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설법자


우주 정거장과 궤도 엘리베이터와 지상 활주로와 여객 터미널로 이뤄진, 천이백만 인구의 삶을 지탱하는 우주항은 에졸 시 북구(北區)의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했다. [그림자]를 비롯한 크고 작은 술집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깔린 거리엔 상상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환락과 상상조차 불허하는 악덕이 반딧불처럼 모여들어 흥청망청 불야성을 이뤘다. 여기서 차를 타고 큰길을 따라 동쪽으로 다섯 블록을 내려가 외곽 순환도로로 진입해 남쪽으로 20분 정도를 달리면 남구(南區)로 들어간다.

북구가 뜨내기들의 돈을 뜯어내려는 술집과 쇼핑 센터와 호텔로 충만한 돈벌이 장소라면, 남구는 이곳 시민들이 실제로 삶을 영위하는 장소였다. 차는 뜸하고 인파는 적고 높다란 건물 대신에 낡고 편안한 느낌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멀리 북쪽에서 먹구름이 낮게 깔린 무겁고 답답한 하늘을 떠받치듯이 일어선 거대한 궤도 엘리베이터를 제외하면 여기가 항구 도시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카디엔 중위의 날렵한 붉은색 스포츠 카는 외곽 순환도로를 완벽하게 제압하며 앞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하지만 남구 중앙대로 부근에서 미행을 염려해 미리 준비해 둔 탄색(炭色) 소형차로 갈아타야 했다. 비범한 속도감이 사라진 자리를 메운 것은 느리고 협소한 평범함이었다.

중앙대로를 따라 2, 3분 정도를 달리다가 고가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다시 5분 가량 내려가면 좌우 20차선 도로가 12차선으로 줄어들면서 전통의 번화가, 남구 신작로가 펼쳐진다. 이름인즉슨 신작로(新作路)지만 이미 800년 전에 닦여진 도로였고 좌우로는 어깨를 한껏 낮춘 고풍스런 건물들이 늘어섰다. 새벽빛에는 윤곽선만, 한낮의 태양 아래서는 당당한 풍채를,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에는 서정적인 자태를 보여주는 예술적인 건물들이다.

"여긴 정말 아름다운 거리군요. 에졸에는 여러 차례 왔지만, 이 거리를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뒷자리에 앉은 세시나는 도시의 향취에 흠뻑 취한 표정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카디엔 중위는 자동 조종 장치에 앞길을 맡긴 채, 고개를 꺾어 수다스런 관광 안내원 역할을 자청했다.

"이 거리를 본 게 처음이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요. 이 신작로는 십성 동맹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멋진 거리랍니다. 무려 800여 년이나 되는 역사를 품고 있는 길이니까요. 저기 왼쪽 앞에 있는 20층짜리 건물이 보이시죠? 저 건물 외벽을 장식한 서부 법회의 4대 천사상은 600년 전의 유명 조각가인 이벨 아나사티엔이 대리석을 깎아서 만든 거죠. 그리고 꼭대기에 세워진 대천사장의 동상은 이벨의 이복 동생인 킴벨 아나사티엔이 만들었고요."

하지만 조수석 쿠션에 깊숙이 가라앉은 스카리인은 팔짱을 낀 채 눈과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 거리의 역사나 예술은 아무 짝에도 쓸데 없는 것이었기에.

차는 대략 한 블록을 내려가서, 손에 쥔 칼을 앞으로 쭉 뻗고 위엄이 넘치는 얼굴로 발 밑을 응시하는 여신(女神)의 조각상을 머리에 얹은 15층 건물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돌았다. 그리고 아까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실용적인 건물들이 이어진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을 따라 얼마간 내려가던 도중에, 카디엔 중위가 손가락으로 한 채의 건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사방에 짙푸른 유리창을 두른 5층 건물이었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데다 날도 흐린 탓에 유리는 온통 얼룩덜룩한 구정물 색깔이었다. 옆 건물과의 사이에는 승용차 하나가 겨우 오르내릴 수 있는 주차장 진입로가 열려 있었다.

"이 건물은 애초부터 정보국을 위해서 지어졌다고 해도 의심스럽지 않을 정도야." 스카리인은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만큼 눈에 안 띄는 건물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말이지."

"예, 정말 그렇습니다. 너무 멋져도 곤란하지만 너무 허름해도 문제죠.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카디엔 중위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진입로에서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내려가는 길을 따라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침침한 어둠 속, 덩치 큰 화물차들 사이로 승용차가 어깨를 비집고 들어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스카리인 일행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층은 2개 혹은 3개의 사무실로 나눠졌지만 5층은 단 하나의 회사가 독점하고 있었다. 그것은 섬유 유통업을 주로 하는 [기단 무역상사], 사장은 이피니엘 기단, 직원은 31명, 자본금 2만 5천 산트의 중소기업이었다. 하지만 이피니엘 기단은 20여 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고 기단 무역상사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 회사였다. 그 실체는 총원 25명으로 구성된 십성 동맹군 중앙 정보국의 잉야르-에졸 지부였고 주요 업무는 십자 연맹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사무실은 넓고 깨끗하고 아늑하고 한적했다. 책상은 거개가 텅텅 비었다. 남아 있는 요원은 여남은 명에 불과했는데 개중에는 스카리인이 아는 얼굴이 섞여 있었다.

"질리언, 오랜만이요."

엑토 질리언 상사는 여기 근무한지 9년째로 접어드는 40대 후반의 고참 정보요원이었다. 살짝 가르마를 타서 넘긴 머리, 적당히 살집이 잡힌 얼굴, 중키에 둥글둥글한 체격, 딱히 눈에 띌 게 없는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그것은 모든 정보요원들이 기를 쓰고 획득하려는 덕목, 평범함이란 이름의 비범함이었다.

"이런, 이게 누굽니까? 이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요." 그는 호들갑스럽게 달려와 스카리인의 손을 붙잡았다.

"부사장님께선 안에 계시겠죠?"

카디엔 중위의 물음에 질리언 상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이지. 자네 연락이 왔을 때부터 줄곧 사장실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네." 그리고 스카리인을 향해 말했다. "자, 어서 가서 일 보시죠."

사무실 오른편에는 칸막이로 나눠진 회의실이 자리잡았고, 그 옆에는 불투명한 유리문으로 가로막힌 사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사장실 안에는 명목상의 '부사장'이자 실질적인 '지부장'인 뮬 소령이 앉아 있었다.

에팅거 뮬 소령은 인간의 탈을 쓴 기계였다. 자신이 설정한 삶의 궤도에서 한 치의 이탈도 허용하지 않는 기관차였다. 국가는 신이었고 군대는 종단(宗團)이었고 그 자신은 수도승이었다. 일을 할 때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며 부하들을 닦달하기 일쑤였다. 걸음은 자로 잰 듯이 걷고 책상은 언제나 깨끗하게 정리했고 책은 끄트머리가 일직선이 되도록 꽂았다. 상관에게는 유능한 부하로 인정받았지만 부하들 사이에선 함께 일하기 싫은 상사로 손꼽혔다.

결혼은 20대 중반에 했다. 하지만 꽉 막힌 성격 때문에 매일같이 부부싸움을 거듭한 끝에 6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에 결혼을 '욕망의 감옥'으로 깎아 내리고 여성을 '남성의 성욕을 해결해 주는 정액받이 이상의 가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돼지 같은 생물'로 정의하며 독신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로 인해 여성들로부터 '상종 못할 인간'이란 평가를 듣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나이는 41세, 훤칠한 키에 군살 없이 탄탄한 체격이었다. 얼굴은 홀쭉하고 눈은 바늘처럼 가늘고 코는 낮고 길쭉했다. 금빛 눈동자와 거꾸로 된 V자를 그린 입술은 침묵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오늘날의 유행에서 10년은 뒤처진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었다.

취미라곤 전혀 없었다. 아침에 출근해 한밤중에 퇴근하고 집에서 하는 일은 잠자는 것뿐이었다. 다만 뭔가를 궁리할 때는 서판(書板) 구석에 철필로 낙서를 하곤 했다. 문맥이 이어지지 않는 문장이나 의미불명의 기호를 마음 내키는 대로 끄적끄적 휘갈기다가 어느 순간에는 깨끗이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끄적이며 여러 갈래로 흐트러진 생각을 정리했다.

스카리인 일행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뮬 소령은 책상 앞에 앉아 한참 낙서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재빨리 철필을 움직여 서판의 내용을 깨끗이 리셋하고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켜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스키더 소령님. 근 1년 만에 뵙는 것 같군요. 반갑습니다."

"정말 그쯤 된 것 같군요, 뮬 소령님." 스카리인은 악수를 나누며 화답했다.

"아니, 이건 레인 양 아닙니까? 너무 아름다워져서 몰라볼 뻔 했습니다."

뱀 같은 손가락이 은근히 세시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겁먹은 토끼처럼 뒤로 물러나 새빨개진 얼굴을 수그리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뮬 소령님."

사장실은 넉넉하고 쾌적했다. 바닥엔 차분한 고동색 카펫이 깔리고 맞은편 벽의 통짜 유리창에는 희미한 저녁 햇살을 뿌리며 어둠을 준비하는 하늘을 짊어진 키다리 건물들이 비쳤다. 창문을 등지듯이 커다란 책상이, 그 앞에는 접대용 테이블과 소파가, 모퉁이에는 옷걸이가 놓여졌다.

뮬 소령은 스카리인과 세시나를 소파에 앉히고선, 카디엔 중위를 질책하는 눈빛으로 쏘아봤다.

"그나저나 중위, 나는 자네한테 눈에 띄지 않게 붙어 다니라고 시켰을 텐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러자 카디엔 중위 대신, 스카리인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뮬 소령님, 그건 제 잘못입니다. 3년 전하고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 소령은 금붕어처럼 눈을 깜박이며 머릿속에서 옛 일을 들춰냈다. "그렇군요, 술집에서 철없는 놈들과 시비가 붙은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스키더 소령님, 당신은 지위도 있고 명성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시정잡배들처럼 술집에서 소란이나 부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가급적이면 소란을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상대편이 먼저 싸움을 걸어 왔으니까요."

"그건 스키더 소령님 말씀이 맞습니다. 별 수 없이 제가 끼어들어 싸움을 말려야 했습니다."

카디엔 중위가 변명조로 말하자, 뮬 소령도 그제야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그랬다면 별 수 없었겠군. 자넨 이만 나가 보게."

"옛, 알겠습니다!"

카디엔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물러났고, 뮬 소령은 접대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스카리인을 마주보고 앉았다. 그가 테이블 옆에 세워져 있던 난장이 로봇의 머리통을 가볍게 두들기자, 로봇이 나즈막한 모터 소리를 내면서 둥그런 눈을 크게 떴다.

"마실 건 뭐가 좋겠습니까? 홍차? 녹차? 아니면 광천수? 원하시는 건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스카리인은 차가운 물을, 세시나는 따뜻한 홍차를 부탁했고 뮬 소령은 거기에 녹차를 더해서 가져올 것을 로봇에게 지시했다. 원추형의 몸통이 카펫 위를 조용히 미끄러지며 문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에 홍차와 녹차와 물이 담긴 유리컵을 쟁반에 받쳐들고 돌아왔다. 미끈한 기계팔이 음료수를 주문대로 늘어놓는 사이, 뮬 소령이 먼저 말문을 뗐다.

"그나저나 웬일로 여기까지 온 겁니까? 당신이 인사차 방문했으리라 생각되진 않는군요."

"예, 실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뭘 확인하려는 겁니까?"

"하나는 뭣 때문에 날 감시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와 당신네들 사이에 군사 조약이 맺어진 상황 하에서, 당신이 내게 미행을 붙이는 이유는 누군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경우뿐이겠죠. 예전에 질리언을 붙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죠."

잠시 동안의 침묵과 더불어 세시나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뮬 소령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까닥이다가 기계적으로 좌우로 돌렸다.

"아직은 단정할 수 없습니다. 미확인 첩보니까요."

"3년 전에도 그랬지만 당신의 첩보는 언제나 믿음직하지 않습니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첩보는 신뢰할만한 정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완고하지만 애매한 답변에 스카리인은 끈덕지게 달라붙으며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으니까 내게 감시를 붙였겠죠. 대체 어떤 놈들입니까?"

뮬 소령은 하얀 찻잔을 들어올려 뜨거운 김이 솟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 좋습니다. 별로 감출 이유도 없으니 제가 아는 사실대로 말씀 드리죠. 실은 보름 전에 본사, 즉 정보국 본부에서 십자 연맹의 특수부대 요원 수 명이 신분을 감추고 이곳 에졸 시로 잠입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죠. 정보원이 아닌 전투원이 이곳에 올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요. 헌데 어젯밤에 당신이 입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찻잔을 컵 받침에 되돌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놈들의 목표는 당신일 거란 생각 말입니다."

"가능성 있는 추측이군요."

"가능성이 꽤 높은 추측이죠. 도대체 여기 잉야르에 뭐가 있단 말입니까? 에졸의 우주항을 제외하면 논이나 밭, 아니면 물소떼를 키우는 목초지뿐이죠. 여기 정치가들은 동맹 회의에는 발 한 번 들여놓지 못한 2류나 3류뿐이라서 암살할 가치는 전혀 없습니다. 항구 설비를 노린 것도 아니겠죠. 여긴 군항(軍港)이 아닌데다 규모도 별로 크지 않아서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으니까요." 뮬 소령은 잠시 말을 쉬고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남는 건 당신뿐이죠."

"과연 그렇군요." 스카리인은 팔짱을 끼며 싱긋 웃었다. "그래서 놈들이 행동하기 전에 미리 경호원을 붙여 제 주변을 감시했다, 이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당신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그 책임은 전부 제가 뒤집어 써야 하니까요. 확증은 없지만 미리 경계해서 나쁠 것 없겠죠. 그래서 우주 정거장에서부터 계속 경호원을 붙인 겁니다."

"소령님은 대단히 신중한 분이니 당연히 호텔에도 조치를 취했겠죠?"

신중하다는 평가는 뮬 소령이 제일 좋아하는 칭찬이었지만 그는 희로애락을 쉽게 얼굴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겉으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물론이죠. 당신 옆방에는 요원 둘을 집어넣고 호텔 바깥에도 넷을 배치시켜 교대로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 놈들에 대해선 뭔가 알아낸 게 있습니까?"

"글쎄요, 녀석들이 어떤 이름과 어떤 신분을 이용해서 여기에 들어왔는지, 그건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본사에서 연락을 받자마자 입항자 목록을 철저히 체크해서 서른 명 가량 수상한 자를 추려내 무인 감시기를 붙였지만, 아직까진 뭐 하나 수상한 징후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미처 걸러내지 않은 사람들 중에 섞여서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밀항해서 들어왔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렇군요. 일단 그 문제는 뒤로 미루도록 하죠." 스카리인은 한 모금의 물로 갈증을 달래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최근 알시트 해역(海域)에 출몰한다는 '유령선'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시체처럼 차갑게 굳어져 있던 뮬 소령의 입술 한쪽이 슬쩍 위로 들어올려지며 익숙하지 않은 미소를 그렸다.

"유령선이라, 꽤나 이상한 걸 쫓고 계시는군요. 근처 항구에서 떠도는 웃기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해군이 아닌 다음에야 바다에 뭐가 떠다니는지 일일이 알 수야 없는 노릇이죠. 일단 본사에 문의해 보긴 하겠습니다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정보원이 하는 일은 첩보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사실로 확인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만일 아군 정보원이 적에게 사로잡혀 지독한 심문 끝에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낱낱이 고해 바친다면 아군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다. 그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정보 조직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운영되며 특정 개인이나 조직에게 필요 이상의 정보를 흘리지 않는다.

그리고 뮬 소령에게 허락된 정보력은 에졸 시(市)에 국한되어 있었다. 지리적으로 십자 연맹에 속한 알시트 해역은 그의 담당 밖이었다. 정보국 본부에 정보를 요청해 봐야 가볍게 묵살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스카리인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따뜻한 홍차를 조심조심 마시고 있는 세시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거리며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한가지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이 애를 다른 안전한 곳에서 보호해 줄 수 있겠습니까?"

연약한 소녀는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고 깜짝 놀란 얼굴로 스카리인을 쳐다봤다.

"주인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잠자코 듣고 있어." 그는 뮬 소령에게 답을 재촉했다. "가능하겠죠?"

"물론 가능하기야 합니다만, 뭣 때문에 그러시는지……?"

"놈들을 유인해서 처리할 생각인데, 그러려면 혼자 있는 쪽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계산기처럼 빈틈없이 돌아가는 뮬 소령의 두뇌는 그 의견에 선뜻 동조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쪽 안가(安家: 안전 가옥)에서 레인 양을 보호하도록 하죠."

"주인님, 하지만……"

스카리인은 세시나의 애원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하지만이고 뭐고 없어. 명령이다."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을 돌렸고 사내는 불필요한 위로를 생략한 채 냉정하게 상황을 짚어 나갔다.

"3년 전, 그 때의 현상금 사냥꾼은 당신네 요원들이 비교적 쉽게 잡아냈죠. 하지만 현상금 사냥꾼과 직업 군인은 전혀 다릅니다. 특히 연맹군은 얕잡아 볼 수 없는 상대죠. 동맹군 정보국이 내게 경호원을 붙였다는 사실은 지금쯤 놈들의 귀에도 들어갔을 겁니다. 그러니 녀석들은 경호원을 떼어낸 뒤에 날 습격하거나, 아예 경호원도 함께 없앨 각오로 덤벼들겠죠."

뮬 소령도 지지 않고 냉정하게 논리를 전개했다.

"그럴 경우 가장 쉬운 방법은 폭탄 테러죠. 예를 들어 당신이 묵고 있는 호텔을 통째로 폭파시키면 목표인 당신은 물론이고 거추장스런 경호원들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겠죠."

가늘게 떨리는 세시나의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달래듯이 감싸 안으며 스카리인은 태연히 말했다.

"제가 선택할만한 방법이군요."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죠. 무고한 사람들이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신 하나뿐이니까요. 하지만 십자 연맹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 발각되는 경우에는 욕을 먹는 정도로 끝나진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외교적으로 고립될 위험마저 있죠. 아무리 당신이 두렵기로서니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대형 테러를 벌일 것 같지는 않군요."

"딴은 맞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화려하게 폭탄을 터뜨리기보다는 몰래 암습(暗襲)하는 쪽을 선택하겠죠."

"결행 날짜는?"

"상대편이 방비할 대책을 세우기 전에 끝장을 내려고 하겠죠. 빈틈이 있다 싶으면 오늘 당장이라도 습격할 겁니다."

스카리인은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 무렵에 적당한 핑계를 대고 경호원을 빼는 편이 좋겠군요."

그러자 뮬 소령은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스키더 소령님, 당신이 직접 미끼로 나설 생각입니까? 아까 당신이 말했듯이 놈들은 현상금 사냥꾼하곤 격이 다릅니다. 그 숫자는 적어도 둘 이상, 전문적인 암살 훈련을 받고 2급 이상의 사념 능력을 지닌 병사들이겠죠. 혼자서 상대하긴 버거울 겁니다."

"그런 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절대적인 오만함이 짙게 스며든 불쾌한 말투에 뮬 소령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는 이내 평상심을 되찾고 대화를 계속했다.

"알겠습니다. 3급 비밀 통신망에 역정보를 흘려야겠군요. 밤 11시경에 시 외곽의 모소(某所)에서 이드문 제국의 '강경파'가 대규모 회합을 가질 예정, 전 요원을 동원해 감청 및 감시 작전을 펼칠 예정이라고 말이죠."

"정말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 스카리인은 꽤나 감탄한 눈치였다.

"그럴 수 밖에요. 요즘 자주 있는 일이거든요. 저 개인적으로는 제국의 망나니 귀족들을 피해 여기로 도망쳐 온 불쌍한 망명 정객(政客)들이 뭘 떠들든지 자유롭게 내버려 두고 싶습니다만, 상부의 명령이니 도리가 없죠." 그는 어깨를 들썩이더니 소파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그나저나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었군요. 어떻습니까,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로 요 앞에 썩 괜찮은 식당이 있습니다."

스카리인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구름 사이로 한 개의 커다란 달을 둘러싸는 두 개의 앙증맞은 달이 휘영청 걸린 잉야르의 저녁밤이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역사를 부드럽게 보듬어 안으며 불빛들이 질주하는 거리에 얕게 내려앉았다. 세 개의 달이 한꺼번에 뜨는 삼월야(三月夜), 45일에 한 번 돌아오는 보기 드물게 밝고 아늑하고 편안한 밤이었다.

"이 근처는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뮬 소령이 턱을 주억이며 설명했다.

"물론입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사방 여섯 블록 안에는 500개가 넘는 감시 장비가 깔려 있습니다. 의심스런 인간이나 수상쩍은 물건은 머리 위로건 땅 밑으로건 절대로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용하는 주차장이나 요식업체, 운동시설에는 더더욱 철저한 대책을 강구해 뒀죠."

"주인장 모르게 감청, 감시 장비를 설치했다는 말씀이군요."

"글쎄요, 편하신 대로 생각하십시오." 뮬 소령은 뻔뻔한 낯빛으로 즉답을 회피했다. "여하간 이 근방에선 암살자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일단 식사를 하고 나서 움직이는 편이 좋겠군……" 스카리인은 아직 불안한 기색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한 세시나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뮬 소령을 쳐다봤다. "소령님, 그 식당의 요리는 기대할만한 가치가 있겠죠?"

"물론입니다. 이래봬도 식도락가로 통하는 몸입니다. 저만 믿고 따라 오시지요."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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