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장 -



여기서 잠시 이야기의 초점을 미 국방부 수석 연구원 얀톤 벨라스키 박사에게 맞춰보도록 하자.

그의 특이한 이름과 성은 동유럽 어딘가에 살던 할아버지가 미국에 정착하며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할아버지 고향이 파라과이라 해도 개의치 않는, 조상이니 뿌리니 하는 감상적인 단어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냉정한, 지극히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벨라스키 박사는 학문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느라 식사도 거르고 밤을 새는 생활을 반복한 나머지 위장을 망치긴 했어도 외모까지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다. 중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앞이마가 약간 벗겨진 걸 제외하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40대였다고나 할까. 다만 코 위에 비스듬히 걸친 동전 두께만한 안경이 눈길을 끄는 정도였다.

그런데 벨라스키 박사는 페르시아 만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에 사용된 1급 첨단 병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스라엘이나 대한민국, 타이완에 공급된 2선급 파괴 무기와도 관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국방부 수석 연구원이란 직함은 뭣 때문에 달고 있는지 의심할지도 모르겠다. 기실 그의 전공은 좀 색다른 분야였는데, 그건 다름 아닌 '세뇌'였다.

그는 일찍이 이 분야에 있어서 혁명적인 논문을 발표해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딴 세상 사람들이 바둑 두는 소리처럼 들리는 난해하고 고상한 학술용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논문의 요체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의 인격을 구성하는 사고 회로는 물리적인 보완을 통해 교정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의 기억이나 사고방식 전체를 바꿔치기할 수는 없겠지만,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고방식을 강제로 주입시켜 인격의 교정을 도모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처럼 훌륭한 과학자가 하필이면 세뇌라는 분야에 집착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최고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은 분야에 뛰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타인을 마음대로 조종하고자 하는 악마적인 욕심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과학자의 호기심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쪽이 마음 편할 것이다.

유일한 걸림돌은 각종 국제 조약에서 강제적인 세뇌를 엄금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법률은 인간의 욕심에 의해 깨어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조약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당대 최강의 국가, 미합중국은 자국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명분 아래 조약을 폐기처분하기로 결정했다. 적어도 미국 내에선 인권침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크고 작은 테러가 빈발하는 까닭에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 고상한 가치를 숭상하는 목소리는 오래 전에 자취를 감췄다.

얀톤 벨라스키 박사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에 기반을 둔 ‘인격 교정 기계’를 개발했다. 국방부 내의 서류에선 ‘세뇌 기계’로 통했지만,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이를 ‘미치광이 모자박사 Mad Hatter’라고 불렀다. 고전적인 전기의자에 거대한 강철 모자를 억지로 씌운 듯한 기묘한 모양새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우스꽝스런 별명이 기계의 실체였음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벨라스키 박사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잡아온 생생한 전쟁 포로를 피실험자 삼아 실험을 강행했다. 그 실험 결과는 정말이지, 충격적이고도 끔찍했다. ‘미치광이 모자박사’에 앉은 포로 중 절반 이상이 미쳐버렸다. 뇌에 가해진 자극과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죽은 사람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전기의자보다 전력소비가 월등히 높다는 약점만 없었다면 그 자리를 대체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흔히 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그러나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표현을 빌리자면 '잔인무도한 인체실험'일 뿐이었다.

불행히도 과학자라 불리는 족속은 인간의 존엄함보다 자신이 만든 기계나 이론(理論)의 존엄함을 보다 높이 치는 법이다. 얀톤 벨라스키 박사로 말하자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두철미한 과학자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세뇌 기계의 완성도가 너무나 미흡하다는 사실에는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으나, 포로들의 운명에는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피할 수 없는 희생'의 범주에 속했으며, 한 계단 올라서기 위한 발판 이상의 값어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박사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러나 포로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대다수 군 간부는 '세뇌' 연구에 은근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원체 군인이란 인간의 존엄함을 짓밟는 동시에 과학의 존귀함에 대해서도 콧방귀만 뀌는 족속이다.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적군을 붙잡아 세뇌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완벽한 넌센스나 다름없었다. 몇 푼 안 되는 총알 값만 들이면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버릴 수 있는데, 대체 뭐가 아쉽다고 비싼 돈을 퍼부어서 쓸모없는 장난감을 만든단 말인가?

실험이 실패를 거듭하고 아무 실적도 올리지 못하자, 군 간부들은 입을 모아 더 이상 한 푼도 지원해 줄 수 없노라고 선언했다. 인간의 존엄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지만 벨라스키 박사로서는 실망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완전히 낙담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쌓은 막대한 양의 실험 데이터를 꼼꼼하게 정리한 다음, 대학 연구소로 돌아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때 구원자처럼 나타난 사람이 오크먼 소장이었다.

오크먼 소장과 벨라스키 박사의 역사적인 첫 대면은 벌써 몇 달 전에 있었지만 그 만남의 경로는 확실치 않다. 오크먼 소장의 전직이 미 해병대 장교란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군에 있는 친구로부터 벨라스키 박사의 이름을 들었을 수도 있다. 어느 나라건 군사 기밀을 보호하기 위해 소형 카메라와 도청기를 비롯한 각종 전자 장비를 동원하며 안간힘을 쓰지만, 인간끼리의 만남에서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뚜렷한 근거도 없이 미국 군인들의 정보관리 능력을 의심할 이유는 없으니 이 가능성은 제외하도록 하겠다.

대학 관계자로부터 '미치광이 모자박사'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당시 벨라스키 박사의 '세뇌 기계'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어리석고 멍청한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완벽하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벨라스키 박사의 연구는 버림받은 사생아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 가능성도 부인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벨라스키 박사가 오크먼 소장을 찾아 나섰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는 새로운 실험대상으로 죄수를 점찍은 지 오래였으며 여러 경로를 통해 대형 교도소와 접촉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전시에만 수급이 가능한 전쟁 포로와는 달리 평시에도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죄수들의 인격교정을 통한 사회복구 프로그램이 대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죄수들이나 인권 단체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둘의 첫 만남은 결코 긍정적이지도 않았으며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벨라스키 박사는 인간적인 호감이라곤 조금도 갖추지 못한 딱딱한 기계의 화신이요, 총화와도 같았다. 말하자면 생각하는 기계에 가까웠다.

박사가 강변하는 인격 개조 실험의 당위성과 필요성은, 오크먼 소장에겐 웅대한 헛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죄수 중에서 실험 대상을 찾는다는 대목에 다다르자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오크먼 소장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리를 피한 뒤, 남아있는 희미한 인상마저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자 애썼다.

허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오크먼 소장은 파우스트 박사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데이비슨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겠노라 각오하고 있었으며, 벨라스키 박사는 그의 메피스토펠레스로써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변심한 천사와 타고난 악마는 굳게 손잡았다.

둘의 콤비 플레이는 환상적이었다. 오크먼 소장은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정치권에 다리를 놓았고, 벨라스키 박사는 그들을 설득하는 일을 맡았다. 벨라스키 박사는 크롬 합금처럼 번쩍이는 눈빛과 듀랄루민처럼 차가운 말투를 십분 활용, 보수적인 정치가들에게 믿음직한 과학자로 비춰지는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둘이 공동으로 제안한 '효과적으로 죄수를 개심(改心)시킬 수 있는 기계적인 인격 교정 실험' 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벨라스키 박사는 '위험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인체실험'이란 말은 전혀 입에 담지 않았다. 대신에 '안전성이 이미 입증된 효과적인 인격 재형성 실험'이란 표현을 즐겨 썼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안전성을 입증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선 ‘국가기밀’ 내지는 ‘군사기밀’이란 편리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관료와 정치가, 오크먼 소장과 벨라스키 박사는 한 달 내내 지루한 논의를 계속했다. 인체실험이라는 민감하고 위험한 문제를 다루니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노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본디 정치가와 관료란 1시간 걸릴 일을 하루 걸려 하는데 능숙한 족속 아니던가. 그들이 딱 부러지게 일을 처리했다면 일주일 이상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건 정부는 '벨라스키 박사의 [세뇌기계]를 이용한 인격 재형성 실험'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횟수는 단 한번, 그것도 사형집행이 확정된 죄수를 대상으로 제한한 비공개 실험이었으며 추가 실험에 대해서는 결과를 봐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부담스런 여론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벨라스키 박사로서는 실망스러운 결과였지만 오크먼 소장은 이 정도로도 흡족해 했다. 첫 번째 실험은 뉴욕 주립 교도소에서 시행될 예정이었고 시험 대상의 선발권은 오크먼 소장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소장은 당연히 데이비슨을 실험대상으로 선택했다. 그는 데이비슨 자신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상관없이 어떻게든 실험을 강행할 속셈이었다.

------------------------------------------------------------------------------------------------

그 즈음 신부님은 어거지로 주어진 휴가를 끝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쌍한 어린 양들을 교화시키는 사업에 복귀하려 했다.

많은 죄수들에게 있어서 '신부님의 귀환 Return of Father (the kungfu)'은 큰 화제 거리였다. 비록 데이비슨을 깨부수긴 했지만 자신의 수양이 부족함을 깨닫고 고향 땅에서 재차 수련을 하고 돌아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소문이 어찌나 그럴싸했던지, 주먹깨나 쓴다는 죄수들조차 신부님 문하에 허리 굽혀 들어가길 심각하게 고려할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임시 실험실로 선택된 지하창고에선 매일같이 대규모 공사가 벌어졌다. 트럭이 부려놓은 복잡한 부속품이 하나 둘 조립되며 ‘미치광이 모자박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어느 새인가, 죄수들 사이에선 '쿵후 신부'의 소문이 가라앉고 이 괴상한 기계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0.1초 만에 사형수의 머리를 구워버리는 신형 전기의자라는 이야기부터 10초 만에 모든 죄를 자백하게 만드는 최신식 고문기계라는 이야기까지, 실로 다양한 말이 오갔다. 신부님은 여기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성직자의 본분은 영혼을 구제하는 일이지 기계를 분석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이 기계의 정체를 밝혀낸 죄수는 다름 아닌 부르터스였다. 그는 티베트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마음을 깨끗하게 고쳐먹고 출옥 후에는 승려가 되기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덩달아 행동거지가 얌전해져 감옥 제일의 모범수로 뽑혔기에, 실험실 공사장에서 잡역부로 일하게 되었다. 그것은 죄수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었다. 왜냐하면 일도 편하고 자유시간도 넉넉했기 때문이다.

실험실의 연구원들은 죄수들 앞에서 기계의 정체를 대놓고 떠드는 경솔한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다만 무심결에 단편적인 정보를 흘렸을 뿐이다. 다른 죄수들은 그걸 한귀로 흘려버렸지만, 부르터스는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뒀다가 직소 퍼즐 맞추듯이 취합하여 ‘미치광이 모자박사‘의 정체를 밝혀냈다. 그가 알아낸 사실은 소문이라는 바람을 타고 감옥 안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 기계의 정체를 알게 된 신부님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자신의 사업 영역을 침해하기 때문이 아니다. 신성모독적인 행위였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인간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신부님은 불붙은 증기기관차가 되어 소장실을 향해 줄달음질쳤다.

"대체 저 '빌어먹을 기계'로 뭘 할 생각입니까?"

소장실에 있던 오크먼 소장과 벨라스키 박사는 갑작스런 신부님의 방문에도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언젠가는 찾아오리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명 높은 동시에 신성하기 그지없는 신부님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져 있었으니, 오크먼 소장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벨라스키 박사로 말하자면 신부님의 주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기에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부님. 저는 얀톤 벨라스키 박사라고 합니다. 제가 그 '빌어먹을 기계'의 책임자입니다."

신부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기본적인 예의마저 무시할 수야 없었다. 내키지 않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눴지만 본능적인 적대감을 감추지 못해 80킬로그램이 넘는 무지막지한 악력(握力)을 순간적으로 폭발시키고 말았다. 그 결과, 벨라스키 박사의 얼굴은 말똥 씹은 사람마냥 형편없이 구겨지고 말았다.

"그래, 당신이 저 기계를 만들었다고? 대체 저걸로 뭘 할 속셈이오?"

보통 사람이라면 신부님의 뜨거운 손길과 불타는 눈빛 앞에 오금이 저려 주저앉는 게 고작이겠지만 벨라스키 박사는 아무리 급박한 상황도 냉철하게 분석하는 능력을 가진 진정한 과학자였다. 그는 먼저 신부님의 강건한 손아귀에서 벗어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그 다음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태연한 낯빛으로 이렇게 답했다.

"물론 실험을 할 생각입니다."

"인체 실험을 하겠다 그거요?"

"인체 실험이 아닙니다. 인격 재형성 실험입니다. 이건 신부님의 사업 영역하고는 전혀 다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뭐가 어쩌고 저째? 사업? 내가 무슨 장사꾼인 줄 아는 거요?"

신부님의 얼굴이 시뻘개졌고, 공기 중엔 험악함이 감돌았다. 오크먼 소장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신부님. 이 실험은 연방 의회에서도 승인한 겁니다. 신부님이 뭐라고 한들 예정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와 벨라스키 박사에겐 지금 당장 논의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러니 이만 자리를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그가 말을 끝내며 손가락을 튕기자 여러 명의 간수들이 몰려와 신부님을 에워쌌다. 노골적인 위협과 정중한 명령, 신부님은 부당한 위협에는 물러서지 않지만 정당한 명령은 거역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 질문을 던지는 건 잊지 않았다.

"소장님. 대체 어떤 사람을 제물로 희생시킬 작정입니까?"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매몰찬 답변이 신부님의 등 뒤에 화살처럼 꽂혔다. 그날 이후 오크먼 소장은 신부님의 면담 요청을 거절로 일관해 버리는 한편, 실험이 끝날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신부님에게 24시간 감시를 붙였다. 이제 신부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주님께 기도하는 일 뿐이었다.

"주님, 저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려 주십시오.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은 신부님의 애타는 요청을 못 들은 척하셨다. 침묵은 황금이요, 침묵은 인내요, 침묵은 형벌이요, 침묵은 고통이다. 신부님은 자신의 힘없음을 한탄하다 몸져누웠다. 뭘 모르는 사람들은 신부님의 병을 단순한 환절기 독감이라 했지만 천만의 말씀, 그것은 깊은 고뇌를 짊어진 사람의 영혼을 파먹는 사악한 어둠의 그림자였으리라.

--------------------------------------------------------------------------------------------

이제 오크먼 소장과 벨라스키 박사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미치광이 모자박사'는 성공리에 조립되어 시험 가동까지 마쳤다. 실험이 실패해 봤자 전기값 외엔 아까울 게 하나도 없는 '미치광이 살인마' 데이비슨은 철통같은 감시 아래 독방에 갇혔다. 그를 면회하러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외로움을 타지 않았다. 완벽한 고독을 즐기며, 자신이 죽인 여인들을 회상하며, 은근히 미소를 짓기마저 했다.

그 사악한 미소는 오래가지 못할 처지였다. 무정한 시간이 쉼 없이 흘러 마침내 운명의 그날이 찾아왔다. 그날, 생기 없는 어둠에 휩싸인 하늘엔 악마가 노래하는 불길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 는 상투적인 문구를 동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신선한 가을 냄새 완연한 맑은 하늘 아래 따스한 햇볕이 가득했다.

그러나 뼛속까지 파고드는 차갑고 축축한 어둠에 뒤덮인 실험실에는 단 한 점의 따스함도 스며들지 않았다. 썩은 계란 냄새를 떠올리게 하는 악취와 정유공장을 방불케 하는 기름내가 코를 찔렀다. 지옥의 마왕에게 어울림직한 의자처럼 보이는 육중한 기계에선 귀에 거슬리는 고주파 음이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그건 정말이지, 철지난 고딕 호러 영화나 냉소적인 패러디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비극적인 분위기가 지나친 나머지 장식적인 코미디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것은 이 실험의 목적이나 의도를 전혀 모르는 데이비슨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그는 실험실에 첫 발을 들이미는 순간 폭소를 터뜨리며 이렇게 외쳤다.

"이 웃기지도 않는 것들은 대체 다 뭐야?"

하지만 벨라스키 박사는 데이비슨의 뒤틀린 유머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날카롭게 비판하는 쪽을 택했다.

"실컷 웃어대고선 '웃기지도 않는 것'이라고 매도하다니, 자네의 정신구조는 매우 비논리적이군."

만일 구속복을 입지 않았다면, 간수들이 옆구리를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데이비슨은 그 위력적인 주먹을 휘둘러 벨라스키 박사를 폴란드(어쩌면 헝가리나 벨로루시일지도 모른다)까지 날려버렸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데이비슨은 이렇게 빈정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 시건방진 안경잡이는 어디서 굴러들어온 놈이야?"

벨라스키 박사는 자신의 소중한 두뇌를 논리적 사고에만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모욕적인 언사에 일일이 응대하며 귀한 뇌세포를 허비하느니 차라리 무시하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오크먼 소장은 이런 모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다 해두게. 어차피 자네는 더 이상 자네일 수가 없을 테니까."

그 대부분을 사악한 악업을 구상하고 실행하는데 바쳤으나, 타인보다 월등한 영민함을 타고난 데이비슨조차 이 애매모호한 말에 숨겨진 뜻을 단박에 이해하진 못했다. 벨라스키 박사는 이 어리석은 희생양에게 닥쳐올 운명을 보다 확실하게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데이비슨, 자네는 곧 이 기계 안에 들어갈 걸세. 우린 자네가 가지고 있는 범죄적인 인격을 억제하고, 법률적으로 지극히 올바른 인격을 주입할 예정이라네. 성공한다면 자네는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겠지."

이렇게 알아듣기 쉬운 설명 덕분에 데이비슨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두뇌의 판단에 따른 필연적인 반작용은 격렬한 몸부림으로 표현되었으나, 번데기처럼 꿰인 몸이 맘먹은 대로 움직여 줄 리 없었다. 어거지로 '세뇌 기계'에 앉혀진 데이비슨의 손목과 팔목엔 두터운 강철 팔찌가 채워졌고 허리와 어깨엔 단단한 가죽 벨트가 조여졌다. 이제 데이비슨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곤 혓바닥뿐이었다.

"이 나쁜 놈들, 내 머리는 내거야! 아무도 어쩌지 못한다고!"

"자네 머리에 물리적인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네. 실험이 실패한다면 어쩔 수 없이 해부해야겠지만 말이야."

벨라스키 박사의 지시에 따라, 조수들이 튀어나와 데이비슨에게 여러 방의 주사를 놓았다. 진정제, 마취제, 기타 등등의 약물 세례를 받은 데이비슨은 혓바닥을 움직일 기력마저 잃어버릴 지경이었지만, 자신의 대학 전공 분야를 써먹을 수 있는 최후의 기회마저 놓치진 않았다.

"법률적으로 볼 때 내가 동의하지 않는 한 이 실험은 불법이야!"

"자넨 이미 동의했어."

오크먼 소장은 그의 눈앞에 한 장의 서류를 들이밀었다. 맨 아래쪽엔 데이비슨의 시원시원한 서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서명을 교묘하게 모방했다는 사실에, 데이비슨은 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빨을 갈며 화를 냈다.

"서명 따위는 누구라도 위조할 수 있어."

"딴은 그렇군. 말 나온 김에 확실한 증거도 남겨야겠어."

소장이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튕기자 옆에 있던 간수가 잉크통을 꺼냈다. 그들은 데이비슨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잉크를 묻혀 서명 옆에 지장(指章)을 찍었다. 이미 데이비슨은 입술도 벙긋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 눈빛마저 흐릿해졌다. 몽롱해지는 의식 너머로, 오크먼 소장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부디 실험이 성공하길 빌겠네. 실패할 경우엔 살아남기 힘드니까 말일세."

데이비슨의 고개가 푹 꺾어졌다. 조수들은 그의 목과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복잡한 전선이 매달린 반구형의 헬멧을 씌웠다. 간단한 조정을 마친 다음, 스위치를 누르고 물러서자 거대한 강철 '모자'가 무시무시한 모터 소리를 동반하며 내려와 데이비슨의 전신을 덮었다.

만면에 미소를 띈 벨라스키 박사가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프로메테우스의 횃불과 프랑켄슈타인의 전기를 방불케 하는 황홀하면서도 사악한 악마의 불꽃이 실험실 안을 뒤덮었고 절망과 공포로 가득한 울부짖음이 귀를 찢어댔다 - 라는 상투적인 묘사를 써먹고 싶은 마음이야 하늘을 찌르건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란한 모터 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조용해졌으며, 이후로는 나지막한 펌프 소리와 귓전을 은은히 찌르는 고주파 음이 간헐적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쓸쓸하고 짙푸른 어둠이 짓누르는 실험실엔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초조한 눈빛이 촛불처럼 어른거렸다.



- 제 4장 -



놀랍게도 실험은 성공했다.

가장 놀란 사람은 벨라스키 박사였다. 여태까지의 실험 데이터를 볼 때 성공의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으니까.

두 번째로 놀란 사람은 오크먼 소장이었다. 그는 이 기계를 전기의자와 거의 동일한 물건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공평하게 놀랐다. 그 기계에서 걸어 나온 데이비슨은 완전히 딴사람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희대의 살인마, 잔인무도한 살육자, 피에 굶주린 색정광, 아름다운 선홍빛으로 빛나는 유혈의 찬사를 홀로 받았던 데이비슨. 어떠한 종교의 힘으로도, 어떠한 신의 이름으로도 꺾이지 않는 강철 같은 심지를 가진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고집불통 데이비슨. 그는 이제 한 떨기 백합꽃마냥 청순하고 가련하고 순진한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누가 뭐래도 이것은 과학의 승리라는 말을 붙이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어 보였다. 허나 빛나는 승리의 뒷면에는 그늘진 어둠이 있기 마련, 이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데이비슨은 법률의 엄숙함과 생명의 고귀함을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강제로 깨달았다. 그에게 입력된 논리는 원자시계와 마찬가지로 조그만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이 저질렀던 사악하고 끔찍한 범죄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 혼란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저지른 죄를 부인하고자 애썼다. 자신이 그런 짓을 했을 리 없노라고 몇 십번이고 몇 백번이고 되뇌었다. 허나 이런 식의 자기 최면은 조금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최면술사가 아니었으니까.

결국 그 모든 죄를 자신이 저질렀다고 이성적으로 납득해야만 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배운 법률 지식을 동원하여 가장 이상적인 속죄의 방법을 찾았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사형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처형시키기로, 다시 말해,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교도소는 죄수를 가두고 사형시키는 곳이긴 하되, 그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는 곳은 아니다. 좁다구리한 감방부터 넓은 운동장에 이르기까지, 끝이 뾰족한 것이라곤 이쑤시개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살인의 유희로 단련된 영민한 두뇌는 어렵잖게 해결책을 찾아냈다.

첫 번째로 선택된 것은 식사용 포크였다. 죄수들이 흉기로 쓰지 못하도록 날을 뭉툭하게 만든 특제품이었지만 그 정도야 약간의 창의력만 발휘하면 쉽게 풀릴 문제였다. 데이비슨은 식당에서 포크를 하나 훔쳐 운동장에서 주워온 조약돌을 숫돌 삼아 끈질기게 날을 갈아댔다. 하지만 너무 지나친 열의를 발휘한 나머지, 한밤중에도 날을 갈다 간수에게 들키고 말았다. 완성을 목전에 둔 흉기를 허무하게 빼앗기는 바람에 허탈감에 빠지는 것도 잠시, 그는 곧장 다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두 번째로는 구두끈과 쇠창살을 선택했다. 세탁소에서 하나 둘씩 슬쩍한 구두끈을 일자매듭으로 묶어 길게 연결하니 목을 매기엔 충분한 길이였다. 햇볕이 들어오는 조그만 창문에 박힌 쇠창살은 목을 매달기에 딱 좋은 높이에 있었다. 그러나 운동화 끈은 그의 중량을 지탱하기엔 너무 약했기에, 미처 숨이 넘어가기도 전에 끊어져 버렸다.

세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았다. 즉, 단식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벨라스키 박사도 오크먼 소장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벨라스키 박사는 최초의 성공 사례를 보다 오랫동안 관찰하길 원하는 과학자였고, 오크먼 소장은 일개 죄수가 사사로이 법을 집행하도록 놔둘 수 없는 입장에 선 공무원이었다. 그들은 데이비슨의 입에 강제로 튜브를 끼워 유동식을 공급했다.

한동안 지독한 독감, 아니,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다 겨우 회복한 신부님은 벨라스키 박사와 그의 기계에 대해 종전의 무례한 태도를 일부분이나마 철회했다. 새로 태어나다시피 한 데이비슨의 행동거지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거니와, 이 엄연한 과학의 승리를 섣불리 비판하다 지동설을 제창한 갈릴레이를 단죄한 교황청의 어리석음을 재현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데이비슨이 입에 튜브를 문 채 하루하루 연명한다는 소식은 신부님의 머릿속에 한줄기 강렬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인간이 타고난 자비심의 발로였으며, 옳은 일을 하라는 신의 명령이기도 했다.

신부님은 인간의 명령이 아닌 신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자 한 마리 코뿔소가 되어 소장실로 쳐들어갔다. 놀랍게도 오크먼 소장은 신부님의 면담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데이비슨의 잇단 자살 시도는 그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교도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책임은 최종적으로 교도소장이 짊어지는 법이니까.

"신부님, 부디 데이비슨을 설득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가 자살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안 그래도 내가 그 일을 하려던 참입니다. 당장 데이비슨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오크먼 소장에 대한 존경심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신부님의 말투는 퉁명스러운데다 거만하기마저 했다. 하지만 소장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당장 면회 허가를 내려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예상보다 쉽게 달성한 신부님은 곧장 데이비슨이 수감된 특별 별동으로 줄달음질쳤다.

"대체 자네는 무엇 때문에 귀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으려 하는가? 그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알고는 있는 건가?"

거지반 시체나 다름없는 데이비슨을 앞에 두고, 신부님은 한바탕 큰소리를 질렀다. 데이비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에서 식도까지 직결되는 투명 튜브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하려면 튜브를 뽑아내야 했지만 담당의사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신부님의 정중한 청탁을 거절하는 인간이야 흔히 있겠지만 주먹을 동원한 장중한 위협마저 거부하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결국 담당의는 '신부님이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튜브를 뽑는데 동의하고 말았다.

"신부님, 당신께서는 왜 저처럼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놈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초췌한 몰골의 데이비슨은 눈을 내리깐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신부님은 하늘을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살아갈 가치가 있고 없고는 인간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그건 오로지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만이 결정할 수 있다네!"

죄인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진한 감동, 눈물은 깊은 깨달음이다. 그는 영광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기로 했다.

데이비슨이 단식을 중단하고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신부님은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진정한 신자가 되는 첫 걸음으로써, 자신이 지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며 참회하도록 했다.

“여태까지 지은 죄를 모두 고백하고 진정으로 참회하는 것은 신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아주 중요한 일이라네. 후회할 줄 모르는 것은 인간이 아닌 짐승뿐이니까 말이야.”

한때 짐승이었으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데이비슨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만,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게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최선을 다해 고백하고 싶으니까요.”

신부님은 선뜻 그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래서 데이비슨은 그가 저지른 살인죄를 고백하기 위해 2주에 걸쳐 자료를 준비했다. 든든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그는 살인 기획에서 실행 및 은폐에 이르기까지 아주 상세하게 고백했다. 38명의 여인과 2명의 경찰을 살해한 죄를 참회하는 데는 하루 여덟 시간씩 해서 꼬박 스무날이 걸렸다. 범인 스스로의 진솔한 고백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적나라한 세부 묘사 덕분에, 신부님은 하루 두 번 이상 구역질을 해댔다.

다음 순서로는 그가 저지른 소소한 범죄에 관해서였다. 인간은 모두 잠재적인 범죄자란 말이 있듯이 우리 모두는 법률의 테두리에서 조금씩 벗어나곤 한다. 천성적으로 범죄자의 피를 타고난 데이비슨의 경우는 보통 사람보다 그런 경우가 더 많았기에, 4살 때 길거리에서 노상 방뇨를 한 사실부터 재작년 9월에 주차 위반을 했다는 사실까지 고백하는데 하루 여덟 시간씩 해서 무려 한 달이나 걸렸다. 어찌나 지루하던지 듣다가 지친 신부님이 고개를 꾸벅이며 졸 정도였다.

마지막은 그가 저지른 시시한 죄악들이 장식했다. 이를테면 어머니한테 거짓말을 했다거나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둥 굳이 참회할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데이비슨은 천부적인 기억력을 발휘해 이 모든 죄악을 하나 빠짐없이 토해냈다. 9살 때 아버지 신발에 매직으로 낙서를 했다는 부분에 이르러선 신부님마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해야만 했다.

"여보게, 데이비슨. 철이 들기 전의 죄는 굳이 참회하지 않더라도 지혜로운 주님께서 알아서 용서해 주실 거라네. 그러니 제발 그만 좀 해주겠나?"

참회는 중단되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하루 여덟 시간씩 해서 무려 열닷새나 걸렸다. 그가 기억의 한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면 얼마나 길어졌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길고도 장황한 참회와 뜨겁고 열성적인 기도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슨의 마음이 조금도 평화롭지 못했다는 사실, 안정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데이비슨은 자신의 괴로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신부님. 전 지금 신부님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주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제가 아닌, 과거의 제가 저지른 범죄들이죠. 저는 그 죄악의 무거움을 인정하기 때문에 제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기도 했죠. 그러나 실제로 죄책감을 느끼지는 못 합니다...... 제 머릿속에 입력된 그 무시무시한 죄과의 기록은 다른 사람이 쓴 범죄소설처럼 낯설기만 합니다. 저하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로 여겨지죠. 그래서 저는 혼란스럽고,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신부님은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는 느낌이었다. 데이비슨은 고액 과외를 받아 문제를 푸는 방법은 알아도 푸는 과정은 모르는 학생과도 같았다. 급격하게 사고 회로가 변경되면서 악마에서 천사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지난 과거와는 급격하게 단절되고 말았다. 순수한 영혼의 목소리를 망각해 버렸다.

그는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기억 속에 각인된 과거의 범죄를 자신의 행동으로 인정했다. 그래서 자신이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현재의 자신을 죽이는 일을 서슴없이 행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자신을 전혀 다른 객체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 범죄에 대한 죄책감을 전혀 가질 수가 없었다. 자신의 죄의 무거움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영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한 모순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아주 조금씩 깨달음을 얻어 진정한 참회의 길로 들어선 사람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모순이었다. 이 논리의 모순, 영적인 모순을 풀기 위해선 기적의 힘이 필요했다.

앙굴리마알라의 전생(前生)의 업(業)을 몇 구의 게송으로 풀어낸 부처님의 기적이 신부님에게서 되풀이되기란 불가능했다. 주님께선 신부님의 주먹에는 풍성한 은혜를 베푸셨으나 영적인 능력에는 대단히 야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을 몰라 방황하는 어린 양을 황야에 팽개쳐둔다면 어찌 주님의 성실한 목자라 하겠는가. 신부님은 최선을 다해 데이비슨을 바른 길로 이끌고자 했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이성의 틀을 벗어나 지난 과거와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연결하는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했다.

하지만 데이비슨은 미래를 약속할 수 없었다. 사형 날짜가 불과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신부님은 형 집행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주지사에겐 청원서를 보내고 신문사에 찾아가 열변을 토하고 법정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그 때만큼 신부님이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낀 적은 없었다.

-------------------------------------------------------------------------------------------------

사형이 집행되던 날은 쓸쓸한 하늘에 가랑비만 처덕처덕 내렸다 - 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쓰고 싶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맑은 하늘에는 동그란 태양이 올라탔다. 쌀쌀하긴 하되 지나치게 춥지 않은, 겨울답지 않은 화창함과 따스함이 어우러진 날씨였다.

훈훈한 고기압이 세상을 지배했건만 교도소 안팎엔 차디찬 저기압이 감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날 누군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그가 죽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담장 바깥에선 사형을 축하하는 대규모의 인파가 모여들어 환호성을 질러대고, 다른 편에선 소규모의 사형 폐지론자들이 야유를 보내는 촌극이 이어졌다. 안에 있는 간수들은 경계했고 죄수들은 동정했다.

신부님은 데이비슨과 함께 기도했다.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쉬지 않고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께선 아무런 응답도 없으셨다. 침묵은 황금이요, 침묵은 인내요, 침묵은 형벌이요, 침묵은 고통이요, 침묵은... 죽음이다. 어느새 형이 집행될 시간이었다.

구원을 갈구하는 열성적인 기도와 마지막 고해성사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슨의 마음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육신이 사라짐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신부님. 저는 주님 앞에서 제가 지은 죄를 참회했습니다. 주님께 제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은 것 같지도 않은 죄들을 교과서 읽어대듯 하고, 제 영혼이라 믿어지지도 않는 영혼의 구원을 갈구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신부님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한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달래야 하는가, 대체 어떤 위로를 해줘야 한단 말인가?

"주님을 의심하지 말게나.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주님께선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해 주신다네."

데이비슨이 그 순진한 답변을 곧이곧대로 믿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간수들에게 양팔을 붙들려 나가는 순간까지도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신부님은 그 뒤를 따르며 기도문을 낭독했다. 어지럽고 혼란스런 마음을 가누지 못한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강당만한 크기의 처형실 안에는 한줄기 푸르른 조명이 비스듬히 내리비쳤다. 가운데 놓인 투명한 유리 상자는 그 불빛을 받아 하늘빛으로 물들었고, 안에 놓인 철제 의자는 옥색으로 빛났다. 심장을 정지시키고 숨을 끊어놓는 불투명한 가스로 가득 찰 유리 상자를 보면서, 신부님은 두려움이란 감정에 휩싸였다. 참관석에 앉아 있던 오크먼 소장을 보는 순간, 분노라는 감정이 들끓었다. 신부님은 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거친 비난을 퍼부었다.

"소장님. 당신과 벨라스키 박사는 데이비슨의 머릿속을 제멋대로 휘저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선 죽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게 과연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정녕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랄한 야유에 오크먼 소장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허나 그의 도덕주의는 신의 말씀보다 인간의 법률에 우선하고 있었고, 그의 직위는 법률이라는 썩은 시체에 의지하고 있었다.  

"신부님. 그는 죽어야 합니다. 법이 그렇게 명령하고 있으니까요."

"그 잘나빠진 법! 당신은 인간이 만든 허울좋은 법을 방패삼아 데이비슨을 농락했습니다. 법적으로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모든 구원의 가능성을 박탈해 버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까?"

지옥의 유황불처럼 쏟아지는 뜨거운 질책 앞에서 그 누가 감히 입을 열 수 있으랴. 오크먼소장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이제 됐습니다, 신부님. 저는 제 영혼이 구원받으리란 희망을 품지는 못하지만 만족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일 겁니다. 저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니까요."

철제 의자에 팔다리가 묶여 최후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건만, 데이비슨은 의외로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자세에선 영적으로는 구원받지 못할지라도 법적으로나마 당당하게 죗값을 치루겠노라는 의연함이 엿보였다.

분노는 연민으로 뒤바뀌었고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횡경막을 자극하는 슬픔이 솟아나왔다. 그러나 신부님은 주님의 말씀을 받드는 사람으로서 법을 받드는 사람만큼이나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애써 슬픔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대의 모든 죄를 사하노라. 주님께서 부디 자네의 영혼을 받아들여 주시길..."

이제 신부님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남아있지 않았다. 가련한 영혼이 이승을 하직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하는 - 가장 괴로운 의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간수들은 오크먼 소장의 신호에 맞춰 유리상자의 문을 닫고 스위치를 눌렀다. 하얗고, 불투명한 가스가 바닥에서 스멀스멀 새어나와 기어올라 데이비슨의 발을, 허리를, 어깨를 휘감았다. 그리고 가볍게 미소 지은 얼굴을 뒤덮고, 상자 안을 완전히 흰색으로 물들였다.

거기서 신부님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한 영혼을 구제하지 못했다는 절망감 때문에. 그리고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한 인간의 죽음을 목도하는 참담함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절망, 절망, 숨 막히는 중압감이 목덜미를 짓눌렀다. 들리지 않아야 할 비명소리가 귓전을 멤돌았다. 신부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장소를 도망치듯이 떠났다. 그리고 육중한 철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신부님은 문설주에 기대어 숨을 헐떡거렸다. 혼란에 빠진 시선은 한참 동안 맑은 하늘의 여기저기를 헤메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신부님?"

바로 옆에서 들리는 건조한 목소리, 그 주인공은 얀톤 벨라스키 박사였다.

그는 자신의 조수들과 함께 교도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비슨의 시체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의 머리통을 세포 단위로 낱낱이 해부해 보기 위해서.

신부님은 고개를 돌려 벨라스키 박사를 바라봤다. 박사의 눈동자는, 썩은 시체에 달려드는 독수리의 눈동자처럼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벨라스키 박사. 당신은 그 불쌍한 사람의 머릿속을 완전히 망쳐놓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그 속까지 뜯어봐야 직성이 풀리겠습니까?"

노골적인 혐오감이 섞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벨라스키 박사의 냉철한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에 기초했다. 데이비슨의 인격 개조 실험은 과학적으로 완벽한 성공이었으며, 그의 머리를 해부해서 결과를 확인하는 것 또한 과학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제 기계는 데이비슨의 인격을 훌륭하게 교정시켰습니다. 망쳐놓았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게다가 저는 실험 책임자로서 그의 뇌를 들여다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로써 보다 많은 데이터를 축적한다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면, 우리 인류의 발전을 위해 크나큰 한 걸음이 될 겁니다."

"크나큰 한 걸음? 지금 달나라에 간 줄로 착각하는 모양이군요! 당신이 만든 그 미치광이 기계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고방식만 조금 바꿔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자신의 과거마저 부인하는 다중인격자를 만들어냈고, 고귀한 영혼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넋 나간 인간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기계는 죄지은 자를 갱생시키기는커녕 그 어떤 영적인 구원도 약속되지 않는 고통의 수렁 속으로 몰아넣을 뿐이란 말입니다!"

신부님은 울부짖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 필사적인 호소도 벨라스키 박사에게는 비웃음거리에 불과했다.

"영혼에 대한 문제는 제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군요. 전에도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다루는 영역은 신부님의 사업 영역하고는 전혀 다르답니다."

쌓일 만큼 쌓인 신부님의 분노는 한계 수위를 넘어섰다. 신부님의 오른손 주먹에는 불경한 과학자에 대한 주님의 노여움과, 신앙을 비웃는 독설가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노여움과, 버림받은 영혼을 만들어낸 파괴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노여움이 실렸다.

그리고 그 모든 노여움이 응축된 주먹은 크루즈 미사일이 되어 날아갔다!

불과 눈 한번 깜짝할 사이, 수십 발의 주먹이 목표물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박사의 몸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맹렬한 속도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노여움이 끝난 뒤엔 슬픔이 오는 법,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누지 못한 신부님은 그대로 꿇어앉아 두 손을 모으며 목매인 목소리로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지금 당신 곁으로 갈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 주소서. 구원해 주소서!"

어디선가, 아주 먼 어디선가 아련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것은 오랜 침묵을 깨고 신부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주님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 끝 -

profile
전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for peace and freedom of world!
영광된 내일을 위하여!   for glorious tomorrow!
해피 키보딩딩!!!  Happy Keyboardingding!!!

 - DJ.H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