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보이>>

*

'관문'에서의 사고 이후로, 엘리베이터 공단은 투자자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안전이란 덕목에 집요하게 매달려 온갖 대책을 발표하고 빠짐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리하여 우주 정거장은 온갖 안전 대책의 집결지가 되었다.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 엘리베이터 통로에도 추가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지상과 우주에서 나일론 양말을 쥐어짜듯이 힘껏 잡아당긴, 엄청나게 질기고 단단한 금속성 탄소 나노튜브 케이블의 집합체가 통로 외벽이었다. 그런데 나일론 양말은 제아무리 비틀고 당겨도 끄떡없이 버티지만 막상 신고 다니면 며칠 가지 않아 발가락과 뒤꿈치에 구멍이 뚫리기 십상이다. 마찰열로 나일론이 약해지고 녹아서 끊어지기 때문이다.

탄소 나노튜브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의 불빛에 점화되리만치 민감한데다 열전도율이 대단히 높아서 작은 불길이 순식간에 대형 화재로 번질 수 있었다. 외벽에 두터운 대열 코팅을 입힌 것으로 안심하지 않고 내벽에 100미터 간격으로 자동 소화기를 설치했다.

그 결과, 통로 외벽은 벼락에도 꿈쩍하지 않고 시속 150Km의 돌풍에 흔들리되 쓰러지진 않고 무게 20킬로그램의 유성체를 되튕겨내는 전능한 방어력을 지니게 되었다. 남아 있는 걱정거리라면 테러리스트의 미사일이나 자살 폭탄 같은 직접적이고 확실한 공격뿐이었다. 그래서 주변 50킬로미터를 비행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고 지상탑 둘레에 군부대 못지않은 경계망을 둘러쳤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인간이 행하는 일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2071년 7월 24일, 나는 안나 드 파흐터 박사, 사뮤엘 머글 박사, 메리 제인 톰프슨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다른 손님은 없었다. 토마스는 언제나 그렇듯이 무뚝뚝하게 인사를 했고, 파흐터 박사는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할리퀸 로맨스 소설을 읽었고, 머글 박사는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떠들어 대다가 갑자기 자리가 불편하다며 투덜대는 둥 횡설수설했고, 내 옆자리에 앉은 메리 제인 톰프슨은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때요. 슬슬 여름 휴가를 받아서 집에 돌아가야 하지 않나요?" 그녀의 물음이었다.

"집에 가 봐야 좋을 게 있어야죠. 부모님 손에 이끌려 이 여자 저 여자 번갈아 가며 선을 보느라 정신머리가 빠질 지경입니다. 차라리 여기서 빈둥대거나 사파리나 돌아다니는 편이 낫습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오호라, 호랑이 같은 부모님을 만나기보다는 사파리의 사자가 안전하다는 건가요?"

"그런 거죠."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나저나 그쪽에선 결혼이 의무처럼 강요되는 모양이네요?"

"관습적인 의무라는 거죠. 미국은 아닌가요?"

"아뇨, 똑같아요. 우리 부모님도 빨리 결혼하라며 성화죠." 

우린 동시에 피식 코웃음을 터뜨렸다. 엘리베이터의 일부를 뜨겁게 달구는 열정적인 잡담은 드문드문 이어졌고 일부를 차갑게 물들이는 묵묵한 운전은 끊임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키수무 시간 오후 1시 26분 52초까지는.

12시 반 무렵, 5, 6 킬로그램짜리 유성 하나가 시속 70킬로미터로 대기권을 관통해 들어오던 도중에 수백여 개의 조각으로 분해되었다. 빅토리아 호수에서 관광객과 장사꾼이 흥정을 하다 입씨름을 벌이는 것만큼이나 흔해빠진 일이었다. 불타는 파편들은 산산이 흩어지는 대신에 같은 궤도를 유지하며 날아갔는데, 이 역시 그리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기류에 휩쓸려 태평양 바다로 떨어지는 대신에 1시 26분 52초에 통로 외벽의 높이 2만 5천 173 미터 지점, 서쪽을 향한 제 3면을 뜨겁고 격렬하고 모질게 두들기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불타는 돌덩이 수십여 개가 기관총 총알처럼 쏟아지며 검은색 대열 코팅을 한 꺼풀 벗겨내 연약한 속살이 손바닥 넓이로 드러났다. 뒤따른 조각들이 그 위에 부딪혀서 케이블이 반 뼘 남짓 너비로 끊어져 나갔다. 기껏해야 반 뼘의 상처, 봇이라면 30초 만에 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밑에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면서 공기가 움직이고 통로가 흔들려 상처가 크게 벌어졌고, 옅은 오존층을 통과한 강렬하고 무자비한 햇빛이 내벽을 넓고 세게 강타하면서 세찬 불길이 일어났다. 불,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것도 불이었고 퇴폐가 만연한 로마를 잿더미로 만든 것도 불이었고 근면한 사람들이 일하던 우주 정거장을 파괴시킨 것도 불이었다. 재벌과 빈민과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고 냉정하고 평등한 응징을 베푸는 불꽃이 이번에는 우리를 습격한 것이었다.

여섯 면 중의 한 면이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하면서 엘리베이터 상자가 움찔대고 덜컹이며 크게 요동치다가 25도 각도로 기울어지며 떨어져 내렸다. 안전 벨트를 메지 않은 머글 박사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퉁겨져 나갔고, 파흐터 박사는 헤비메탈 리드싱어처럼 머리를 흔들며 천박하게 소리질렀고, 톰프슨은 내 어깨에 애처롭게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나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었다. 갑작스런 중력의 역전과 뇌수를 뒤흔드는 충격에 격발된 공포심으로 등줄기엔 오한이 서리고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고 부들부들 떠는 피부엔 닭살이 돋고 눈은 어지럽게 미쳐 돌아가고 입에선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직 토마스만이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주먹을 불끈 쥐고 지긋이 눈을 내리깔았다. 미련 없는 삶에 화려한 종지부가 찍히는 것을 반기며 최후를 만끽하기 위함인지, 너무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고 얼어붙은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소름 끼치는 초한(超限)을 체감하는 사이에 시계 초침이 한 칸 움직였고, 통로의 소화 장비는 이산화탄소를 힘차게 뿜어대 불을 제압했고, 비상 사태를 선고 받은 통로의 전원이 차단되었고, 엘리베이터의 긴급 제동 장치가 작동했다. 거대한 금속 상자는 여기저기서 길쭉한 전자석 물림쇠를 내뻗어 내벽의 가이드 레일을 붙잡으며 막대한 질량을 가까스로 지탱해 가파르게 증가하던 낙하속도를 단숨에 0으로 되돌렸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상자가 안정감과 평형감을 잃어버린 채로 추락하는 바람에 제 3면의 내외벽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가이드 레일까지 부서져 물림쇠가 물릴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엘리베이터는 균형을 상실하고 걸레처럼 너덜너덜한 외벽 바깥으로 불쑥 고개를 내민, 서쪽으로 20도 가량 비뚤어진 보기 흉한 몰골로 멈춰 섰다. 그 시간은 26분 56초에서 57초 사이였다.



*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게 맞겠지?" 파흐터 박사의 말이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토마스는 자신 없는 말투였다.

"아무래도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닌 것 같네. 아무래도……"

늙은 여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굽혀 경사진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찾았고, 톰프슨은 혀를 차며 답했다.

"예, 그건 옳으신 말씀입니다. 특히 머글 박사님이 더더욱 그렇군요."

머글 박사는 등받이를 완전히 뒤로 젖힌 의자에 누워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건 절대로 엄살이 아니었다. 낙하와 정지의 반작용은 그를 천장에 닿을 듯이 끌어올렸다가 바닥에 힘껏 내팽개쳤는데, 그 장면이 '기지'에 TV로 생중계되었다면 모두들 한결같이 쌍수를 들며 환호성을 질렀을 게 분명하다. 어쨌든 이마가 깨지고 앞니 하나가 부러지고 양 손목을 삐고 여기저기 찰과상을 입었지만, 신기하게도 부러진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한번 뒤척이더니 실눈을 뜨고 톰프슨 박사를 노려봤다.

"마치 내가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군."

"이런, 조금만 더 있으면 벌떡 일어나서 로스앤젤레스 다져스와 뉴욕 양키스의 월드 시리즈도 볼 수 있겠군요."

그녀의 말에 머글 박사는 더운 콧김을 킁킁 내뿜으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다져스? 그 망할 자식들은 야구공과 축구공도 분간하지 못하는 멍텅구리야. 월드 시리즈는커녕 플레이오프에도 진출하지 못할 걸!"

엘리베이터 안은 기막히게 멋진 난장판이었다. 1류 호텔 스위트 룸을 통째로 바이킹에 태워서 흔들어도 이보단 덜했으리라. 천장의 조명은 태반이 꺼져 버렸고 남아 있는 것조차도 죽을똥 말똥 깜박이는 처지였다. 바닥엔 별의별 잡동사니와 쓰레기가 마구잡이로 굴러다녔다. 운전석에서 객석까지 20도 각도의 완만한 오르막이 생겨나 변두리 극장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토마스는 구급 상자를 챙겨 들고 어둡고 경사진 객석 통로를 따라 올라오며 이렇게 말했다.

"그야 두고 보면 알겠죠. 그나저나 다른 분들은 별 이상이 없으십니까?"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지명을 받은 초등학생처럼 번쩍 손을 들었다.

"저도 별 문제 없어요." 톰프슨의 대답이었다.

"글쎄, 조금 허리가 아픈 것 같아." 파흐터 박사가 앞 좌석 다리 부근에서 알이 깨어진 안경을 집어 들며 한숨을 토했다.

"허리? 파흐터 박사님, 걷는 데는 지장이 없겠습니까?"

토마스는 조금 걱정스런 눈치였다. 파흐터 박사는 안전 벨트를 풀고 쭈삣거리며 일어나 제자리에서 낮게 폴짝폴짝 뛰더니만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약간 삐끗한 정도였나 봐. 별 문제 없을 거야."

"다행이군요."

"뭐가 다행이란 거죠?"

톰프슨이 구급 상자를 받아 들며 묻자, 토마스는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부상자는 적으면 적을 수록 좋으니까요."

"너무 뻔한 말이군요."

"뻔한 사실일수록 잊어버리기 쉽죠." 

토마스는 발을 길게 뻗어 몸을 낮추더니 매끄러운 바닥을 주르륵 미끄러져 운전석에 돌아갔다. 그는 자리에 앉아 부지런히 계기판을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가까운 곳에 포드가 있으면 좋을 텐데……"

톰프슨은 머글 박사의 상처를 소독하고 싸맸다. 상처 부위가 쓰리고 아픈지, 머글 박사는 몸을 지렁이같이 꿈틀대며 부러진 앞니 사이로 김 빠지는 소리를 냈다.

"좀 살살할 수 없겠나?"

"박사님. 다 큰 어른이 이 정도도 못 참나요?"

톰프슨의 말이 뾰족한 강침처럼 머글 박사의 자존심을 찔렀는지, 축 늘어진 얼굴의 살집이 파르르 떨리면서 사흘 연속으로 입은 와이셔츠처럼 심하게 구겨졌다.

"나는 다 큰 어른이 아니라 나이든 노인일세." 그리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도날드 덕이 그러듯이 사방에 침을 튀기며 꽥꽥거렸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정신과 의사한테 내 몸을 맡기진 않았을 걸세. 정말 유감이야!"

"저도 유감이에요. 의사로서 박사님의 정신을 진찰하고 싶은 욕심은 많았지만 몸을 진찰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톰프슨은 늙은이의 팔다리를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일단 겉보기엔 부러진 데가 없는 것 같네요. 머글 박사님, 한 번 일어나 보시겠어요?"

노인네가 영차 힘을 쓰며 윗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만 금새 에구구 신음하며 무너졌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안 되겠네. 팔다리가 욱신거려서 몸을 가눌 수가 없어."

"어딘가 금이 갔는지도 모르겠군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진통제를 드리죠."

톰프슨이 내민 속효성 진통제 두 알, 머글 박사는 그것을 음미하듯이 입에 머금고 한 잔의 물과 함께 꿀꺽 소리 내어 삼켰다. 홍콩의 일류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맛보는 듯한 만족스러움과 안도감이 입가에 떠올라 불안과 근심을 한시적으로 감추었다.

"토마스, 기지나 관문하고 연락은 잘 됩니까?"

파흐터 박사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니 토마스가 슬쩍 얼굴을 돌리며 정보를 흘렸다.

"안 그래도 관문과 회선이 연결된 참입니다."

그는 계기판의 다이얼을 돌려서 볼륨을 높였다. 치직거리는 잡음과 거친 목소리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 여긴 '관문'. 여기는 '관문'. 엘리베이터는 응답하라, 응답하라 -

혀를 많이 굴리는 러시아식 r 발음이 섞인 영어, 바실리 카라트조프였다.

"여기는 엘리베이터, 여기는 엘리베이터. 긴급 상황 발생. 긴급 상황 발생. 엘리베이터가 바깥쪽으로 기울어져 멈췄다. 승객 피해는 없음. 외부 모니터 확인 결과, 외벽 일부가 손상되었다. 여기선 피해 범위를 추측하기 어렵다."

우주 정거장까지 거리는 대략 30만여 킬로미터, 빛과 전파의 속도 역시 초속 30만여 킬로미터, 말이 오가는 사이에 2, 3초의 여백이 어김없이 끼어들었다.

 - (간격) 토마스, 자네 정말 운이 따르지 않는 친구군 -

"그렇습니다."

짙은 체념이 굵은 모래알갱이가 되어 마이크에 촤르르 흘러 내렸다. 두 번째 겪는 생명의 위기에 지레 저항을 포기한 것일까? 보잘것없는 삶에 짧은 유예를 얻은 것이 불만족스러운 것일까? 아니면 줄곧 핏빛으로 외치는 계기판과 모터 소리마저 끊겨버린 새까만 어둠에 짜증이 나서 퇴폐적이고 비관적인 운명론을 받아들인 것일까? 아무튼 불길하고 위태로운 악몽에 잠긴 목소리였다.

 - 여기는 기지, 반복한다, 여기는 기지. 사고 발생 확인. 엘리베이터 관제사는 현 상태를 즉시 보고하라 -

콧소리가 섞인 프랑스 억양, 푸리에의 호출에 토마스는 퍼뜩 꿈에서 깨어나 다급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계기판의 숫자에 주목하면서 마이크에 입을 바싹 붙이고 소리를 높였다.

"여기는 엘리베이터. 긴급 상황 발생, 승객 피해 없음. 다시 말한다. 긴급 상황 발생, 승객 피해 없음. 현재 서쪽으로 21.7도 기울어져 고도 25,086 미터에 멈춰 섰다. 서쪽으로 21.7도, 현재 고도 25,086 미터."

 - 다친 사람이 없다니 천만다행이군. 외부 모니터 확인 결과는 어떤가? -

"통로의 제 3면 일부가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피해 상황은 여기선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돌리더니, "기지, 관문, 엘리베이터의 재가동은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포드를 타고 탈출하기보단 엘리베이터를 다시 가동시켜서 내려가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편리했지만, 그러려면 기지와 관문에서 동시에 비상 사태를 해제하고 전원을 공급해야만 했다.

- 확인 중이다, 잠시 기다려라 - 

잠시 후, 그들은 똑같이 실망스런 결과를 내놓았다.

- 토마스, 미안하네만, 자세한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엔 힘들 것 같네 -

- 현 상태에선 재가동이 불가능하다. 토마스, 이해해 주게나 - 푸리에는 우릴 위로하듯 이런 말을 덧붙였다 - 현재, 9천 8백 미터 고도에 있는 27번 포드가 지금 그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포드의 조사 결과를 받아보고 재가동 여부를 결정하겠다 -

 "알았다. 포드로 회선을 연결해 달라." 토마스는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 여기는 27번 포드, 여기는 27번 포드. 토마스, 들립니까? - 위험을 솔직하게 공포로 받아들이지 않고 긴장감으로 해석하는 목소리, 마이키였다.

"마이키? 여긴 토마스다. 자네 목소릴 들으니 반갑군."

 - 저도 반갑군요. 지금 최고 속도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얼추 10분 뒤엔 현장에 도착할 겁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세요 -

"알았다. 일단 회신을 열어놓고 기다리겠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글 박사가 빽 소리질렀다.

"뭐야? 포드가 올 때까지 대걸레 자루처럼 누워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당장 다시 움직여, 이 바보 자식들아! 난 환자란 말이야, 한시라도 빨리 치료받아야 해!"

"머글 박사님, 환자면 환자답게 좀 조용히 하시죠?"

파흐터 박사가 날이 선 목소리로 타일렀지만 늙은 불독은 주눅들지 않고 계속해서 짖어댔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어쩔 텐가?"

"조용해질 때까지 진정제를 놓아 드리죠."

톰프슨은 주사기를 꺼내며 차가운 시선을 던졌고 머글 박사는 억지로 분기를 삭히며 모기만한 소리로 의사들의 오만 방자함을 비난했다. 토마스는, 불운한 사나이는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파묻고 왼손으론 오른쪽 눈가를 비벼대며 둔탁한 오른손을 팔걸이에 내던지고 오른발 뒷굽으로 바닥을 두들겼다. 톡, 톡, 외다리 악마가 탭 댄스를 춘다.

"상황이 좋지 않은가 보죠?"

내 근심 어린 질문에 그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건넸다.

"확실히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피한 셈이죠. 어쨌건 아직 살아 있으니까요." 고립된 세계에서 톡, 톡, 확신이 실리지 않은 춤이 이어졌다.

"설령 최악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한, 희망을 가져야죠." 나는 어리석은 믿음을 설파했고……

"최박사가 과연 옳은 말을 할 줄 아는군요." 고지식한 파흐터 박사는 무조건적으로 찬성했고……

"어차피 곧 구조대가 올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아예 하지도 마세요." 톰프슨은 비교적 냉철하게 상황을 묘사하며 면박을 줬고……

"제기랄, 내가 어째서 여기 누워 있는 거지? 나 같은 고급 두뇌가 왜 이런 곳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야 하지?" 머글 박사는 쓸데없는 넋두리를 늘어놓았고……

"최박사님 말씀이 맞을 겁니다. 아마도." 다만, 토마스만이 의심을 풀지 않았다.

느슨하고, 비뚤어지고, 침침하고, 지루한 시간이 성층권에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자존심만 남은 늙은 수캐는 지상탑과 우주 정거장의 모든 직원들을 싸잡아 욕했고, 노회한 가정주부는 그 말을 못들은 체 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고, 정신과 의사는 추잡하고 더러운 욕설이나 퍼붓는 사람한테 관리이사의 직함을 안겨준 공단 이사진의 정신상태를 의심했고, 소심한 고려인은 혼란과 의심이 뒤엉킨 공간에서 도망칠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엘리베이터 보이는 멀리서 무심한 눈빛으로 관망할 따름이었다.

가벼운 소란의 와중에 발 밑이 부르르 떨리는 기묘한 느낌이 전해졌다. 낡은 장지문을 여는 소리가 요란하더니만 엘리베이터 바닥이 좌우로 크게 요동쳤다. 우리가 내뱉은 비명 소리가 우리를 덮쳤고 우리가 버둥대는 팔다리가 우리에게 얽혔다.

다행히 충격은 금새 사라졌다. 엘리베이터가 떨어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만 좀 더 기울어졌을 뿐이다. 토마스는 마이크를 붙잡고 소리질렀다.

"기지, 관문, 들리는가? 지금 막 진동이 일어나면서 서쪽 22.5도로 기울어졌다. 반복한다, 22.5도로 기울어졌다."

 - 토마스, 진정하게. 여기서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 푸리에는 황급히 답신했고,

 -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미리 내압복(耐壓服)을 준비하게나 - 카라트조프는 그렇게 충고했다.

그리고, 토마스는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여러분, 당장 의자에서 내압복을 꺼내 입으십시오."



*

엘리베이터 좌석 아래쪽에는 비상시를 대비한 우주복과 내압복이, 등받이 뒤쪽에는 산소통과 헬멧이 들어 있었다. 혹독한 무중력의 우주 공간에 나가기 위해선 우주복이, 냉혹한 성층권에선 내압복이 필요했다. 스스로 조직을 변화시키는 생체 섬유로 만들어져 영하 60도의 추위에서도 착용자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내압복으로 몸을 감싸고, 무겁지만 충직한 산소통을 짊어지고 호스를 연결한 헬멧을 머리에 뒤집어쓰지 않으면, 성층권의 희박한 대기와 살인적인 추위를 견뎌낼 수 없다. 맨몸의 인간에게 죽음이 예약된 하늘, 그것이 성층권이다.



*

제일 먼저 부상자인 머글 박사에게 내압복을 입혔다. 하지만 그는 기껏 베푼 친절을 불쾌한 독설로 되갚으며 선행이란 실로 보상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내가 짜증을 곱씹으며 내압복의 지퍼를 잠그는데 스피커에서 마이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여긴 마이키. 지금 막 바깥쪽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막 봇으로 구석구석 살펴보고 있는 중인데, 이게…… 생각보다 심하군요 -

"대체 어느 정도지?" 그렇게 묻는 토마스의 입가에는 초조함이 배었다.

 - 통로 외벽이 80미터 이상 찢어지고 엘리베이터도 5분의 1 이상이 외부에 노출되었습니다. 화면을 보세요 -

여러 대의 봇이 각기 다른 카메라로 찍은 통로 외벽의 영상이 계기판의 모니터에 떠올랐다. 스피커 종이가 떨리며 기지와 관문의 신음소리를 재현했다.

"도저히 재가동시킬 수 없겠군요." 토마스가 이를 앙다물었고,

 - 그래, 이래선 안 된다고. 섣불리 전원을 넣었다간 엘리베이터가 아예 밖으로 튕겨져 나갈지도 몰라 - 푸리에가 혀를 찼고,

 - 어쩔 수 없다. 포드로 탈출해 - 카라트조프는 마침표를 찍었다.

토마스는 지체하지 않았다. 키보드를 두들기며 마이크에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1급 비상사태 선언, 암호 확인 준비 완료, 마이키, 지금부터 탈출용 도킹 코드와 좌표를 전송한다."

 - 알았습니다 -

컴퓨터가 생성하고 계산한 코드와 좌표가 무선으로 전송되고, 포드가 자신이 있을 곳으로 날아가고, 엘리베이터에서 트랩이 불끈거리며 튀어나오면서, 복잡한 현실의 과정은 모니터에서 단순 명료한 그림으로 표시되었고, 바닥과 벽면은 미미한 진동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토마스는 헬멧을 높이 들어올리며 다음 지시를 내렸다.

"모두 헬멧에 호스를 연결하고 착용하십시오."

나는 재빨리 헬멧의 왼쪽 공기 흡입구에 호스를 꽂고 머리에 뒤집어 썼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카본 헬멧의 목 부분이 내압복의 고정쇠에 물리고 푸른빛이 감도는 전면(前面) 유리의 4분의 1면에 모든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녹색으로 깜박이며, 기지와 관문과 포드와 우리들 사이를 하나로 잇는 무선 통신이 열렸다.

'모두들 제 말이 들립니까? 혹시 장비에 문제가 있는 분은?'

토마스의 질문에 파흐터 박사와 톰프슨, 나와 머글 박사가 순서대로 대답하자, 그는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경고했다.

'의자를 꽉 붙들어 주십시오. 긴급 감압(減壓)을 실시해 3분여에 걸쳐 공기를 빼낼 겁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기계팔이 계기판을 내리쳐 플라스틱 보호판을 박살내 감압 스위치를 눌렀다. 거센 격류에 몸뚱이가 휘청이고 먼지와 쓰레기가 휘날리며 소중한 공기가 사라졌고 상실감이 채워졌다. 짧은 기다림이 있었고, 세찬 바람이 잦아들었고, 토마스의 입이 열렸다.

'이제 됐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최박사님, 머글 박사님을 부탁합니다.'

나는 시체처럼 축 처진 머글 박사를 반은 부둥켜 안고 반은 질질 끌다시피 했다. 그 사이에도 토마스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트랩이 포드와 연결되고 암호 확인이 끝나면 조종석 좌측면의 비상구가 열릴 겁니다. 최박사님이 머글 박사님을 데리고 들어간 다음에 파흐터 박사님과 톰프슨……'

엘리베이터는 또다시 격렬한 파도에 올라탔다. 아까처럼 큰 진동은 아니었지만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토마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일어나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넓고 둥그스름하고 푸르죽죽한 헬멧 유리에 처절한 붉은빛 화면이 반사되며 푸른 눈동자에 곤혹스런 빛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이봐, 마이키, 어떻게 된 거지? 트랩이 중간에 걸렸다. 끝까지 나가질 못하고 있어.'

마이키는 맥 빠진 목소리로 이렇게 보고했다.

'예, 지금 보고 있습니다. 트랩이 뒤틀린 케이블 사이에 완전히 끼어버렸습니다. 억지로 내밀다간 케이블이 죄 끊어지게 생겼어요.'

외벽이 찢기며 케이블이 꼬인 게 문제였다. 가닥가닥 흐트러진 케이블을 벌렸더니 뒤틀림이 심해지면서 트랩 사출을 방해한 것이다.

'20미터 이상 나갔으니 포드를 갖다 붙일 수 있어. 자동 사출을 중단하고 수동 조작으로 바꿔서 관절을 꺾어 보게.' 푸리에는 가능성을 지적했다.

'안 됩니다. 관절이 꺾이질 않습니다.' 토마스는 헬멧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헬멧 안에는 귀뚜라미 울음 같은 신경을 건드리는 저주파음이 나직했고 목 울대로 침 넘기는 소리가 연달았다. 내 어깨에 의지한 머글 박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금 뭣들 하는 건가? 날보고 여기서 이대로 죽으란 건가?'

그 때, 마이키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트랩 출구 밑에 갖다 붙이겠습니다. 해치를 열고 뛰어내려요!'

대단히 무모하지만 유혹적인 제안이었으며 그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토마스의 낡은 상처가 실룩였다.

'어쩔 수 없군요.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마이키의 신호가 오면 비상구와 출구 해치를 열겠습니다. 먼저 최박사님과 톰프슨 선생님이 머글 박사님을 데리고 가십시오. 최박사님이 먼저 내려가면 톰프슨 양은 머글 박사님을 떨구세요.'

'날 떨구라고? 내가 무슨 물건인 줄 아나?'

머글 박사는 분개했지만 누구도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 다음에 톰프슨 양과 드 파흐터 박사님이 뛰어내릴 겁니다. 최박사님께선 다른 분들을 잘 받아 주셔야 합니다.' 토마스는 내게 당부하듯이 말했다.

'잘 알았습니다. 토마스.' 내 등골엔 식은땀이 흘렀다.

'퍼블릭 스쿨을 졸업한 이래, 가장 신나는 뜀뛰기가 되겠군요.' 그러나 톰프슨의 얼굴은 즐거움이 아닌 긴장감에 절었다.

'마이키, 내 말 들려? 혹시 내가 실패하거든 내 딸에게는 부디 체육시간에 뜀뛰기를 잘 배워두라고 말해 줘.' 파흐터 박사는 어머니로서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다. 

'여기는 마이키, 정확하게 출구 코밑에 도착했습니다. 박사님께선 걱정일랑 집어치우고 뛰어내릴 준비나 하세요.' 마이키는 일언지하에 파흐터 박사의 청을 거절했다.

'그럼 이제 비상구와 해치를 열겠습니다.'

토마스가 계기판 아래쪽을 힘껏 잡아당기자 주먹 크기만한 버튼이 붙은 서랍이 드러났다. 다시 한 번 생명이 끊어진 오른손이 허공을 가르면서, 강철의 문은 헬멧을 뚫고 고막을 찌르는 소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 빛이 보였다.

'최박사님, 어서 가세요!' 

토마스의 손짓에 맞춰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는 머글 박사를 잡아 끌며 바닥과 벽과 천장이 둥그렇게 이어진 암흑의 통로, 일직선의 미로를 내달렸다. 발로는 붉은 지시등을 밟고 눈으로는 점차로 커지고 밝아지는 원형의 푸른 빛을 주시하며 숨을 헐떡인 끝에, 나는 성층권을 목격했다.

그것은 끝없이 푸른 바다였다.

수평선이나 지평선이라는 한계는 없었다. 숨이 막히고 눈이 아플 정도로 푸르른 쪽빛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머나먼 창공의 깊이 있는 푸른빛에 홀려 넋을 잃고 바라만 봤다. 그 어떤 바다도, 그 어떤 대륙도, 인간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며 이렇게 매혹하지는 못할 것이다.

문득 발치를 내려다보니 약간 희뿌연 빛이 감도는 무한대의 캔버스 위를 더럽히는 둥근 원이 보였다. 포드, 접이식 덮개를 활짝 연 포드의 전망대였다. 그제서야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는지가 생각났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전망대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마이키는 대단히 뛰어난 조종사였다. 거리차는 제로에 가까웠고 고도차는 1.5 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위치와 높이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적도상의 성층권에도 산들바람처럼 미약한 공기의 흐름이 있었고 때로는 강한 돌풍도 몰아쳤다. 약간의 흔들림은 당연한 것이었다.

'박사님, 잘 들으세요. 지금부터 저기에 박사님을 떨어트릴 겁니다.'

'안돼, 안돼, 여기서 떨어지면 난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나는, 뒤쫓아 온 톰프슨에게 이빨을 맞부딪히며 부들부들 떠는 머글 박사를 맡겼다. 

'톰프슨. 먼저 내려갈 테니 이 분을 부탁해요.'

'그냥 아래로 밀어서 떨어트리면 되는 거죠?' 그녀의 입과 몸놀림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예, 내가 받을 테니까 정확하게 밑으로 떨궈요. 어려울 것 하나도 없으니까 겁내지 말아요.'

그리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렸다. 짧은 찰나 허공에 매달렸다가 중력에 이끌려 무서운 가속도로 떨어지며 비명을 지를까 망설이는 사이, 두 발이 강철에 부딪히는 둔탁한 충격을 받으며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포드의 전망대 위에 큰댓자로 엎어진 것이다.

'최박사님, 무사한 겁니까?'

마이키가 걱정스레 묻는 소리에 일어서서 먼지를 툭툭 털며 답했다.

'그래, 무사하네. 그나저나 이 포드는 제대로 청소한 적이 없는 모양이군. 온통 먼지투성이야.'

고개를 들어보니 지중해보다 푸른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흑철빛의 탑, 궤도 엘리베이터가 시야를 가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엘리베이터 통로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 거대하고 막강한 위용에 감격하며 시를 지을 여유는 없었다. 지독하게 깊고 아픈 균열의 끝에서 슬쩍 얼굴을 내민 엘리베이터 상자가 필사적으로 뻗은 탈출 트랩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던져요, 톰프슨!'

트랩 끝에서 톰프슨이 얼굴을 내밀어 위치를 잡더니 머글 박사를 힘껏 밀었다. 나는 메이저리그 외야수처럼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 마르고 연약한 몸뚱이를 받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관성을 이기지 못해 딱딱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늙은이는 내 품에서 애벌레처럼 꿈틀대며 더듬더듬 신경질을 부렸다.

'자네, 여기서 내려가면 자네들 모두, 모두 해, 해고야! 해, 해, 해고라고!'

'예, 관리이사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해고를 시키든지 말든지 말입니다. 저도 이젠 질렸습니다.' 나는 머글 박사를 땅바닥에 팽개치고 일어났다. '머글 박사님은 무사히 받았습니다. 톰프슨, 빨리 뛰어내려요.'

톰프슨은 훌쩍 몸을 날려 내 도움 없이 가볍게 착지했다. 파흐터 박사는 몇 번의 재촉이 있는 다음에야 마음을 다잡고 뛰어내렸다. 그녀는 내가 뻗은 손을 잡아 뒤뚱거리며 균형을 잡더니만 바닥에 풀썩 무너져 내렸다. 

'이제 됐어. 이젠 살았어. 잉게…… 이제 집에 돌아갈께. 잉게. 잉게……'

긴장의 매듭이 풀리면서 강철의 여걸은 가장된 평상심을 벗어던지고 평범한 어머니로 돌아가 딸의 이름을 되뇌며 울먹였고 톰프슨은 같이 주저앉아 그녀를 껴안으며 위로했고 바닥에 퍼져 누운 머글 박사는 연신 더운 콧김만 내뿜었다. 하지만 아직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엔 이르렀다. 한 사람이 남아 있었으니까.

'토마스, 뭐 하고 있습니까? 빨리 나와요.'

'예, 지금 가고 있습니다.' 

토마스의 헬멧이 트랩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손을 높이 들어 위치를 알렸다.

그러나 성층권이 갑작스레 변덕을 부렸다. 

산들바람이 거센 돌개바람으로 바뀌면서 포드가 제자리에서 밀려나 통로에 부딪혔고 오뚜기마냥 앞뒤 좌우로 흔들리며 트랩에서 멀어졌다. 우리는 전망대 바닥에 쓰러졌고 헬멧은 비명 소리로 터질 것만 같았고 통로 외벽의 상처가 벌어지며 엘리베이터 상자가 또다시 기울어졌고 비꼬인 케이블이 조여지며 트랩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았고, 절름발이는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뛰어! 토마스, 뛰어요!'

나는 난간을 붙잡고 일어나서 소리쳤다. 이미 거리차는 2미터 가까이, 높이차는 3미터로 벌어졌다. 지금 뛰지 않으면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뛰어야 한다. 충분히 뛸 수 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믿었다. 

토마스는 힘껏 뛰었다. 그러나 세라믹의 슬개골로 지탱되는 왼발은 원호를 그리며 도약하기엔 너무 허약했다. 그의 발은 공중을 헛디뎠고, 내뻗은 손은 헛되이 바람을 일으켰다. 주저할 틈도 없이 나는 윗몸을 난간 너머로 내밀어 구원의 손길을 길게 뻗었다. 두툼한 장갑 사이로 손가락과 손가락이 이빨처럼 물리는 감촉을 느끼며 이를 악물고 힘을 줬다.

다음 순간, 내 혈관은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나는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손을 붙잡은 것이다…… 

내압복이 찢어지고 팔뚝의 고정쇠가 부서지면서 인공 신경이 끊겨 움찔거리는 플라스틱 의수만을 남긴 채, 토마스의 몸뚱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멀어져 광대하고 춥고 희푸른 하늘에 파묻히기 직전, 투명한 헬멧 유리 안쪽에서 믿기지 않은 사실이 비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

그 뒤의 기억은 오래된 영화처럼 가물가물하다. 포드의 덮개가 닫히면서 나는 부서진 의수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맥없이 쓰러졌다. 한줄기 빛에 눈을 떠 보니, 무겁고 샛파란 하늘이 내 가슴을 무자비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들것 위에서 발버둥치며 목청이 터져라 울부짖다가, 필름이 끊어졌다. 

그리고 나는 미쳐 버렸다.

높고 푸른 하늘을 보기만 해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고 숨이 막히고 어지럽고 손발이 저렸다. 의사들은 '외상(外傷) 후 스트레스 장애 및 공황 장애'라는 그럴싸한 병명(病名)을 붙였다. 나는 키수무 시내의 병원 1층에 처박혀 창에는 두꺼운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워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썼다. 먹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커튼을 살짝 열고 바깥을 내다보며 우울한 냄새를 맡았다.

궤도 엘리베이터는 수리되었다.

수십 대의 포드와 수백 대의 봇을 동원해 망가진 엘리베이터 상자를 해체해 지상으로 옮기고 엉망으로 부서진 내벽을 수리하고 찢어진 외벽을 접합했다.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3주 뒤에는 여객용 엘리베이터 운행이 재개되었다.

토마스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지상탑을 중심으로 점차 수색범위를 넓혀 무려 1달여에 걸쳐 주변 50킬로미터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뼛조각은커녕 핏자국조차 찾지 못했다. 결국엔 그가 빅토리아 호에 떨어져 고기밥이 되었으리라고 추정하고 수색을 포기했다. 그의 흔적이라곤 부러진 의수뿐이었다.

지상탑에선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안나 드 파흐터 박사는 감동적인 조사(弔詞)를 읽었고 톰프슨과 마이키는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지었고 푸리에는 시종일관 침통한 낯빛이었고 오랜만에 땅을 밟은 카라트조프는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미국에서 찾아온 토마스의 가족들은 의수가 담긴 상자를 껴안고 뜨거운 눈물을 펑펑 흘렸고 지팡이를 짚은 머글 박사는 가식적인 위로를 건넸다. 

나는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후회와 슬픔을 꺽꺽대며 토해냈다.



*

그는 영웅이 되었다. 미국으로 운반된 플라스틱 의수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피로써 명성을 얻은 전쟁 영웅들과 함께.

하지만 나는 여전히 광인(狂人)이었다.

몇 달이 지나도 병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겨우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고, 고소 공포증은 여전했고 때때로 발작을 동반한 공황 장애가 찾아왔다. 그래서 사표를 썼다. 파흐터 박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하늘을 무서워하는 겁쟁이가 궤도 엘리베이터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니까.

나는 친구들의 환송연도 거절하고 짐을 챙겨 들어 육로와 해로를 통해 도망치듯이 귀국했다. 놀랍게도 고국은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우주 공학 박사라는 간판, 궤도 엘리베이터에서 일한 경력, 끔찍한 사고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 얘깃거리, 그 모든 시시껄렁한 것들이 권위를 마약처럼 탐닉하는 무리를 매료시켰다.

신문 방송에서 인터뷰 요청이 물밀듯이 쏟아졌고 여러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했다. 인터뷰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교수직엔 조건을 내걸었다. 강의실과 교수실은 '반드시' 1층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평양의 종합 과학 대학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아예 단층 건물을 새로 지어서 전용 강의실을 만들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래서 나는 그곳 교수가 되었고 학교측은 약속을 성실히 지켰다.

간판과 직함 때문일까, 거창한 이름의 정부 위원회는 위원장 직을 제안했고 한물간 늙다리들이 모인 학회에선 서슴없이 상석을 내줬고 철없는 젊은이들은 내 강의를 듣기 위해 줄을 섰고 그로써 한밑천 단단히 잡은 학교는 선심 쓰듯 넉넉한 봉급과 연구비를 보장해 줬다. 그러나 나는 패배자였다.

우주를 정복하기 위한 노력에 힘을 보태고자 아프리카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부모님의 얼굴은 납빛이 되었다. 하지만 위대한 정복자의 꿈을 버리고 평범한 대학 교수가 되어 평범하게 맞선을 보고 평범하게 결혼해서 평범하게 사내애와 딸애를 보았더니, 부모님께선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라 좋아하셨고 주변 사람들은 일찌감치 인생에 성공한 아들을 둬서 얼마나 좋겠냐며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미처 몰랐다. 내가 광인이라는 사실을, 내가 패배자라는 사실을, 내가 낙오자라는 사실을……!



*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고 사람들은 달력 종이를 부지런히 뜯어냈다.

내가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톰프슨도 사표를 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높은 곳에서 우주를 보고 하늘을 보는 일에 싫증이 났는지 솔직하고 화려한 데이트를 즐기는데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친구의 빨간색 스포츠 카에 올라타 고속 도로를 질주하다가 대형 정유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다. 처참하게 찢겨지고 새까맣게 불타버린 시체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덧없는 덕목인지를 입증했다.

머글 박사는 이사진에서 물러나 버킹검에서 기사 작위를 받고 상원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런던의 축축한 날씨가 몸에 좋지 않았던지 석 달 만에 심장 발작을 일으켰고 다섯 달 뒤엔 땅에 묻혔다. 몇 안 되는 가족이 쓸쓸하고 조촐한 장례식을 치렀다.

몇 년 뒤, 파흐터 박사도 퇴직했다. 네덜란드의 덴 보슈에서 딸과 함께 꽃가게를 열고 유유자적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며, 언제든 가족과 함께 놀러 오라고, 새빨간 튤립이 그려진 엽서에서 그렇게 말했다.

마이키, 마이클 다라본트는 MIT에서 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카라트조프는 은퇴해서 사업가로 변신해 나름대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푸리에는 유럽 연합의 우주 개발국으로 자리를 옮겨 부국장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세상은 더욱 격렬하게 변화했다.

6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테헤란과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 예루살렘이 나란히 핵 공격을 받았다. 수십, 수백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중국의 남부 지방에서는 분리 독립주의자들이 내전을 일으켰고, 멕시코 반군 연합이 멕시코시티에 입성했고, UN 총회는 파행에 파행을 거듭했다.

오랜 반란과 내전을 극복하고 갈등을 봉합한 끝에 예전보다 성숙해지고 강력해진 아프리카 연합은 미국을 포함한 선진 10개국에 궤도 엘리베이터의 지분을 요구했다. 미국은 콧방귀를 뀌었고 아프리카 연합의 지도자들은 분노했다. 케냐 정부군이 지상탑으로 진격하면서 전쟁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한 달도 되지 않아 미국의 기동 함대가 몸바사를 제압했다. 첨단 무기로 무장한 15만의 10개국 연합군이 전근대적인 소총밖에 없는 케냐군을 마구잡이로 몰아붙였다. 몸바사에서 보이, 마가디와 나이로비까지 차례로 함락되면서 케냐의 운명은 이미 끝장난 것처럼 보였다.

파죽지세로 전진하던 10개국 연합군의 기세는 나쿠루에서 격렬한 게릴라 공격을 만나면서 발목이 잡혔다. 하지만 그동안의 잇따른 승리로 오만해진 연합군 지휘관 그렌지 중장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호언장담했다.

"AK47 소총으로 무장한 원시적인 게릴라 따위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1주일 안에 모조리 쓸어버리고 키수무로 진격하겠다."

그의 말과는 달리 소탕 작전은 1주일이 아닌 1달이 넘도록 지지부진했고, 그 사이에 10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 연합군이 나쿠루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포위되고 고립되었지만 여전히 막강한 10개국 연합군은 아프리카 연합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석 달간의 싸움 끝에 아프리카 연합군은 40만이 넘는 희생을 치렀다. 그렌지 중장은 7만 명이 넘는 병사를 잃고 백기를 들었다. 한참 뒤에 추레해진 몰골로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된 그렌지 중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풀 죽은 목소리로 이렇게 변명했다

"우리에겐 미사일과 전차와 비행기가 있었다. 다만 사람이 부족했던 게 패인(敗因)이었다."

달러가 신뢰를 잃고 미군이 세계 각지에서 철수하고 월 스트리트의 주가가 급락하면서 세계 경제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월면 개발이 중단되고 우주 정거장은 버림받고 엘리베이터 공단은 막대한 빚을 지고 파산했으며 나머지 자산은 아프리카 연합에 몰수당했다. 

그리고 움직임을 멈춘 궤도 엘리베이터는 폐허가 된 유적과도 같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

모제스 키프로노는 '탑'을 고쳐 썼다.



무능한 인간을 조롱하며

지상에서 하늘로 추락하는

오만한 파멸의 탑이여!



이전보다 훨씬 훌륭한 시였다. 

하지만 역시 [오지만디아스]에는 미치지 못했다!



*

서기 2091년, 동남아시아 국가연합과 동북아시아 국가연합, 아프리카 연합이 컨소시엄을 결성해 새로운 엘리베이터 공단을 설립했다. 돌이켜 보니 이미 20년이 지난 뒤였다. 20년, 20년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미쳐 있었다. 

신(新) 공단에선 나를 자문 위원으로 위촉했는데, 무턱대고 거절하기도 어려운 입장이었다.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이름뿐인 자문 위원직을 수락했다. 그리고 내 자문 위원으로서의 첫 번째 임무는 궤도 엘리베이터 공단의 출범식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느긋하게 출범식 날짜를 기다렸지만 나는 한 달 전부터 배를 타고 갈 채비를 해야 했다. 상하이에서 인도로, 몸바사 항구에서 내려 고속도로를 타고 키수무로 향했다. 높고 푸른 하늘의 도시, 고원(高原)의 도시, 궤도 엘리베이터의 도시, 지평선 너머에서 하늘을 양단하듯 일어선 거대하고 웅장한 탑이 가까워질수록 내 가슴이 쿵쾅대며 울렸다.

그리고 나는, 내 청춘의 도시로, 내가 미쳐버린 진원지로 돌아왔다.

여러 해 동안 방치되어 쇠락한 지상탑은 출범식을 맞이해 꽃 단장을 했다. 어울리지 않았다. 대낮부터 폭죽을 터뜨리고 엘리베이터 통로 주변엔 수백 대의 포드와 수천 대의 봇이 날아다니면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기가 막혔다. 토크쇼 진행자처럼 멋들어진 옷을 입은 정치가들이 줄지어 연단에 올라 알맹이 없는 찬사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듣기 싫었다. 월급쟁이 직원들은 의례적인 박수를 쳤고 예전의 호황을 기억하는 현지민들은 우렁찬 박수를 쳤다. 꼴불견이었다.

짜증을 견디지 못해 귀빈석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려는 찰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박사님 아니십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47세의 마이키를 발견했다. 얼굴에는 관록이 더해지고 머리칼은 희끗해지고 귀에선 이어폰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이키였다. 우리는 밝게 웃으면서 서로 얼싸안았다. 

"마이키, 아니, 다라본트 박사라고 해야 하나? 이거 정말 오랜만이군." 

"그렇군요. 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20년이 넘었죠?" 그리곤 이렇게 덧붙였다. "박사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어색하군요. 그냥 마이키라고 불러 주세요." 

우리는 재회를 자축하며 번잡하고 지루한 출범식장을 떠나 빅토리아호 주변의 산책로를 한가로이 따라 내려갔다. 등 뒤에선 불꽃 터지는 소리와 환호성과 이름 모를 연사의 축사가 한데 뒤섞여 표류했고 눈 앞에는 바다처럼 넓고 수정보다 맑은 호수가 잔잔하게 물결쳤다. 20년, 20년 만의 빅토리아호는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박사님께선 자문 위원으로 복귀하셨다면서요?” 마이키의 질문이었다.

"그래. 허울만 좋은 자리지. 그나저나 자네도 여기 재취직한 건가?"

"예, 그런 셈이죠."

"예전에 자네는 자유인을 자처하지 않았나? 2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옛 직장에 목을 매는 이유가 뭔가?"

나는 비꼬듯이 물었고 그는 솔직한 웃음으로 대꾸했다.

"돈이 없으면 자유도 없더군요." 그러더니 힐끗 고개를 돌려 궤도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젊었을 적엔 꿈을 걸고 일한 곳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나쁠 건 없겠죠."

월면 개발, 우주 개척, 지구의 내일, 인류의 희망, 웅대하고 거창한 꿈 때문에 죽거나 미친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은 장엄하고 침중한 장례식과 순결하고 깔끔한 정신병동, 상실과 망각이었다. 돌이켜보면 덜 익은 오렌지마냥 파랗고 슬픈 꿈이었다.

"어떤 자리인가?"

"국장입니다. 안전 관리국 국장." 마이키는 쑥스럽다는 듯이 턱을 문질렀다.

"안전 관리국 국장이라……  자네한테 딱 어울리는 자리군."

내 말에 그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아요. 박사님도 기억하고 계시겠죠? 제 운전 실수로 토마스를 구하지 못했어요."

가까운 곳에서 경쾌한 소리를 그리는 화물선이 지나가며 호수에 비친 하늘, 구름 한 조각 없는 새파란 하늘, 그 날의 성층권처럼 샛파란 하늘이 일렁이며 흐리멍텅하게 뭉개졌다. 나는 목 메인 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결코 자네 실수가 아닐세. 내 잘못이었어.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을,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서둘러 뛰라고 한 게 잘못이었어."

마이키는 납작한 돌멩이를 주워들어 날렵하게 집어 던졌다. 동강동강, 돌은 멀리 수평선을 향해 물수제비를 뜨며 거울 같은 수면에 점이점이 파문을 남기고 퐁 소리를 내며 운명처럼 가라앉았다.

"아뇨,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겠죠. 어쩌면 그건 토마스가 원한 결과였는지도 모르니까요." 

"그게 무슨 뜻인가?" 

"그는 왼손잡이였죠." 마이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시겠어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본능적으로 왼팔을 내밀었다면 조금도 이상할 게 없죠. 하지만 오른팔을 내밀었다는 건 일부러 그랬다는 뜻이잖아요?"

나는 토마스가 왼손잡이였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었다. 그가 일부러 그랬다는 사실을, 그가 스스로 죽음을 불렀다는 사실을, 그가 기쁘게 최후를 반겼다는 사실을!

"그래, 그랬겠지." 나는 중얼거렸고……

"예, 맞아요. 그건 자살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영웅다운 죽음을 선택하고 남은 사람들에겐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죄책감을 떠안긴 겁니다. 물증도 없고 확증도 없지만, 전 그렇게 믿습니다." 마이키는 한숨지었고……

"그래, 아마도 그렇겠지." 나는 장단을 맞추듯이 다시 중얼거렸다.

마이키는 한동안 멍한 눈으로 사람들이 북적대는 항구를, 관광객을 가득 싣고 경쾌하게 물살을 가르는 요트의 움직임을, 하늘과 수면 사이에서 유유히 노니는 돛단배의 그림자를 따라가다가, 마침내 짙은 비애가 깔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전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살아 있으면 언젠가 꼭 좋은 날이 올 텐데 무엇 때문에 죽음을 재촉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입니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돌려 호수를 등지더니 천천히 산책로를 거슬러 올라가며 같은 말을 꾸준히 뇌까렸다. "뭣 때문에…… 대체 뭣 때문에?"

휘적휘적 걷는 마이키를 굼실굼실 쫓아가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살아 있으면 좋은 날이 오겠지, 그래, 한 때는 그렇게 믿었지. 하지만 지금은?

문득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인간을 모멸하고 억누르는 강대한 푸른 빛과 인간의 의지로 우뚝 선 거대한 검은 첨탑이, 인간의 꿈이 서린 드넓은 흑해(黑海)에서 쫓겨나 지상에 발이 묶인 초라한 망명객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목소리를 하늘에 그린다.

 - 살아 있으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

여전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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