈들을 따돌리고 알시트 8번으로 진입한다."

"속도 변경, 항로 수정, 알시트 8번까지의 예상 소요 시간은 27분에서 31분입니다."

주변 풍경이 멀어지는 속도가 두 배 가까이 빨라지면서 득달 맞게 달라붙던 삼각형의 속도가 그만큼 느려졌다. 하지만 세시나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떨어트릴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순동구로 뛰어들기만 하면 녀석들은 쫓아올 수 없어. 제아무리 연맹 해군이라도 함부로 국경선을 넘을 수야 없을 테니까." 스카리인은 장담했다.

하지만 그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순동구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놈들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전방에 적함 출현!" 세시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오뤽-라팔레스 함 5척, 발스레인-에피데우스 함 9척입니다."

반투명한 푸른빛의 레이더 화면이 앞뒤로 붉고 누런 삼각형에 에워싸인 모습을 보면서, 스카리인은 사냥개에 쫓겨 막다른 굴로 쫓겨 들어간 여우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포자기해서 혀를 길게 빼물고 쓰러지기엔 너무 이르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당황할 것 없다. 우린 아직 놈들의 레이더 범위 밖에 있어. 탐지 범위 밖으로 조용히 우회하면 녀석들과 얼굴을 마주칠 일은 없겠지." 그는 빠른 박자로 손가락을 놀려 패널의 버튼을 누르면서 말을 이었다. "적함의 레이더 탐지를 피해 진로를 변경, 만일을 대비해 화기 관제 등급을 3-2로 변경한다."

"화기 관제 등급을 3-2, 원거리 어뢰전(魚雷戰)에 대비한 반자동 대응 방식으로 변경합니다."

스카리인은 자신이 입력한 숫자와 문자가 3차원의 경로로 재해석되어, 레이더 옆의 반구형 스크린에 떠오른 해도(海圖) 위에 하얀색의 실선으로 겹쳐지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진로 변경 완료. 속도는 그대로 유지한다."

유유히 옆구리를 지나 뒤로 흐르던 소행성이 갑자기 빙글 반 바퀴를 돌면서 멀어져 갔다. 배가 머리를 들어 방향을 바꿨다는 신호와 함께 레이더 화면의 중심부를 향해 기세 좋게 달려들던 삼각형들이 와수수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1분, 2분, 시간이 흐르면서 적함과의 거리가 벌어졌다. 세시나는 한숨 돌린 얼굴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피아노를 치듯이 리드미컬하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 가닥의 악의적인 시선이 선체(船體)의 두꺼운 장갑을 꿰뚫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손톱이 옷을 찢어발기고, 끈적거리는 혓바닥이 피부를 핥고, 음탕한 손가락이 자궁까지 파고드는 느낌,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느낌, 그 느낌에 전율하며, 소녀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적들이 눈치챘습니다, 주인님!"

"나도 알아." 스카리인의 미간과 눈 밑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군용 레이더의 2배 가까이 되는 공간을 이렇게 빨리 읽어낼 정도라면 보통의 사념 능력자는 아니군. 일급 중에서도 초일급의 실력이야.'

이미 위치가 발각된 이상, 일부러 길게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적함이 예상 진로를 파악하고 미리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곧장 치고 나가느니만 못했다.

"진로 재변경. 알시트 8번까지 일직선으로 뚫고 나간다. 세시나, 화기 관제 등급을 2-3으로 바꿔라."

"화기 관제 등급 2-3, 돌격전(突擊戰)에 대비한 자동 대응 방식으로 변경합니다."

울긋불긋한 빛깔의 가스로 뒤덮인 침침한 어둠이 관자놀이 옆에서 매끄럽게 한 바퀴 반을 돌았다. 궁지에 몰렸지만 자긍심을 잃지 않은 야수는 당당하고 도도하게 뱃머리를 내밀며 앞으로 치달았다.

"강행 돌파는 오랜만이군요."

세시나는 양쪽에서 잡아당긴 가죽 벨트처럼 팽팽하게 긴장했지만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오뤽 8척에 발스레인 16척, 적지 않은 숫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전함에 포위당한 적도 있었다. 사방에서 어뢰와 광선포와 입자포가 쏟아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정면을 뚫고 나가 탈출한 경험이 있었다.

'이 정도면 포위망치곤 허술한 편이지.'

스카리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른손으로 조종간을 잡고 왼손으로 팔걸이의 조작 패널을 더듬어 사각형의 붉은 버튼을 눌렀다. 두꺼운 강철 걸쇠가 풀리고 모터가 회전하면서 의자가 등받이가 흔들렸다. 그리고 헤드기어가 천천히 내려와 머리에 씌워졌다.

그것은 순수한 강철 모자였다. 정수리 부위는 둥그스름하고, 귀를 덮는 돌출부에선 두꺼운 케이블 가닥이 튀어나와 등받이 뒤로 이어졌다. 뺨은 차가운 철판으로 가렸고, 눈가엔 가느다란 선처럼 보이는 검푸른 빛의 방풍 실드가 붙어 있었다. 스카리인이 왼쪽 귓가의 다이얼을 돌리자 금속 케이블이 연결된 산소 마스크가 튀어나와 입과 코를 덮었다. 철컥, 철컥, 쇳소리를 내뱉으며 잠금 장치가 걸리면서 헤드기어는 완전히 밀폐되었다.

그리고 신선한 산소가 들어오는 것과 함께 점액처럼 끈적이는 녹색의 세포체가 스멀거리며 귓구멍에 스며들었다. 10여 년의 세월로도 지워지지 않는 본능적인 저항감에 손끝이 저절로 꿈틀대는 것을 느끼며 스카리인은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을 띄웠다.

'마음으로는 납득해도 몸이 익숙해지지 않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는 걸까……'

녹색 세포체는 귓구멍 안쪽에 숨겨진 생체 컴퓨터의 단말(端末)에 접속한다. 그리고, 오래 전에 중추신경계에 이식한 세포체가 에카무드의 세포체에 직결되면서, 정신은 육체라는 감옥의 한계를 탈출해 풍선처럼 팽창한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선체와 하나가 되었다.

외부 장갑에 배열된 십 수만 개의 카메라와 센서로 수평선이 존재하지 않는 짙푸른 바다를 동시에 여러 방향에서 직시하며 그 차가움을 온몸으로 느꼈다. 무한한 허공엔 10분의 1 해리 간격으로 희뿌연 격자선이 좌우로 끝없이 늘어서고 위아래로 기둥처럼 들어서서 수없이 많은 입방체를 그렸다. 의식의 한쪽에 공 모양의 레이더 화면이 입체적으로 떠올랐고 다른 쪽에는 십 수 개의 보조 스크린이 반투명하게 겹쳐졌다.

사념은 그보다도 훨씬 넓은 범위를 장악했다. 자신을 향해 접근해 오는 중전함과 경전함의 모습이 유령처럼 흐릿하게 잡혔다. 희미하지만 확실한 위협, 조종간을 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가고 뱃머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서둘지 말자. 아직 서둘 필요는 없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삭이며 흥분을 가라앉힌다.

수천억 년의 고요함과 쓸쓸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진 영혼은 고독했다. 인간이란 존재의 왜소함을 새삼스레 느꼈고 적막함이란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헤드기어 내부의 스피커가 수억 년의 정적을 깨치고 단조로운 소녀의 목소리를 전달해 주었다.

"적함의 레이더 범위 안에 돌입합니다."

"곧 뭔가 날아오겠군."

산소 마스크 바깥쪽에 붙은 스피커를 통해 나온 기계적인 소리에, 세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아마도……" 잠시간의 평탄한 침묵, 그리고 위험에 대한 높은 경고. “적 함대 어뢰 발사! 전방에서 30발, 후방에서 18발의 중어뢰(重魚雷)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서른 개, 뒤에서 스무 개 가까운 주홍 색의 날카로운 화살이 쏟아지는 광경이 레이더에 비쳤다. 스카리인은 화살 옆에서 어른거리는 문자와 숫자를 읽어 내렸다.

"이카넥 78식 어뢰군. 화기 관제 등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자동 대응에 맡긴다."

"자동 대응 개시, 요격 어뢰 장전, 발사합니다. 예상 요격 시각은 5분 78초 뒤입니다."

뱃머리와 꽁무니의 어뢰 발사구에 요격 어뢰가 차곡차곡 실리는 느낌은 마치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발사구를 감싸는 코일에 전류가 흘러 방대한 자기장이 형성되고, 그로써 막대한 추진력이 일어나, 뚜껑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어뢰가 총알처럼 튀어나가면서 마치 정액을 배설하는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확대된 시야로는 앞으로 예순 개, 뒤로 마흔 개가 넘는 가늘고 뾰족한 어뢰가 직선을 그리며 공간을 분할하듯이 날아가는 게 보였다. 잠시 후에는 시간이 초 단위에서 분 단위로 착실하게 누적되어 예정된 충돌의 순간에 무사히 당도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5, 4, 3, 2, 1 …… 요격에 들어갑니다."

세시나의 구령에 맞춰 요격 어뢰의 몸통이 분해되고 앞 뚜껑이 열리면서 어뢰 하나당 120기의 요격탄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목표물에 사납게 달려들면서 어둠 속에 광대한 그물이 펼쳐졌다.

요격탄의 강고한 아이크만 탄두(彈頭)가 중어뢰의 일루미니언 탄심(彈心)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우그러졌다. 뒤이어 탄체(彈體)에 실린 핵폭탄이 터지면서 적 어뢰가 추진제로 사용하는 플라스마와 반응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다문다문 눈부신 별빛이 깔린 끝없는 암흑에 촛불처럼 초라한 빛이 깜박이고 좁쌀만한 파편이 비산(飛散)하며 레이더에서 화살표가 차례로 자취를 감췄다.

"요격 어뢰 전탄 소멸, 적의 중어뢰도 전부 소멸했습니다."

스카리인은 레이더를 보면서 전방의 적 함대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했다.

"4분 내로 놈들과 코를 부딪히겠군. 세시나, 접근 2분 전에 알려 줘라."

"알겠습니다."

그는 의식을 다시 배와 합치시켜 컴퓨터에게 직접 명령했다.

 - 레이더 10배 확대 -

시야를 가로세로로 분할한 격자선의 단위가 단숨에 100분의 1해리로 변하면서 레이더 화면이 크게 확대됐다. 손톱만한 크기의 붉은 화살표가 주먹만한 크기로 커지며 투박하게나마 전함의 모양새를 갖췄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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