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년쯤 전, 사형제 논의가 활발할 때 썼던 글입니다. 
술에 이빠이 취한 어느날, 스스로 쪽팔리다 생각한 글을 다 삭제할 때 같이 지워졌는데.... 황당하게도 제 이메일 첨부파일 중에 남아 있더군요. 그걸 복구시키고 수정해서 여기 올리는 바입니다. 부디 가볍게 읽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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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와
과레스끼의 [돈 까밀로] 시리즈,
특히 [브라운 신부의 지혜] 중에서 [기계의 잘못]을 추억하며 -



- 제 1장 -



그날도 여느 때처럼 평온하고 고요한 저녁이 찾아왔다. 어스름 깔린 뒷산은 침묵 속에 잠겨들고, 성당을 끼고도는 갓길로는 철모르는 어린애들이 뛰놀다 지쳐 집으로 돌아가는 발소리가 울린다. 거친 자연석을 얼기설기 쌓아올린 담벼락에 깊은 그늘이 주름살처럼 새겨질 즈음엔, 빠알간 벽돌로 정연히 쌓아올린 종탑의 그림자가 앞마당에 길게 늘어진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뒤덮으면 지붕 위에 높이 걸린 하얀 십자가는 한순간 붉은 빛으로 타오른다. 하지만 그 불길은 다가오는 어둠을 견디지 못해 이내 고개를 수그린다. 그때서야 비로소 향기로운 가을밤이 시작되는 것이다.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매달린 성당의 머리 위로 살짜기 떠오른 초승달이 한가로이 흔들린다. 이곳에 언제부터 성당이 있었는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당이 존재하는 목적과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하지만 고즈넉한 언덕의 붉은 성당이 가을 달밤의 풍취를 더한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언덕 아래에서 위까지는 좁고 높은 계단이 이어진다. 드문드문 세워진 가로등이 발밑을 밝혀준다. 계단의 숫자는 쉰 하고도 일곱, 믿음은 물론 체력마저 요구되는 험난한 길이다. 신자가 늘어나지 않는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아무래도 요즘 사람들은 계단보다는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선호하니까 말이다.

무겁고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의자가 가지런히 놓인 예배당이 보인다. 벽의 회칠은 군데군데 떨어지고, 의자는 앉으면 삐걱대는 소리가 나고, 바닥의 타일은 빛이 바랬지만, 먼지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다. 성당 건물만큼이나 나이를 먹고, 그만큼이나 오랜 세월에 걸쳐 닦인 정면(正面)의 나무 십자가는 나뭇결 하나하나마다 휘황한 광채가 감돌 지경이다.

복도를 따라 왼쪽으로 틀어지면 작은 회의실이 나타난다. 명색은 회의실이지만 실은 휴게실이나 다름없다. 미사 직전이나 직후엔 언제나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회의실을 끼고 도는 복도 끝은 종탑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간 즈음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2층엔 여러 개의 방이 다닥다닥 줄지어 늘어섰다. 이 방들은 제각기 그 목적이 달랐는데, 하나는 직장에 간답시고 제 아이를 팽개치고 다니는 부모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선사하고 대외적인 변명거리를 마련해 주는 탁아소,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다를 떨기 위해서만 입과 혀를 놀리는 파마머리 아줌마를 위한 부녀회, 다른 하나는 십자가를 루크 스카이워커의 광선검처럼 휘둘러대는 장난꾸러기들을 합법적으로 가둬놓는 어린이방, 다른 하나는 헤비메탈과 찬송가를 구분할 줄도 모르는 음치들을 격리시켜 두는 성가대, 등등이었다. 이 방들은 전혀 상이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돼지우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너저분하다는 사실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잡다구레한 방을 무시하고 쭉 지나노라면 복도 끝에 외롭게 떨어진 방 하나가 보이는데, 그게 바로 우리 신부님의 사무실 겸 서재 겸 응접실 겸 침실이었다.

신부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무한한 충성심, 아니, 무한한 신앙심으로 무장하고 계셨으며 자신이 이끌어야 할 어린 양들에겐 끝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자신이 아낄 수 있는 건 최대한 아끼고, 그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자 삶의 보람이자 삶의 가치였다.

그런 믿음과 성격과 가치관이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에 신부님의 방은 매우 비좁고도 턱없이 허름했다. 한쪽 구석엔 매트리스 대신 통나무를 집어넣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딱딱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머리맡엔 목침이나 다름없는 베게가 굴러다녔고, 발치엔 신문지만큼이나 얇은 초록색 담요가 깔렸다.

그 옆에는 박물관 내지는 쓰레기 소각장에 보내버려야 마땅할 낡아빠진 책상이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어찌나 낡았는지, 저걸 책상이랍시고 쓰느니 야구 방망이 네 개를 세워놓고 그 위에 합판을 올려놓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맞은편으론 높고 넓은 책장 셋이 줄지어 서 있었고 여기엔 라틴어를 비롯한 온갖 언어로 씌어진 성경책과 신학 서적, SF 서적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한쪽 모서리엔 작은 싱크대(겸 세면대)와 거울, 전자레인지와 가스레인지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방 한가운데 여백을 메우듯이 들어앉은 동그란 탁자는 둘이 앉으면 꽉 차고 셋이 앉으면 비좁은 크기다. 게다가 팔이라도 기댈라치면 좌우로 기우뚱대니, 제아무리 용맹무쌍한 원탁의 기사라 할지라도 그 앞에 앉을 때는 주님의 계시를 기다리는 성 베드로처럼 경건하고 조심스런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이 좁아터진 방 안에서 신부님이 자신에게 허락한 유일한 사치는 그윽한 향내를 풍기는 녹차 한잔이었다. 그리고 신부님이 자신에게 허락한 유일한 놀이는 나와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이야기의 시작이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더운 차 반잔을 비울 무렵, 우리들 이야기의 주제는 사형 제도에 맞춰져 있었다.

"사람을 죽인 자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은, 그 어떤 미사여구를 붙인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치졸한 복수심의 표현에 다름없을 뿐이라네."

신부님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신부님이야 아무래도 사랑과 자비를 설파하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당연하리라.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길을 잃고 방황하는 불쌍하기 그지없는 어린 양이다.

"글쎄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모름지기, 한 나라를 유지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법치주의입니다. 법치주의의 근본은 공을 세운 사람에겐 그만큼의 상을 주고, 죄지은 자에겐 그만큼의 형벌을 부과하는 거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지, 치졸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반론은 먹혀들지 않았다. 신부님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물론 법이란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이성적인 논리의 결과물이지. 하지만 막상 그 논리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선, 이성적인 판단보다 감정적인 복수심과 맹목적인 잔인함이 앞서기 마련이라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언제 한번 법정에 가 보도록 하게다. 논리의 탈을 뒤집어 쓴 비논리적인 말장난들이 무성하지. 그 결과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이 무거운 형벌을 받고, 하느님한테도 용서받지 못할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이 공식적인 면죄부를 받곤 한다네. 그게 과연 합리적이라 주장할 수 있는 걸까?"

"가끔 가다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대체로, 공정한 형벌을 부과하고자 하는 노력이 승리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사형이란 형벌이 살인이란 죄에 합당한지는 지극히 의심스럽구먼."

십계명에서도 '살인하지 말라'고는 했어도 '살인하면 죽을지어다'라고 똑 부러지게 규정해 놓지 않은 걸 보면, 그건 주님께서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살인자에게 죽음을 내리지 않는 행위가 반드시 자비로움과 동의어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글쎄요, 저로서는 어두컴컴한 독방에 죽을 때까지 가둬 놓는 게 사형보다 더 잔인한 형벌이 아닐까 싶습니다."

암묵적인 동의인지 아니면 단지 할 말이 없어서인지, 신부님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신부님. 이 문제는 더 이상 법률가나 사회학자 혹은 종교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 와선 과학자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과학자라고? 그들이 뭘 한단 말인가?"

신부님의 얼굴에는 못미더운 기색이 완연했다. 합리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과학자와 신비주의적인 경향에 기울어진 종교인의 관계는 물과 기름이나 매한가지. 서로의 존재를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이 당연지사다.

하지만, 내 휴대폰의 웹브라우저에는 종교인의 뿌리 깊은 의심을 단숨에 해소시킬 수 있는 기사가 열려 있었다.

"자, 여기 오늘자 신문 국제 면을 보세요. 미국 과학자들이 비인간적인 사형 제도를 대체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발표했답니다. 뭔고 하니, 범죄자들의 인격을 개조시켜 사회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교화시키는 방법을 개발했다는군요. 이 방법을 사용하면 악몽 속에서나 나옴직한 연쇄 살인범도 천사 같은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단 말입니다."

신부님은 돋보기를 콧등에 걸치고 내가 건네준 휴대폰 화면을 열심히 바라봤다. 처음엔 진지하게,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렌즈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신부님은 휴대폰을 책상에 탁 내려놓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과학자들이란 너무나 낭만적인 인간들이야! 더군다나 미국 과학자들은 이상주의적인 낭만주의자들이지. 그들은 지나치게 과학을 숭배한 나머지 합리주의적인 태도와 낭만주의적인 열정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일세. 어떻게 한낮 기계의 힘으로 인격을 교정시킬 수 있다고 믿는단 말인가?"

"하지만 신부님, 미국 과학자들이 만든 기계는 완벽에 가까운 거랍니다. 시험 결과 범죄자들의 반사회적인 요소를 거의 백퍼센트 제거하는데 성공했다는군요."

그 순간 -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 나는 주님에게 무한한 경애와 지극한 사랑을 바쳐야 할 가톨릭 신자가 아닌, 과학 문명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과 부동(不動)의 믿음을 가진 현대인에게나 어울리는 말투를 구사했다.

신부님의 얼굴에 갑자기 짙은 그늘이 깔렸다. 그리고 뒤이은 목소리엔 보다 묵직한 진지함이 실렸다.

"분명히 기계란 땅을 파거나 굴을 뚫는 단순한 목적에는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물건일세. 하지만 자신에게 부과된 목적 이외에는 절대로 달성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품고 있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신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존재인 반면, 기계란 자신을 조종하는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지."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신부님은 주름진 손가락을 맞물러 손깍지를 끼고 그 위에 턱을 살포시 얹었다. 그리곤 눈꺼풀을 반쯤 내리깔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나직하게 뇌까렸다.

"어쩌면 그 기계는 사람의 인격을 바꾸는데 성공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 과학자들이 말하는, 사회에 순응하는 인간이란 대체 어떤 걸까? 매년, 매달, 매일 정신없이 바뀌는 법조문을 달달달 외워대는 부지런한 사람? 집안에 가만히 처박혀 텔레비전이나 보는 게으름뱅이? 아니면 논밭에 서 있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머리가 텅 빈 백치? 그건 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애매한 거라네. 결국에는 과학자들이 처리하기 쉬운 방향으로, 그리고 과학자들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새로운 인격을 구성하게 되겠지"

나는 그때까지도 신부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머리만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그게 큰 문제라도 되나요?"

"당연하지. 과학자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시켜서 해결책을 찾아내는데 능숙하지. 그들이 만들어낸 기계 역시 한정된 과제를 해결하는데 특화되어 있다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과학자란 자신의 창조물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낭만주의자고, 기계란 한 가지 이상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지극히 부적합한 물건이지. 그 때문에 과학자들은 인간이란 존재가 육신과 자아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란 사실을 망각하고, 오로지 자아를 구성하는 인격만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믿는 실수를 저지르는 거야. 어떤 의미에선 그것도 심각하기 그지없는 범죄지."

신부님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범죄라는 말은 너무 지나치지 않을까요? 어쨌건 그들은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목적이라. 그래, 히틀러도 그랬지.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맞춰 전 세계를 단순화시키려 했어. 그 결과는 틀림없는 범죄였지. 그런데 왜 과학자만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의도가 선하기 때문에? 하지만 외국엔 ‘선의(善意)만으로 포장된 길의 종착점은 지옥이다’라는 속담이 있다는 걸 아나?. 실제로 나는 이미 몇 십 년 전에 그들이 그런 실수를 저지르는 걸 목격했다네."

그리고 신부님은 자신의 젊은 날, 회의와 오욕으로 얼룩진 과거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 제 2장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젊은이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데다 제멋대로 놀아나는 시건방진 족속이다. 그것은 신학대를 갓 졸업한 20대의 신부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초적인 악덕이었다.

지금도 신부님의 체격은 훌륭하지만, 젊었을 적엔 훨씬 대단했다. 머리카락은 칠흑과도 같았고 허리는 꼿꼿하고 어깨는 단단하고 뼈는 튼튼하고 근육엔 힘이 넘쳐흘렀다. 검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면 영락없는 조폭이었지만, 신부님은 머리를 깎고 사제복을 입는 길을 선택했다.

주님께서 내리신 은혜로움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랑과 성모 마리아께서 하사하신 자비로움으로 충만해 있던 신부님의 마음은,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폭발 직전으로 내달리고 말았다.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보다 넓은 세상,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사명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신부님은 신학대 강사 자리도 거절하고 편안한 도심지의 성당에서 신부로 종사하는 일도 거절했다. 대신에 해외 전도단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의 뜻을 꺾기 위해 애썼지만 다 헛된 일이었다. 신부님은 한번 고집을 부리면 황소처럼 밀어붙이는 사람인데, 거기에 젊은 혈기가 더해졌으니 가히 불도저를 능가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훼방꾼들의 의지를 대나무 꺾듯이 깨끗이 정리해버린 신부님은 아마존 오지의 원주민이건, 아프리카의 부쉬맨이건, 캐나다 극지의 이누이트건 가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전하겠노라 굳게 다짐하셨다. 그러나 막상 신부님이 가게 된 곳은 축축한 아마존도 아니고 무더운 아프리카도 아니고 얼어붙은 북극도 아닌, 전 세계에서 제일가는 대도시 뉴욕의 번화가 한복판이었다.

도시 사람들은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카락에 기름을 덕지덕지 처발라 깨끗하게 넘겨 멋을 내며, 스스로를 문화인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품고 있는 존경심이란 아프리카 원주민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차라리 아프리카 원주민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신(神)도 평등하게 존중해주지만, 대도시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신도 평등하게 멸시하기 때문이다. 잿빛의 콘크리트 무더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은 뭐든지 살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는 녹색과 푸른색의 종잇조각 - 돈 뿐이다.

하지만 신부님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부딪히기로 결심했다. 낮에는 부호들이 경영하는 회사를 전전하며 너그러운 자비를 호소하고, 밤에는 구호소와 자선 병원을 돌아다니며 홈리스들을 상대로 은혜로운 설교를 했다. 문제는 부호들의 자선은 쥐꼬리만 하고, 홈리스의 숫자는 줄어들 줄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에 따라 전도단의 재정은 나날이 빈약해지기만 했다. 결국 신부님은 한 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보태기 위해 한 장이라도 더 많은 접시를 닦아야 할 처지로 전락했다.

신성한 노동에 따르는 극도의 피로함도 신부님의 행동력을 제한하진 못했다. 접시닦이를 하는 틈틈이 뉴욕의 뒷골목을 쏘다니며 어두운 밤거리를 방황하는 어린 양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 든 것이다. 하지만 뒷주머니에 권총을 차고 다니는 위험천만한 10대들에게 신부님의 서툰 영어가 먹혀들 리 없었다.

다행히, 주님께선 신부님을 평범한 접시닦이로 놔두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 얼마나 불편하고 불행한 일인지 잘 알고 계셨다. 고난의 강을 건너뛰어 새로운 기회로 가는 징검다리를 안배해 두셨으니 그 역할을 맡은 것은 하렘을 누비는 10대 깡패들의 두목, 부르터스였다.

부르터스는 열일곱에 불과한 꼬마였다. 그러나 키 2미터에 몸무게만 백 킬로를 넘는 흑인을 정직하게 꼬마라 부를 수야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백여 명이 넘는 부하를 거느리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 그는 하렘에서 제일가는 깡패 조직의 보스였던 것이다.

그러니만큼 신부님이 그를 다음 사냥감으로 점찍은 것은, 아니,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야 할 길 잃은 어린양이라 여긴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접시닦이가 끝나면 부리나케 하렘으로 달려가 그 언저리를 서성이며 부르터스가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길 열흘 째 되던 날, 신부님의 눈앞에 부르터스의 새빨간 12기통 무개차가 나타났다. 흰 셔츠에 붉은 양복을 걸친 부르터스는 조수석 시트에 몸을 파묻은 채 졸고 있었다. 운전석엔 험악한 인상의 부하가, 뒷자리엔 흉악한 인상의 졸개 셋이 앉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뒤따르는 2대의 무개차도 그의 패거리로 가득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얼굴과 기세만 보고서도 겁에 질려 냅다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허나 신부님은 배짱 좋게 앞으로 나가 무개차를 가로막았다. 운전수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고, 경호원들은 깜짝 놀라 권총을 꺼내들었다. 부르터스는 벌떡 일어나 두 눈을 부릅뜨고 모처럼의 단잠을 방해한 훼방꾼을 노려봤다.

“넌 뭐하는 놈이냐?”

안전장치가 풀린 권총이 자신을 겨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호 아래 신부님은 의연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자네를 바른 길로 인도하러 왔네.”

부르터스와 그 부하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들은 천주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믿지 않는 순수하고 고지식한 깡패였지만, 성직자에게 총질을 해댈 정도로 몰상식한 인간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권총을 자동차 시트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와 주먹을 휘둘렀다. 세 대의 차에서 쏟아져 나온 열네 명의 거인들 앞에서, 태권도와 특공무술로 단련된 신부님의 육체는 단순한 샌드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참을 두들겨 맞던 도중, 갑자기 사방팔방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경찰차가 쏟아져 나왔다. 수십 명의 경찰이 일제히 총구를 겨누었고 맨손의 깡패들은 힘없이 손을 들어올렸다. 하렘을 주름잡던 깡패 두목 부르터스는 쇠고랑을 찬 채 유치장으로 끌려갔고, 신부님은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갔다. 타박상을 입긴 했어도 뼈가 부러진 곳은 없었고, 워낙에 튼튼한 몸을 지녔기에 사흘도 되지 않아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었다.

아무튼 깡패 두목 앞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신부님의 모습은 그곳 경찰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경찰 서장은 주립 교도소에서 교화 프로그램을 맡을 성직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신부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하여 신부님은 뉴욕 주립 교도소에 수감된 구제불능의 죄수를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았으니, 이것이 주님의 안배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비슷한 시기, 뉴욕 시 중심가에서 한 명의 청년이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E. 데이비슨. 훤칠한 키와 근육질의 몸매,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이 돋보이는 미남자였다. 주립대학 법학과 3학년으로,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앞날이 촉망되는 학생이기도 했다. 이 매력적인 젊은이가 체포된 이유는 길거리에서 싸움질을 했기 때문이 아니고 음주운전을 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지난 3년여에 걸쳐 미국 전역에서 38명의 여인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1급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것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하듯이 살인을 행하였다. 어떨 때는 캘리포니아에서, 다른 때는 오하이오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살육의 유희를 즐겼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깨끗하게 증거를 인멸하고 완벽하게 단서를 소멸시켰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무참하게 찢겨진 희생자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주 경찰과 FBI의 체면은 나날이 우그러졌고 데이비슨의 자신감은 나날이 부풀어 올랐다.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감은 필요한 동시에 가치 있는 덕목이지만, 범죄자에겐 불필요하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조심성이 둔해지고, 마침내는 스스로를 옭아매기 때문이다. 데이비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돌변하면서 긴장감이 풀리고 느슨해지더니, 점점 실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38번째 범행에서, 그는 결정적인 단서를 남기는 실수를 저질렀다. 톱으로 잘라낸 희생자의 시신을 늪에 던져 넣을 때, 호주머니에 넣어둔 수첩을 흘린 것이다. 현장에서 발견된 수첩은 즉시 FBI에게 넘겨졌다. FBI는 수첩 표지의 뉴욕 주립대학 로고와, 안에 적힌 법학과 강의 시간표에 주목했다. 뉴욕 경찰의 협력으로 엄청난 인원을 동원해 법대 교수와 학생들을 낱낱이 조사한 결과, 데이비슨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FBI 요원과 경찰들이 출동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서둘렀다. 아니, 서툴렀다. 데이비슨은 공수도와 유도 유단자인데다 사격 실력은 저격수 뺨칠 정도였다. 헌데 FBI 요원과 경찰의 무장은 기껏해야 38구경 권총과 손목수갑뿐이었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두 명의 FBI 요원이 앞장서서 문지방을 넘었는데, 하나는 쇠몽둥이에 머리가 으깨졌고 다른 하나는 산탄총에 맞아 배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렸다. 둘 다 즉사했다. 밖에서 대기하던 세 명의 경찰도 산탄총에 맞았지만 다행히도 경미한 부상에 그쳤다. 이 일련의 난동은 그의 기소장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해 주는 동시에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FBI와 경찰은 데이비슨의 집을 수색해, 피비린내 나는 증거물을 한 무더기 이상 찾아냈다. 그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살인 과정과 뒤처리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살인 일지였다. 바람직한 삶의 방향에서 완벽하게 일탈해 버린 데이비슨의 악랄한 살인 행각은 온갖 종류의 신문과 잡지, 방송에서 낱낱이 파헤쳐졌다. 그게 어찌나 끔찍했던지, 웬만한 연쇄 살인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정도로 무뎌진 미국인들마저 분노로 치를 떨 정도였다.

이 용서받지 못할 살인자를 하루속히 처단하라는 여론에 힘입어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검사는 데이비슨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릴 것을 요구했고 배심원들은 기꺼이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불쌍한 변호사는 피고인의 정신감정을 의뢰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지만, 그마저도 판사에 의해 기각당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잡으러 온 경찰에게 총을 쐈소. 그게 충분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면 뭐겠소?"

판사의 질문에 변호사는 꿀 먹은 벙어리로 일관했다. 결국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을 내렸고 판사는 재판봉을 두들기며 사형을 언도했다. 분노한 데이비슨은 판사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이렇게 외쳤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널 지금 당장 죽여 버리겠어!"

그러나 경찰들은 지난번처럼 서툴게 행동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일제히 표범처럼 달려들어 꼼짝도 못하게 깔아뭉갠 다음, 갈짓자(之)로 꽁꽁 묶어 뉴욕 주립 교도소로 보내버렸다. 피에 굶주린 살인귀도 이제는 죽을 때만 기다리는 사형수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때는 신부님이 뉴욕 주립 교도소에서 전도 사업을 시작한지 한 달째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그러나 구제불능의 인간쓰레기들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주님의 복된 말씀을 전하는 위대한 역사(役事)에는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죄수들 대부분이 신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선천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종족이란 사실이었다. 그들에게서 존경심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무시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그나마 신앙에 관심을 가진 죄수라 할지라도 개신교나 이슬람교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이태리 촌구석에 처박힌 쭈글렁 영감탱이(교황)를 숭배하는 덜 떨어진 무리들'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교도소에 들어와 있던 부르터스는 티베트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신부님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안겨주기마저 했다.

세 번째 문제는, 신부님의 영어 실력이 과히 훌륭하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의기로운 마음이야 홀홀단신 장판벌을 누비는 조자룡 못지않건만, '주님'을 '술님'으로 발음해서야 신뢰를 얻긴커녕 비웃음만 사기 마련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죄수들에게 있어서 신부님의 존재란 찬란하게 빛나는 메시아가 아닌, 동양에서 온 재미있는 놀림거리에 불과했다. 허나 주님을 위한 봉사에는 언제나 고난이 따르는 법, 신부님은 그들의 비웃음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단지 매일 저녁 주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일 뿐이었다.

"주님, 저는 그들에게서 존경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저를 비웃어서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면, 마음껏 비웃으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돌대가리 쪽바리(Jap the blockhead)'는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전 쪽바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신부님의 인종차별적인 불평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선 아무런 응답도 해주시지 않으셨다. 침묵은 귀중한 황금, 침묵은 끝없는 인내를 뜻하는 법이다. 신부님은 주님의 뜻에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E. 데이비슨은 인내와는 거리가 먼 족속이었다. 교도소에 들어온 지 이틀 만에 사소한 시비가 붙은 같은 방 죄수를 초죽음이 될 때까지 두들겨 패고는 징벌 독방으로 내쫓겼다.

교도소장 헨리 오크먼은 즉시 이 죄수에게 주목했다. 그는 심신 곧은 장로교 신자요 이상적인 도덕주의자였기에, 데이비슨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애를 보다 값지고 보람차게 사용하길 바랬다. 싸움질로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오크먼 소장은 데이비슨을 교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종교라고 생각했다. 먼저 선택된 사람은 수많은 죄수들을 갱생시킨 - 물론 교도소장의 위세를 등에 업긴 했지만 - 장로교 목사였다.

첫 만남부터 좋지 않았다. 목사의 유창한 설교는 장로교에 대한 데이비슨의 통렬한 공박 앞에서 전혀 맥을 추지 못했다. 두 번째 만남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세 번째가 되자, 목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뒤를 이어 모르몬교 목사, 유태교 랍비, 이슬람 사제, 하다못해 티베트 불교 승려까지 동원되었지만 상황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데이비슨은 모든 종류의 신과 모든 종류의 신앙에 대해 경멸과 증오 이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은 것은 신부님뿐이었다. 영어도 서툰데다 교화 실적도 신통찮은 신부님을 내세우길 꺼려하던 오크먼 소장도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신부님. 신부님에게 어려운 일을 부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자신을 부르기만 학수고대하던 신부님이었다. 대답을 주저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오크먼 각하(Sir)!"

신부님은 좋아 죽을 지경이었겠지만 소장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정말 이 사람에게 맡겨도 괜찮을까 하는 의심은 둘째 치고,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불행히도 그의 의심과 걱정은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데이비슨과 마주보고 앉은 첫째 날, 신부님은 죄와 벌 그리고 뉘우침과 죄사함에 대하여 열띤 강론을 펼쳤다. 그것은 누구라도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열정적이고 감동적인 연설이었다. 단, '주님'을 '술님'으로 발음하는 엉터리 영어였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데이비슨은 확신어린 어조로 예수의 신성함과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것은 누구라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논리를 자랑하는 연설이었다. 단, 신부님의 영어실력은 그가 하는 말의 반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둘째 날도 신부님의 일방적인 공격이 계속되었고 셋째날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비슨은 항복을 거부하고 치열하게 응사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난 다음 얘깃거리가 먼저 떨어진 쪽은 신부님이 아니라 데이비슨이었다.

신부님은 쉬지 않고 떠들었다. 유년기 시절부터 사제 서품을 받을 때까지의 인생 역정을 장황하게 이야기하면서 믿음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강변했다. 죄지은 영혼에 대한 신학적인 고찰은 물론이고,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불교 철학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것도 죄다 엉터리 영어로.

열흘째가 되자 신부님은 '힌두교의 세계관이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라는 문제를 논하기 시작했다. 인내력의 한계를 넘어선 데이비슨은 폭발하고 말았다.

"'주님'을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하는 엉터리 신부 같으니라고!"

옆에 서 있던 간수들이 막을 틈도 없이, 그는 비호처럼 날아올랐다. 공수도와 유도로 단련된 인간흉기의 주먹이 원자폭탄처럼 쏟아질 참이었다.

하지만 신부님이 누구란 말이던가. 유년 시절엔 패싸움으로, 소년 시절엔 태권도로, 청년 시절엔 특공무술로 단련된 몸이시다. 두 주먹에는 주님의 가호가, 두 발에는 성모 마리아의 축복이, 앞이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깃들었다고 일컬어지는 분이시다. 열네 명의 거인들을 상대하긴 역부족일지도 모르지만, 1대 1의 싸움에선 시라소니나 김두한과 마찬가지로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몸이시다.

비록 신부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저항 정신을 본받아 데이비슨의 무자비한 주먹세례를 그대로 뒤집어쓸 생각이었지만, 거룩한 신앙심을 뛰어넘는 야성적인 본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했다. 즉, 신부님은 데이비슨을 향해 수소폭탄의 위력을 가진 주먹을 퍼붓고 만 것이다.

신부님이 본래의 거룩한 신앙심을 되찾고 주먹을 거뒀을 무렵에는 이미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데이비슨이 시체처럼 늘어진 뒤였다. 간수들은 수갑이나 구속복 대신 의사를 찾아야만 했다.

그날 밤, 신부님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자신의 행동을 이렇게 변명했다.

"주님, 주님께서 내려주신 발로는 길 잃은 양떼를 찾아나서야 할 것입니다. 손으로는 그들을 인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 손과 발은 갈길 몰라 헤매는 어린 양을 두들겨 패고야 말았습니다. 하지만 헤매는 정도가 심해서 늑대처럼 미쳐 날뛰는데, 양치긴들 배겨낼 도리가 있겠습니까? 같이 미쳐 날뛰는 수밖에 없지요."

불행히도 신부님은 돈 까밀로가 아니었다. 주님께선 여전히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침묵은 황금이요, 침묵은 인내요, 침묵은 형벌이다. 신부님은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응징을 가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돈 까밀로처럼 일주일간 빵과 물만 먹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물만 마시기로 결심했다. 산만한 덩치와 곰 같은 어깨와 용광로 같은 소화력을 자랑하던 젊은 날의 신부님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다음 날짜로 신부님의 별명은 '돌대가리 쪽바리'에서 '쿵후 신부(Father the Kung-Fu)'로 돌변해 있었다. 하지만 신부님은 '쿵후'가 아니라 '태권도'라고 투덜거릴 힘조차 없었다. 밥 한 톨 빵 한 조각 씹지 않고 물로 배를 채우니, 기력이 쪽 빠져나가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울 지경이었다.

교도소 내의 간수나 죄수들은 데이비슨과 신부님의 난투극을 재미있는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상적인 도덕주의자 오크먼 소장에게 있어서, 사형수가 성직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는 당장 신부님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듣기로 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신부님은 자기 스스로 짊어진 형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비실대던 참이었다. 얼굴에선 핏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두 다리는 후들대고 손끝은 사시나무 떨듯이 했다. 그것만으로도 오크먼 소장이 억측을 넘어선 오해를 하기에는 충분했다.

"신부님. 그놈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을 너무 많이 받은 모양이군요. 한 달 정도 정신과 치료를 받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부님은 변명할 틈이 없었다. 아니, 말할 힘이 없었다. 내쫓기다시피 억지 휴가를 받는 게 전부였다.

오크먼 소장은 멀리 동양에서 온 성직자를 극한의 공포로 몰아넣은 데이비슨에 대해 더 이상 추호의 동정심도 품지 않았다. 충만했던 이상과 희망은 측량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크나큰 실망과 절망만이 남았다. 그리고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방법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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