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궤도에 묶인 우주 정거장으로 이어지는 궤도 엘리베이터의 높이는 약 320키엔(3만 8천 킬로미터)이었다. 여객 터미널과 관제탑, 수출입 관리국과 검역소, 쇼핑 센터와 법률 사무소, 우주 여행사와 행성간 화물 운송 업체, 수많은 관공서와 기업과 유흥 시설이 엘리베이터 발착장이 있는 450층까지 다닥다닥 붙어 올라갔다.

발착장에서 운용되는 엘리베이터 상자의 숫자는 총 48개였다. 크기는 조금씩 달라서 작은 것은 150명을, 큰 것은 350명까지 태울 수 있었다. 어느 것이든 전자장 가속방식으로 움직였으며 우주 정거장까지 가는 데는 반나절로 충분했다.

스카리인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개찰구에 150여 개 국가 및 준국가 단체에서 통용되는 화폐 단위를 지원하는 카드를 내밀었다. 밋밋한 직육면체 모양의 개찰구 기계는 요금을 받아가며 맑은 종 소리를 내면서 문을 열었고, 그는 플랫폼으로 나가 6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커다란 문이 좌우로 열리면서 하얀 타일이 깔린 복도가 나타났다. 1층 일반석의 복도는 두 사람이 어깨를 부딪히며 겨우 지날 정도였고 좌우 측에는 검은 쿠션이 붙은 불편하고 좁은 좌석들이 줄을 지었고 끝에는 자동 계단이 보였다. 좌석 사이로 매끈하게 생긴 귀여운 로봇 안내원이 오가며 '안내가 필요하십니까? 좌석이 어디 있는지 모르십니까? 제게 맡겨 주십시오' 라고 떠들어 댔다.

스카리인은 로봇을 무시하고 사정없이 어깨를 부딪혀 대는 사람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동 계단에 올라타 2층을 지나쳐 3층의 1등석으로 향했다. 복도는 넓고 시원했고 진홍빛 쿠션이 붙은 좌석은 안락했다. 스카리인은 자기 자리를 찾아서 등받이를 눕히고 앉았다.

엘리베이터는 대기권 바깥까지 이어진 자기장을 따라 질주하며, 관성 제어 장치로 충격을 감쇄하고, 인공 중력장으로 편안하고 익숙한 중력을 만들었다. 창문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검디검은 통로 안을 지나기 때문이다.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엘리베이터 통로 외벽에 설치된 수천만 개의 카메라에서 잡은 영상을 실시간으로 비춰 주는 스크린이 있었다. 스카리인은 스위치를 내려 동요하지 않는 푸른 하늘과 제자리를 고수하는 구름을 화면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머리 위의 전등을 끄고 눈을 감았다.

5시간 뒤, 불이 켜지면서 경쾌한 벨 소리가 귀를 때렸다. 스카리인은 군인답게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피커에선 친절하지만 진실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6호 엘리베이터가 지금 막 우주 정거장 '에조리드'에 도착했습니다. 현재 시각은 잉야르-에졸 시로 오후 10시 35분, 우주 표준시로 오후 9시 40분입니다. 이용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리오며, 내리실 때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카리인은 문득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말을 들어본 지도 퍽 오래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년인가 5년 전에 마적단에게 쫓길 때, 같이 있던 친구에게 들어본 게 마지막이군.'

찢어지고 더럽혀진 옷을 입고도 기품 있는 의연함을 잃지 않고 검은 얼굴에 물방울처럼 투명한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강인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던 미남자를 회상하며, 스카리인은 즐겁게 미소 지었다.

'칼루아 가문(家門)의 샤아테 르윈 칼루아라고 했던가,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오겠지.'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굴렸다. '그 때는 목숨을 구해준 값을 어떤 식으로든 톡톡히 받아내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는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플랫폼은 의외로 한산했다. 중간중간에 세워진 대형 스크린에선 세계 각지의 뉴스가 스쳐 지나갔다.

'십자 연맹의 판테옥시우스 말크하임 총수(總帥)가 최근의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의 책임을 물어 경제 장관을 해임'

정지 화면으로 떠오른 것은 건방진 애송이, 정말 역겨운 낯짝이군.

'이드문 제국, 국립 황도대학(皇都大學)의 저명한 사회학자 알릭서드 맥라인 교수가 국민당 강경파의 폭력 노선을 공개 비판.'


화면에서 열변을 토하는 것은 은발의 장년 남성, 근엄하지만 친숙해 뵈는 인상은 아니군.

'에졸 시, 남구 운하의 구름다리가 새로운 관광 명소로 부상한 까닭은?'

무게감이 전혀 다른 뉴스가 같은 비중으로 섞여 있다니 정말 어이없군, 스카리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우주 정거장, 에조리드는 지름 12키니(약 14킬로미터), 높이 1.1키니(약 1.3킬로미터)의 납작한 원통의 가장자리에서 무수한 돌출물이 솟아난 모양새였다. 한가운데에 연결된 궤도 엘리베이터의 개찰구를 빠져 나오면 곧장 중앙 광장으로 들어섰다.

그것은 천연 잔디와 인조 태양과 인공 중력이 교묘하게 배합된 결과물이자 완벽한 허위로 신선하게 포장된 광장이었다. 사방이 뚫린 원형의 공간, 구둣발에 잔디가 서걱이는 감촉이 새롭고 코에는 상큼한 냄새가 스며들었고 14빌 높이(약 500미터)의 푸른빛 천장에선 눈부신 태양광이 반구형으로 빛났고 바닥에선 표준 중력이 발을 붙들었다. 잔디 위에는 징검다리마냥 화강암 포석이 놓여졌고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들이 이파리 무성한 가지를 늘어뜨려 뺨을 어루만졌다. 건장한 청년과 귀여운 여인이 팔짱을 끼고 나무 사이를 거닐고, 나뭇가지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벤치에 앉은 중년 사내는 무릎에 소형 스크린을 놓고 경제 뉴스를 보는 데 열중했고, 어린애들은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며 공놀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음침한 사내는 목 깃을 세우고 그림자를 깔며 전진했다. 남자들은 그의 상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경계했고 여자들은 겁을 먹고 한 발짝 물러섰고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후다닥 달아났다. 버림받고 외면당한 자의 걸음은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만일 저들의 입장에서 이 상처를 봤다면 똑같이 질겁했을 테니까.' 그는 쓰게 웃었다.

광장의 끄트머리를 둘러친 하얀 콘크리트 경계석을 넘어서면 햇살이 힘을 잃고 조명과 가로등으로 밝혀지는 밋밋한 아스팔트 거리가 펼쳐진다. 사람들은 한가로이 걸어 다녔고 도로에선 소형 승용차와 오토바이가 느긋한 속도로 오갔고 딱딱한 건물은 말없이 일어섰다. 높은 하늘과 뜨거운 태양이 없는 대신에 낮은 천장과 차가운 불빛이 흔들리는 무표정한 일상, 그것이 상주 인구 4만 5천의 자치시(自治市) 에조리드의 현주소였다.

스카리인은 길가에 서서 로봇 택시를 잡았다. 그는 푹신한 뒷좌석에 편히 등을 기대고 앉아, 아무도 없는 운전석에 대고 소리를 높였다.

"11가 274번지, 길가드 정비소."

"알겠습니다, 손님." 스피커에서 똑 부러지는 말투의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화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영화를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만, 입 닥치고 차나 몰아."

스카리인은 퉁명스럽게 말했고 스피커는 입을 다물었고 택시는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도로를 바닷가 바람처럼 시원하게 내달렸다. 차창 너머의 건물과 사람들은 윤곽선을 잃어버리고 물컵에 떨어트린 한 방울의 잉크가 되어 눈밖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여기선 조명권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건물의 높이를 제한하고 있었다. 가장 높은 건물이 30층, 보통은 10층에서 20층 정도, 모두가 성냥갑처럼 비슷비슷해 보였다. 가로수는 공원에서부터 쉽게 눈에 띄었던 잉야르의 백송(白松), 하늘은 입체 영상으로 만들어진 느끼한 푸른빛, 특별한 볼거리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에졸이 뜨내기들을 상대로 하는 도시라면, 에조리드는 그보다 한 술 더 뜨는 뜨내기들을 상대하는 도시였다. 잠시 쉬어가는 여행자들, 지상에는 아예 발을 붙이지도 않고 떠도는 유랑민들, 세금을 기피하고 이득을 추구하며 밀무역에 종사하는 악덕 상인들, 그들이 뿌리는 돈이 꿀과 젖이 되어 넘쳐 흐르는 거리였다. 여기 있는 것은 유흥가, 없는 것은 정직한 사람.

십자 연맹, 이드문 제국, 테리어스 성단 연합 사이 불명료한 국경 지대를 오가며 법률을 초월한 폭력을 행사하며 돈을 갈퀴로 긁어 모으는 해적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스카리인은 한때 자신이 그런 해적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이름은 해적의 대명사지!' 모순으로 뒤덮인 운명, 그것은 인생!

중심지에서 방사형으로 펼쳐진 도로를 타고 시 외곽으로 나가면 점차 인적이 드물어지면서 납작한 창고 건물이 규칙적으로 늘어선 가운데 대형 물류 업체의 간판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선착장'이 머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선착장이란, 우주 정거장의 바깥쪽에 튀어나온 4백여 개의 '부두'를 한데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었다. 고래와 같은 우주선은 마치 피뢰침처럼 길쭉하게 튀어나온 '부두'에 등을 기대어 쉬면서 사람과 화물을 뱉어냈다. 300여 개는 에조리드 시의 공영 부두였고 나머지 100여 개는 사설 부두였다.

사설 부두는 사업자의 재정 상태에 따라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것은 한 번에 대형 화물선 열 척이 정박할 수 있었지만 어떤 것은 소형 요트 한두 척이 겨우 머리를 들이댈 정도로 작았다. 길가드 정비소가 자리잡은 257번 부두는 3급 화물선 다섯 척을 받아들일 수 있는 크기였지만 지금은 압도적인 크기의 중전함(重戰艦) 한 척이 그 자리를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에조리드에서 군함을 수리하고 정식으로 유통되는 군용 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정비소는 오직 하나, 길가드 정비소뿐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소장인 레비 길가드는 랏스 연합 해군의 정비반장이었고, 십성 동맹은 그에게 무기의 유통 권리를 줬으며, 스카리인은 무기를 살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창고도 뜸해지고, 황량한 아스팔트 벌판에 집채만한 대형 트럭과 2층 버스와 조그마한 소형 택시가 열병식을 하듯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색 지면에서 푸른빛 천장까지 가로막은 광택 없는 잿빛의 내벽(內壁)은 좌우로 넓게 펼쳐져 거대하고 답답한 원형의 담장을 쳤다. 벽에는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 육각형의 문이 달려 있어 마치 벌집을 방불케 했다.

높은 곳의 커다란 문에선 공 모양(球形)의 비행 로봇이 내려와 트럭에 짐을 실었다. 낮은 곳의 문을 통해 플랫폼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버스나 택시에 올라타 시내로 들어갔다. 중간 부분의 문에선 컨베이어 벨트가 내려와 화물을 부리기도 했다. 주변은 모터 소리, 엔진 소리,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뒤섞여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스카리인이 탄 택시는 오른쪽으로 꺾어져 내벽을 끼고 도는 8차선 도로에 진입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트럭의 꽁무니를 쫓았다. 그렇게 2, 3분을 더 달리다가 왼쪽으로 머리를 틀어 257번 부두의 여객 플랫폼 앞에서 멈췄다.

스카리인은 카드로 요금을 치르고 차에서 내렸다. 플랫폼은 단단한 검은색이었고 높이는 어른 키보다 조금 컸고 길이는 네댓 명이 나란히 설 정도였다. 끄트머리에 있는 낡아빠진 자동 계단을 타고 플랫폼에 올라서면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나이를 많이 먹었는지 군데군데 본래의 밝은 잿빛을 잃고 침침한 숯 색깔로 변색된 문은 양 옆으로 미끄러지듯 열리는 형태였고 꼭대기에는 [길가드 정비소]라는 상호가 검은색으로 양각되었으며 눈높이 부근에는 조그만 구멍이 뚫린 두툼한 금속판이 달려 있었다.

스카리인은 금속판 위에 손을 얹고 주변의 소음이 가라앉을 때를 틈타 큰소리로 말했다.

"샤카무트 837, 에카무드."

카메라가 작동해 그의 홍채(虹彩)를 찍고 금속판은 지문과 성문(聲紋)을 읽어서 비교하고 분석해 결론을 내렸다. 문은 열려야 한다고.

지하감옥의 자물쇠를 돌리는 소리, 철컥, 그리고 초전도 레일 위로 육중한 쇳덩이가 말없이 미끄러지며 어두컴컴한 창자를 드러냈다. 정비소로 이어지는 깊고 고요한 원형의 통로, 천장에서 둥그런 노란 불이, 벽에선 주홍빛의 네모난 불이 점점이 켜져 바닥에 물방울처럼 떨어져 흐르면서 검은색 자동 복도에 번져 나갔다.

스카리인이 발을 올려놓자 복도가 낮게 울면서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가끔 고장난 불빛이 깜박이기도 하고 먼지가 들썩이며 피어 오르기도 했지만 복도는 결코 멈추지 않고 일직선의 통로를 끈질기게 기어갔고 스카리인은 그 위를 규칙적인 속도로 걸었다.

어느 정도 갔을 때, 갈림길이 나타났다. 앞에는 새로운 자동 복도가 있었고 오른쪽은 평범한 철문으로 이어졌다. 스카리인은 주저하지 않고 복도에서 내려 발길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낡아서 가장자리의 페인트가 벗겨진 철문 가운데에는 공책 크기만한 스크린과 버튼이 붙어 있었다. 그가 마악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문이 낮게 울면서 옆으로 미끄러졌다.

"기다리다 코가 빠지는 줄 알았네, 데스."

착 달라붙는 하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콧등을 문대며 능글맞게 웃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스카리인은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래? 정말로 자네 코를 잡아 빼고 싶어지는군, 레비."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크게 휘어진 매부리코에 불룩 튀어나온 광대뼈가 두드러진 얼굴, 조금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 팔뚝과 가슴과 배와 엉덩이와 허벅지에 덕지덕지 주머니가 붙은 실용적인 옷을 입은 사내, 그는 레비 길가드 소장이었다.

"그 망할 놈의 말버릇은 여전하군. 자, 어서 들어오게." 길가드는 웃으며 손짓했다.

정비소 내부는 타원형이었고 그 넓이는 어지간한 실내 운동장에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3층 건물 높이의 천장에선 밝은 불빛이 쏟아져 내렸고 하얀 제복을 입은 직원들은 직사각형 스크린이 달린 책상 앞에 앉아 바삐 업무를 보았는데 그 숫자는 쉰 명 남짓했다. 낡은 난쟁이 로봇들은 때로는 성급하게 때로는 느긋하게 삐그덕 소리를 내며 좌우로 오가면서 땟국물이 끼고 먼지가 자욱한 바닥을 쓸고 닦듯이 했다.

사방의 벽을 통째로 메운 스크린에는 깊고 어둡고 고요한 바다가 가득히 깔리고 그 위에 금속과 금속을 얽어 만든 추레하고 투박한 부두가 겹쳐지고 전장(全長)23비그(약 820미터)의 고래등처럼 묵직하고 웅장한 쇳덩이가 더해졌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흑철색 몸통, 창끝처럼 뾰족한 뱃머리, 생선 지느러미처럼 넉넉한 배끝, 그것은 응징의 날개이자 파멸의 날개이자 죽음의 날개, 에카무드였다. 수십 개의 두껍고 굵직한 케이블이 연료를 공급했고 백여 개의 기계팔이 무기를 장착했고 수백여 기(機)의 로봇이 돌아다니며 짐을 실어나르고 외장(外裝)을 교체하고 작업 상황을 꼼꼼히 점검했다.

"올라가지. 레인 양이 한참 전부터 자넬 기다리고 있었어. 그렇게 참하고 어린 아가씨를 꿰어 차고 다니다니, 자넨 정말 못 돼먹은 남자라니까."

길가드는 왼쪽 벽에 붙은 계단으로 가면서 그렇게 말했고, 스카리인은 이렇게 대응했다.

"그렇게 참하고 어린 아가씨를 건들지 못해 안달이 난 자네도 못 돼먹긴 마찬가지야."

"이거 한 방 먹었군." 길가드의 얼굴에서 경박한 웃음이 가시고 진지함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습격 당했다면서? 레인 양 걱정이 태산 같더구만."

스카리인을 알아보는 고참 직원들은 반갑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스크린에 떠오른 입체 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속도로 조작 패널을 두들기고 있었다. 누군가 옆구리를 찌르지 않는 한 돌아보지도 않을 기세였다.

그들이 밋밋한 철판이 깔린 계단에 발을 올리자 텅, 텅, 발끝에선 운명의 북소리가 들렸다.

"자동 계단으로 바꿀 계획은 여전히 없는 건가?" 스카리인이 묻자,

"이봐, 난 여기서 하루 30시간 중 24시간을 일한다고. 이렇게나마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발이 아예 굳어져 버릴 거야." 길가드는 엄살을 부렸다.

45도 각도로 올라가다가 방향을 바꾸고 다시 한 차례 방향을 바꿔서 올라가면 지저분한 얼룩이 묻은 우툴두툴한 회녹색 타일이 깔린 복도가 나왔다. 좌우로 흔들리는 쇠 난간을 짚으며 복도 끝으로 가면 검붉게 녹슨 철문이 보였는데 눈높이에선 '소장실'이란 명패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길가드가 다가서자 문이 끽끽 비명을 지르며 왼쪽으로 밀려났다.

"아가씨, 애타게 기다리던 애인을 잡아 끌고 왔습니다."

소장실은 평범한 사무실이었다. 문 맞은 편에 넓은 책상이 놓여졌고 낮은 장식장과 작은 냉장고가 세워졌다. 오른쪽 벽에는 대형 스크린이, 왼쪽 벽에는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휴양지를 그린 싸구려 풍경화가 한 점 걸렸는데 그 밑에는 백송(白松)의 나뭇결을 살린 소박한 원탁과 의자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의자에 앉아 있던 세시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도하는 눈빛으로 스카리인을 바라봤다.

"주인님, 가셨던 일은……?"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깨끗하게 끝났지."

스카리인은 심문에 관해서 말했지만, 세시나가 알고 싶어했던 건 다른 문제였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아, 그거? 물론 괜찮았지. 안 그래도 안톤이 너한테 안부 전해 달라더군. 레비, 자네한테도." 스카리인은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유리를 손가락으로 똑똑 두들기며 길가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 그나저나 일의 진행 상황은 어떤가?"

길가드는 책상 위의 패널에 손을 갖다 대고 "에카무드 작업 상황 보고"라고 말했다. 스크린에는 부두에 정박한 에카무드의 모습이, 곧이어 평면도가 떠올랐고, 뒤이어 숫자와 글자가 반투명하게 겹쳐졌다.

"에너지 보급은 좀 있으면 끝날 걸세. 외부 장갑의 손상 부위의 점검과 교체 작업은 꼬박 내일 오전까지 걸리겠군. 그때까지는 유트라이드의 14식 충격 어뢰, 8식 고폭 어뢰, 아이크만의 22식 요격 어뢰도 모두 장전될 거야. 문제는 12번, 13번 보조 엔진인데……" 길가드는 장갑을 벗어서 가슴의 주머니에 끼우고 맨손으로 턱을 긁적였다. "출력이 떨어지는 원인이 뭔지 규명조차 할 수 없었어. 미안해."

"역시 여기선 힘든 건가?"

스카리인의 물음에 길가드는 어깨를 움츠리며 답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보급이나 기본적인 정비가 한계라고. 제대로 고치려면 하루라도 빨리 하르라비 영감님을 찾아가는 편이 좋겠지." 그러더니 냉장고를 열고 주스 병을 꺼냈다. "시원하게 마실 거라도 한 잔 하는 게 어떻겠나?"

그는 원탁에 유리컵 세 잔을 올려놓고 붉은빛이 감도는 과일 주스를 따랐다. 세시나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주스를 홀짝이며 자신의 주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뷔스로 직행할 생각이십니까?"

"보조 엔진 2기라, 아니,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니까 하르라비를 찾는 건 뒤로 미뤄도 되겠지." 스카리인이 답했다.

"그래도 서너 달 안에 영감님한테 들러 보게. 슬슬 출력 계통을 총체적으로 손볼 때가 됐으니까 말씀이야."

길가드는 말을 끝맺으며 슬쩍 눈짓을 보냈다. 세시나를 힐끔거리는 눈짓.

스카리인은 재빨리 그 의미를 파악하고 세시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시나, 나 없는 동안 작업을 지켜보느라 고생 많았다. 넌 그만 나가서 천천히 시내 구경이나 하면서 쇼핑이나 즐겨라."

"예?"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괜찮아. 들어가 있어."

마음씨 고운 소녀는 남자들이 그들만의 시간을 영위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한 잔의 술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고 싶어하는 사내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세시나는 지금 이 자리에선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세시나가 검은색 가죽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스카리인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으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알겠지? 느긋하게 쉬다가 호텔에 들어가서 일찍 자 둬."

"예, 주인님. 그럼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길가드님."

그녀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자 길가드는 활짝 웃음으로 답했다.

"내가 바래다 주도록 할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주인님하고 천천히 일 보세요." 세시나는 다시 고개 숙여 절을 올렸다.

그녀가 나가고 문이 윙 소리를 내며 닫혔다. 길가드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기는 순식간에 아쉬움으로 돌변했다.

"정말 착한 아가씨야."

"알고 있어." 스카리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얘기나 하자고 그녀를 쫓아내라고 한 건 아니겠지? 무슨 용건인가?"

"실은 클라루즈 상사에게서 정보가 들어왔어." 그는 책상의 패널에 손을 대면서 말을 이었다. "클라루즈가 보낸 기록을 재생해 봐."

스크린이 반으로 분할되면서 오른쪽에는 여러 줄의 텍스트가, 왼쪽에는 클라루즈 상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낯빛은 자못 심각했다.

[데스,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야. 드레이트 렉클 중령은 암살자만 보낸 게 아닌 모양일세. 십자 연맹에서 입수한 최신 정보에 따르면 바다에서도 자네를 노리고 있다는군. (손가락으로 오른쪽의 텍스트를 가리키며)이게 바로 녀석이 만든 문건의 초안이야. 알데히트 4 해역에 연맹의 화물선이 지나간다는 정보에는 아예 귀도 기울이지 말게. 함정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 작전을 세운 뒤로 지난 몇 달간 알시트 해역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했다더군. '유령선'의 정체도 이 녀석이었겠지]

클라루즈 상사는 헛기침을 하고선 말을 이었다.

[어쩌면 지금쯤 문건이 새어나간 걸 눈치채고 다른 곳에 함정을 파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이번 원정(遠征)에선 믿을 수 없는 정보는 거들떠보지도 말라고. 알겠지?]


화면이 꺼지면서 익숙한 공백이 돌아왔고 스카리인은 허리를 수그리고 고개를 떨구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군. '그녀'가 그곳에 돌아왔을 리가 없지……'

그의 입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실망 뒤에 찾아오는 허탈감에서 비롯된 한숨이자, 불확실한 운명에 기대어 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갑자기 왜 웃는 건가?"

숙달된 정비공이 설명을 요구하자 노련한 해적은 고개를 저었다.

"원정은 모험이야. 여행길에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정보가 옳고 그른지 일일이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순전히 운이 좋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감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해. 그런데 저런 말을 하니 웃을 수밖에 없지."

"그 친구는 자네를 걱정해서 한 말이야." 길가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냉장고 안쪽에서 푸른 도자기 병을 꺼내 들었다. "어쨌든……간만에 좋은 술이 들어왔으니 한 잔 해야지. 자네 고향, 에딜리온의 청주(靑酒)야."

괴로운 시대가 씁쓸한 맛으로, 아름다운 기억이 투명한 하늘빛으로 담긴 술, 그것이 에딜리온의 청주였다. 이 술은 한 뼘 높이의 도자기로 만든 뿔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켜야 제 맛이었다. 길가드는 술을 제대로 마실 줄 아는 술꾼이었기에 뿔잔도 잊지 않고 꺼내 들었다.

스카리인과 길가드는 푸르른 술이 찰랑거리는 하이얀 뿔잔을 챙 소리가 나게 맞부딪히더니 숨도 쉬지 않고 쭈욱 들이켰다. 고드름처럼 차갑게 목 줄기를 넘어가며 온몸을 후끈후끈 달구는 고향의 향기, 취기가 맴돌며 옛일을 일깨웠다.

"반더빌츠 박사도 이 술을 참 좋아했었지." 길가드의 말이었다.

"그랬었지." 스카리인은 선선히 동의했다. "하지만 에릭은 너무 술이 약했어."

한 잔만 마셔도 비틀거리고 두 잔째에 쓰러지던 친구의 얼굴 위에 언제나 그와 함께 있던 여인의 얼굴이 겹쳐졌다. 길가드 역시 그녀의 존재를 잊지 않고 덧붙였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어. 똑똑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타산적이고 잘난 체 하기 일쑤인데, 그 사람은 전혀 그러지 않았거든. 그 부인도 정말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마치 세시나처럼……"

길가드는 단단한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으로 술병을 기울여 빈 잔을 채웠고 스카리인은 뿔잔에 담긴 맑은 하늘에 영혼을 적시며 짙은 아쉬움을 허공에 토했다.

"쓸데없이 착한 사람들이었지."

"데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아니, 아니야.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생각해 보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녀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추억은 눈깔사탕과 비슷하다. 오랜 시간 주머니에 낑겨넣고 다니는 바람에 무참하게 일그러진 눈깔사탕일지라도 입안에 넣으면 좋은 냄새를 풍기며 혀 위에서 부드럽고 달콤하게 녹아 내린다. 추억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슬프고 가슴 아린 경험일지라도 세월이 지나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적인 추억이 된다.

그러나 지금, 두 사내는 너무나 슬퍼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옛 일을 추억하며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비감함에 젖어 들었다.

"자네 말이 맞는지도 몰라."

길가드는 무겁게 동의하며 상처로 얼룩진 과거를 망각의 늪으로 돌려 보내는 차가운 생명수를 들이마셨다. 스카리인은 조용히 말했다.

"만일 내가 조금만 더 영리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눈치가 빨랐더라면, 에릭은 그렇게 어이없이 죽지 않았을 거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정직하고 담백한 삶을 오래도록 누렸을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길가드는 흔들리는 손으로 술을 따르며 실소를 터뜨렸다. "누가 알았겠어? 요새의 사령관이란 작자가 적군의 꾀임에 홀라당 넘어갔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냐고? 그 순간을 요행히 넘겼더라도 2중 3중으로 쳐진 덫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끝내는 목숨을 잃었을 거야!"

그는 네 번째 잔을 호쾌하게 마시고 취기가 올라 비틀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운명이었던 거야.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다고. 결코 자네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후회할 필요는 없어. 잊어버려. 모두 잊어버리라고!"

스카리인은 마음을 비우듯이 술잔을 비우고 꿈을 버리듯이 빈 잔을 원탁에 내려놨다. 창백하게 휘어진 뿔잔은 옆으로 쓰러지며 슬피 울었다.

"나는 후회하는 게 아냐."

"그러면?"

흐리멍텅하게 풀린 길가드의 눈동자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며 스카리인은 이렇게 뇌까렸다.

"지난 시절을 사무치게 그리워할 뿐이지……"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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