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력자

 

뮬 소령은 부엌 탁자에 병 맥주를 내려놓고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숨을 허덕이는 질리언 상사와 횡설수설 떠들어 대는 통제실 요원을 보면서, 평화로운 오후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들을 따라 지하 심문실로 내려가 보니 부하 하나는 기절해 있었고 또 하나는 자신이 게워낸 역겨운 토사물 위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의자 위에 겁먹은 고슴도치처럼 쪼그리고 앉은 포로는 오들오들 떨며 두려움을 뚝뚝 발등에 눈물로 떨궜다. 그리고 맥 빠진 목소리로 소중한 정보를 술술 불어댔다.

그녀는 자기 소개부터 시작했다. 이름은 나가 울바흐터, 계급은 소위, 소속 부대는 1662사단, 청소부 복장으로 떨어져 산산 조각난 사람은 직속상관인 아인작스 기든 중위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들의 목적은 당연히 스카리인의 암살, 호텔 보안 장치를 손본 것은 에졸에 있는 십자 연맹의 정보 조직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스카리인이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번 작전을 계획한 사람은 누구지?"

"저와 기든 중위를 지상군에서 차출해 이번 작전에 투입한 사람은 해군의 레……렉, 렉클 중령이었어요. 제 생각에는 그 사람이 이번 작전을 계획하고 추진한 것 같아요."

그녀가 더듬어댄 이름에 스카리인은 눈을 번득였지만 깊이 추궁하진 않았다.

즐겁게 지저귀는 노래 소리는 계속되었다. 연맹군 중앙 정보부에선 에졸에 20여명의 정보원을 파견했으며 그 근거지는 궤도 엘리베이터에 있다는 사실, 주요 인물들의 이름과 위장 신분, 기타 등등, 뮬 소령은 황홀한 눈빛으로 노래에 열중했다.

그녀가 입을 다물 즈음에는 십자 연맹의 정보 조직을 일망타진하기에 충분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뮬 소령은 내심 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겉으론 위엄 있는 무표정한 낯빛과 딱딱한 태도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는 부엌 냉장고를 열고 흑맥주 한 병을 스카리인에게 내밀며 인사치레를 하는 것을 잊을 정도로 무례한 사람은 아니었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스키더 소령."

맥주병을 받아 들며 스카리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하지만 당신 부하들을 필요 이상으로 괴롭힌 것 같아서 미안하군요."

그러자 뮬 소령은 영 마뜩찮다는 듯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녀석들한텐 좋은 경험이 됐겠죠.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비명 소리를 들은 정도로는 그렇게 겁에 질릴 리가 없을 텐데요."

"그건 '역류'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으로 폭발하는 그녀의 감정이 제 사념을 따라 밀집된 공간에 퍼져나가면서 다른 사람한테 들러붙은 거죠."

뮬 소령은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퍼뜩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만요, 심문실이 좁긴 해도 그 공간에 사념을 확장시키려면 적어도 3급 이상의 힘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내내 감쇄장치가 작동했을 텐데 어떻게 그런 힘이……?"

스카리인은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키고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았다.

"제 실수입니다. 예상보다 사념의 감소폭이 훨씬 적더군요. 그래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 라고 생각하고 힘을 썼는데, 실제로는 너무 지나쳤던 겁니다."

감쇄장치 안에서 그만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섣부른 불신은 금물이었다. 뮬 소령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리며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스키더 소령,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 포로의 공포심이 역류했다면 사념을 쓴 당사자인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헌데 당신은 멀쩡하고 애꿎은 제 부하들만 겁에 질려 버둥댄 이유가 뭡니까?"

스카리인은 빈 맥주병을 탁자에 내려놓고 쏟아지는 햇빛을 등지고 창문턱에 기대어 앉아 그의 추궁을 차갑게 받아넘겼다.

"나는 공포에 휘둘릴 정도로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맹세를 이행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맹세이길래 그렇게까지 집착하시는 겁니까?"

뮬 소령의 물음에 스카리인은 답을 피했다.

"제 개인적인 비밀까지 밝힐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그의 녹색 눈동자를 새빨갛게 달구는 불꽃을 보면서 뮬 소령은 그 맹세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살육의 맹세겠지!'

 

*

뮬 소령은 스카리인과 함께 카디엔 중위의 차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때마침 점심 시간이 되었기에, 그는 자신이 아는 최고의 스테이크 가게로 스카리인을 데리고 들어갔다. 아침나절부터 구역질을 해댄 탓에 완전히 식욕을 잃어버린 카디엔 중위는 운전석을 지켰다.

한입 물면 향기롭고 촉촉한 육즙이 배어 나오는 최고의 물소 등심 스테이크의 맛에 스카리인은 솔직한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둘은 부지런히 고기를 잘라 먹고 사념과 말을 섞어가며 환담을 나눴다. 뮬 소령은 본부에서 '유령선'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고 스카리인은 너그럽게 이해했다.

- 그런데 '포로'와 십자 연맹의 정보 조직은 어쩌실 겁니까? - 스카리인의 물음이었다.

- 좀 더 조사를 진행한 다음에 '본사'의 지시를 따라야겠죠. 아마 포로는 당분간 이쪽에서 보호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본사'로 이송할 테고, 정보 조직은 섣불리 분쇄시키기보다는 거꾸로 이용해 먹는 쪽을 선택하겠죠. - 뮬 소령은 사념으로 자신의 예측을 늘어놓고,

"그런데 오후엔 뭔가 특별한 예정이라도 있으신지요?" 입으론 질문을 던졌다.

"예, 3시에 제 친구네 병원에 들르기로 했습니다."

"어디 아프신 데라도 있는 건가요?"

"제가 환자로 보입니까?"

뮬 소령은 고기를 우물대며 스카리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혈색도 좋고 눈빛도 형형하고 태도는 자신만만했다.

"이런, 당신이 환자라면 전 지금 당장 죽어야 하는 중환자겠군요.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면, 건강 진단입니까?"

"예, 그렇죠."

- 친구분 병원보다는 우리 군 병원의 의료진과 설비가 훨씬 훌륭할 겁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게 편의를 봐 드리죠 -

- 아닙니다. 단순한 건강 진단에 동맹군의 힘을 빌리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죠. 뜻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


뮬 소령은 스카리인이 자신의 제의를 거절한 참뜻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선약을 지켜 친구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것이리라 여겼다.

"친구분 병원은 어디 있습니까?"

"북구 4가에 있습니다."

- 4가라, 좀 멀군요. 카디엔 중위를 시켜서 모셔다 드려야겠군요 -

"깊은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부사장님." 스카리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뭘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도와 드려야죠."

식사를 마친 후에 뮬 소령은 스카리인을 조수석에 태우며 카디엔 중위에게 눈짓을 보냈다.

 - 이 친구를 잘 바래다 주게. 어쨌건 이번에 헤어지고 나면 당분간은 다시 볼 일이 없을 거야. 그리고 가는 길에 차멀미 조심하게. 또 토하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

마지막에 붙은 모욕적인 농담을 힘겹게 꿀꺽 소리 내어 삼키면서 카디엔 중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고자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답했다.

 - 알겠습니다 -

자존심에 상처 입은 부하를 배려하지 않는 매몰찬 상관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카디엔 중위는 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지난 800년간 무분별한 개발과 확장이 되풀이된 끝에 북구의 교통망은 얽히고 설킨 실타래 꼴이 되었다. 철도와 차도는 불규칙하게 이어지고 무계획적으로 연결되어 동서남북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웠고 여기서 10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조차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스카리인이 부른 주소를 찾아 붉은 스포츠 카는 넓은 차도를 정열적으로 치닫고 좁은 커브 길을 아슬아슬하게 돌며 어그러진 거미줄처럼 복잡한 도로망을 빠른 속도로 가로질렀다. 하지만 2가와 3가에서 지독한 정체를 만나 거북이 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바람에 무려 50여분이 지난 뒤에나 목적지인 4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4가는 외부와 물품을 거래하는 무역회사, 그들의 짐을 항구까지 실어 나르는 화물업체, 현금을 신용으로 혹은 그 역으로 환산해 주는 은행과 대부업체가 공존하는 거리였다. 시원시원한 도로를 끼고 위로 높직한 빌딩과 옆으로 넓은 창고 건물이 병존했다.

차는 복잡한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한 블록을 올라가 30층짜리 은행 건물의 옆에 난 좁은 골목길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구불텅한 골목길 좌우로는 일용품을 파는 잡화점이나 팜플렛을 찍는 인쇄업체, 그리고 직장인을 상대하는 병원 건물이 늘어섰다.

"여기군요."

카디엔 중위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스포츠 카가 속도를 줄이며 길가에 내려앉았다. 스카리인은 문을 열고 내리며 작별을 고했다.

"고마웠네, 중위. 다음에 또 보세."

"예, 그때까지 몸조심 하십쇼, 스키더 소령님." 카디엔은 반쯤은 비아냥대듯이 말했다.

스포츠 카는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며 공중에 떠올라 몸을 비틀어 되돌아갔다. 상처 입은 얼굴은 황톳빛 보도 블록을 지나, 한 사람의 인생만큼이나 오래된 기색이 역력한 낡고 조그만 4층짜리 다갈색 벽돌 건물로 들어갔다. 무거운 구둣발은 고소득을 보장해 준다는 포스터를 투명한 유리문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금융 업체를 못 본체 하고 구석의 좁은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건조한 소리를 울리며 2층을 지나 3층의 '자비오프 내과'에서 우뚝 멈춰 섰다. 불투명하고 묵직한 유리문은 닫혀 있었다. 손잡이 자리에는 동그란 구멍이 무수히 뚫린 금빛 금속판이 붙어 있었는데 스카리인은 그 판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안톤, 나야."

철컥, 역사처럼 오래된 잠금 장치가 풀리면서 문이 스르릉 미끄러졌다. 그는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결벽증에 걸린 사람이 집요하게 닦은 부엌 바닥처럼 하얗고 깨끗했다. 접수대엔 아무도 없었고 대기실의 길쭉한 가죽 소파에는 살짝 먼지가 내려앉았고 벽에 걸린 괘종시계는 오후 2시 40분 근처에서 오락가락했다. 정면에 있는 '원장실'이란 플라스틱 명패가 붙은 작은 유리문이 왼쪽으로 미끄러지면서 자비오프가 얼굴을 드러냈다. 코에 걸친 돗수 높은 안경과 무릎까지 내려오는 하얀 가운은 의사로서의 권위를 보장해 주는 소도구였다.

"벌써 온 건가? 약속은 3시로 잡았을 텐데."

"늦는 것보다야 이른 게 훨씬 낫지."

"그건 그렇네." 자비오프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기야 자넨 발에 그림자가 붙어 있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쁜 사람이니 약속 시간에 조금 이르거나 늦을 수도 있겠지. 어쩌겠나, 한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내가 이해해 줘야지."

"이해해 줘서 고맙네." 스카리인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럼 '점검'을 부탁하네."

"그래." 자비오프의 얼굴에 조금 침울한 그림자가 내려 앉았다.

자비오프가 몸을 반 바퀴 돌려 왼편에 있는 '진찰실'이란 명패가 붙은 널찍한 유리문 앞으로 다가가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진찰실은 넓지만, 답답한 공간이었다. 정면의 넓고 불투명한 유리창에선 부드러운 햇빛이 드리워져 바닥에 깔린 네모난 도기(陶器) 타일에 은은함을 더했다. 왼쪽 귀퉁이에는 직선적이고 딱딱한 나무 책상과 푹신한 쿠션이 달린 의자가, 오른편 벽면에는 새까만 정적으로 가득한 넓디넓은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실내 면적의 반 이상을 잡아먹는 대형 인체 스캐너가 놓여졌다.

고상하지만 차가운 황금빛이 흐르는 거대한 원통형 스캐너는 반구형 받침대 위에서 30도 각도로 기울어진 채 누군가를 품에 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운데 부분에는 회전식으로 열리는 문이 있었고 아래 위로는 검은색 돌출부가 길게 튀어나왔다. 바로 옆에 놓인 투박한 책상 위에는 분석 장비와 계기판, 스크린, 조작 패널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자비오프는 그 앞의 군청색 회전의자에 앉아 패널의 스위치를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 전원을 올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리니까."

"얼마든지 기다리지."

스카리인이 그렇게 말하며 창턱에 걸터앉자 희미한 그림자가 원통형 스캐너 위에 휘어지듯 깔렸다. 분석 장비와 계기판은 파랗고 노란 불을 깜박이며 짤막한 소음의 합중주를 연주했고 스캐너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진동하자 그림자도 함께 몸을 떨었다. 조그만 눈을 반짝이고 형형색색의 빛으로 얼룩진 얼굴을 위아래로 주억이며 자비오프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어디 보자. 시동이 걸렸으니 일단 문부터 열어놓고 기다리도록 할까?"

책상의 좌우 끄트머리에서 길게 일어선 철봉 사이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스크린이 늘어섰다. 눈높이보다 약간 높은 곳에는 대형 스크린에는 '검사 중'이란 글자가 입체 영상으로 떠오른 대형 스크린이, 그 아래에는 스캐너의 평면도가 떠오른 조그만 스크린이 있었다. 소시지처럼 굵은 손가락이 평면도의 한 지점을 누르면서 탁한 목소리가 명령을 내렸다.

"개방."

저녁에 우는 까마귀 소리처럼 불유쾌한 소음을 짧게 뱉어내며 문이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열렸다. 바닥에 얇고 불편한 시트가 깔린,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눕힐만한 좁은 공간이 드러났다. 내벽에 줄지어 붙은 흐릿한 푸른색 조명은 느리고 규칙적인 속도로 깜박였다.

"이것도 간만에 보니 정겨울 지경이군."

스카리인이 그다지 진실됨이 섞이지 않은 미소를 덧붙이며 말하자, 자비오프가 대뜸 핀잔부터 줬다.

"자네가 정을 주는 게 다 있었나?"

"가끔 있지."

"그래 봐야 칼과 창, 권총과 대포, 그리고 전투함과 어뢰 같은 거겠지. 따뜻한 온기도 없고 뜨거운 정열도 없고 깊은 사랑도 없는 차디찬 쇳덩이에 정을 붙여봐야 무슨 소용인가?"

"자넨 아직 모르나 본데…… 그 쇳덩이들은 내 손짓에 맞춰 추호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배신자들의 뜨거운 피를 빨아먹는 믿음직하고 충직한 하인이야. 그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정을 주겠나?"

"자네다운 궤변이군." 자비오프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궤변? 아냐, 이건 진실이야. 경험에서 배운 진실이란 말야." 스카리인은 진지했다.

스캐너의 진동이 멎었다. 스크린에는 '이상 없음'이란 글자가 떠올랐고 자비오프는 장비를 조작하던 손을 잠시 멈추며 이렇게 말했다.

"뭐, 아무튼 이제 그만 입 다물고 스캐너 안에 들어가기나 하게."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이며 평면도 하단에 표시된 일련의 명령어를 차례로 클릭하자 받침대가 움직이며 스캐너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스카리인은 거의 수직으로 일어선 스캐너 안에 들어가 손을 가슴 위에 포개어 얹었다.

"자, 원하는대로 들어왔으니 어서 관 뚜껑이나 닫게."

"걱정 마, 곧 닫아줄 테니까."

자비오프는 평면도의 문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눌렀다.

끼익끼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짧은 어둠, 그 뒤에 창백한 푸른 빛이 스캐너 내부를 밝혔다. 그리고 머리 부근의 스피커에서 자비오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이제부터 스캐너를 내리겠네."

받침대가 서서히 움직이며 스캐너의 경사를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꾸고 스카리인은 일어선 상태에서 누운 상태가 되었다. 그는 딱딱한 베개에 머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투덜거렸다.

"이놈의 베개는 여전히 불편하군. 바꿀 생각은 없나?"

"기껏해야 3, 4분 누워 있을 텐데 별걸 다 따지는군. 그냥 좀 참아. 자, 이제부터 스캐닝을 할 테니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푸른 빛이 노란 빛으로, 뒤이어 붉은 빛으로 바뀌면서 모기가 웅웅대는 듯한 소리가 귀를 찌르며 빛이 깜박거렸다. 사방이 밀폐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은 멀리 유배당해 영원과도 같은 어두운 순간들이 가슴을 짓눌렀다. 깜박, 깜박, 단조롭게 점멸하는 빛이 망각의 최면을 걸지만 사나이는 두 눈을 부릅뜨고 저항한다.

찰나가 모여 순간이 되고 순간이 지나 한참의 시간이 되었다. 모기 우는 소리가 잦아들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어. 이제 그만 나와."

기어가 회전하고 받침대가 돌아가며 스캐너가 일어서고 끼기긱, 기분 나쁜 마찰음이 귓전을 때리면서 밝은 빛이 망막에 달려들었다. 스카라인은 눈을 깜박이며 스캐너에서 몸을 빼냈다.

"3분, 4분이래도 이 안에선 30분, 40분처럼 느껴지는군."

"심리적인 착각이라는 거지. 자, 이제 전문가의 분석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게."

스카리인은 다시 책상 위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었다.

"전문가의 분석 결과가 아니라 컴퓨터의 분석 결과겠지."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는 건 나란 사실을 잊지 말게."

"어련하겠나. 하지만 안경을 쓰고 봐야 할 정도라면 자네도 눈을 아예 새로 박아 넣는 게 어떤가?"

"쓸데없는 소리 그만 둬. 어디 보자……"

분석 장비들이 새 울음소리를 지저귀며 대형 스크린에 입체 영상이 떠올랐다. 한가운데에 스카리인의 몸뚱이가, 위에는 퉁퉁 불은 국수다발을 연상시키는 잿빛 뇌의 단면도가, 옆에는 위장의 단면도가, 여기저기에 대동맥과 대정맥의 단면도가 흩어졌다. 모든 입체 영상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상 없음'이란 글자가 겹쳐졌다. 다만 대뇌의 한 단면에는 끈적끈적한 진녹색이 암세포처럼 넓게 번져 있었고 그 옆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와 글자가 나열되었다.

"아직까진 이상 없군." 자비오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숫자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 스카리인은 손바닥으로 넓은 가슴을 소리 내어 두들겼다. "보다시피 난 이렇게 젊고 건강하니까."

"데스, 자네는 나보다 겨우 한 살 어리다구. 그런데도 여전히 20대 초반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정상적인 거라고 생각하나?" 자비오프의 입가가 일그러지고 눈 밑에는 깊은 주름살이 패였고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는 점차 높아졌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하는 거지만 자네의 젊음과 힘은 목숨을 담보로 잡은 일시적인 거야.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고단한 삶에 찌들은 중년의 의사는 한숨을 쉬고 가혹한 삶에 일그러진 얼굴의 사내는 아무런 반론도 펼치지 않았다.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은 따사로운 햇살을 실내에 깔았다.

"난 아직도 후회하고 있네. 자네에게 그 위험천만한 물건을 이식해서 복수심에 불을 지피는 게 아니었어. 어그러진 얼굴을 치료해서 고통스런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평화로운 삶으로 이끄는 것이 의사로서 당연한 의무였다고 생각하면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네."

자비오프는 무력하게 한탄했지만,

스카리인은 눈을 지긋이 감고 머리를 저었다.

"아니, 만일 자네가 끝까지 고집을 부려 이걸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똑 똑 두들긴다) 이식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삶의 목적을 잃고 말라 비틀어져 죽어버렸겠지." 그는 심장에 박힌 말뚝처럼 고통스런 과거를 떠올리며 음산한 목소리를 깔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거짓으로 치장된 싸구려 평화가 아니야. 배신자들의 피를 들이키고 그 맛에 흠뻑 취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지."

자비오프는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릭은 순진한 친구였고 로리아는 훨씬 더 순진하고 착한 여인이었지. 그들의 넋은 자네가 그렇게 비싼 피값을 받아내길 원치 않을 거야."

"안톤. 그들은 이미 죽었어." 그 냉정한 눈빛에 따사로운 햇살마저 얼어붙는 듯 했다. "죽은 사람들이 그런 걸 일일이 따질 리가 없잖아?"

"그래,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뭔가? 순전히 들끓는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싸우는 건가?"

온건한 의사가 은근한 비난을 담아서 말하자 상처 입은 군인은 손을 휘저어 물리쳤다.

"아니, 절대로 아니야.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고. 자네도 해군 군의관이었으니까 알고 있을 텐데? 우리들의 구호를."

자비오프는 고개를 떨어트리고 양미간 사이에 주름을 잡으며 남아 있는 기억을 입 밖으로 조그맣게 끄집어 냈다.

"알고 있지. 연합의 깃발에는 충성을, 상관에게는 신뢰를, 전우에게는 우정을, 연인에게는 사랑을. 그러나 배신자에게는……" 의사가 말 끝을 흐리자……

"……죽음을!" 군인이 단호하게 마무리 지었다.

잠시의 침묵, 그리고 스카리인은 독백했다.

"전쟁의 피구덩이에 빠지고 배신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 친구도, 가족도, 사랑하던 여인도, 하나 둘씩 차례로 사라져 버렸지만 나는 끝까지 살아 남았지……" 그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쳐 쾅 소리를 내며 목청을 높였다. "그래서 싸우는 거야. 먼저 죽어간 전우들에게 내가 살아남은 이유를,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게, 스스로의 목숨을 깎아먹는 길을 선택한 데 대한 변명인가?" 자비오프는 이마를 짚고 신음 소리를 냈다.

"내가 구차한 변명이나 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보이나? 그건…… 죽음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맹세야."

자비오프는 할 말을 잃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개폐 스위치를 눌렀다. 부르릉 모터가 회전하면서 창문이 하나 둘 차례로 위로 접혀 올라가면서 밝은 햇빛과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강렬한 빛이 금속에 부딪히며 번쩍이고 바닥에 뚜렷한 그림자를 그렸다. 스카리인은 고개를 돌려 빛을 외면했고 자비오프는 창틀을 짚고 서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답답한 가슴을 쓸어 내렸다.

"데스, 자넨 정말 좋은 친구야. 하지만 너무 꽉 막힌 친구라고……"

"칭찬 고맙네."

스카리인은 어깨를 들썩이고 웃으면서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자비오프는 어깨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돌아갈 건가?"

"그래, 세시나가 저 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도 슬슬 올라가 봐야지." 스카리인은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위로 들어올렸다.

"길가드의 정비소 말이군."

자비오프는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맞은편의 난쟁이 건물들 너머로 높다란 건물이 삐죽삐죽 일어선 사이사이 하얀 조각구름이 점처럼 흩어진 광활한 하늘이 보였고, 그 넓고 푸른 화폭을 둘로 쪼개는 검은 첨탑의 희미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시나와 그 친구한테 잊지 말고 안부 전해 주게."

그는 몸을 돌려 스카리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한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을 본분으로 했지만 다른 쪽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의사는 군인이 지나치게 가혹한 운명을 짊어졌다고 한탄했으나 군인은 살육의 향기를 찾아 험한 가시밭길로 기꺼이 발을 들이밀었다. 그들은 삶의 방향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달랐지만 인생의 한 시기를 완전히 공유한 친구였고 우정을 존중하고 서로를 신뢰할 줄 아는 사나이들이었기에, 굳게 손을 잡았다.

"부디 몸조심 하게나." 자비오프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서너 달 뒤에 또 오겠네." 스카리인은 태연하게 답했다.

그는 손을 놓고 몸을 돌려 혹독한 숙명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걸어나가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안톤, 자네도 정말 좋은 친구야. 하지만 너무 잔소리가 심한 친구라고……"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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