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쯤 전에 썼던 장편 스페이스 오페라의 서두 부분을 작년에 다시 고쳐쓴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가볍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


<방랑자>

#1. 그림자

누런 종이에 먹물을 흘린 듯이 우중충한 하늘이었다.

거대한 탑이 짙은 구름의 바다를 꿰뚫고 서 있었다. 맑은 날에는 오만한 군청색으로, 오늘처럼 흐린 날에는 윤기 없이 밋밋한 흑철색으로 보이는 탑의 이름은 궤도 엘리베이터였다. 그 시발점은 정지 궤도에 뜬 우주 정거장, 종착점은 지상의 여객 터미널이었다.

가끔 가다가 우주 정거장을 지나쳐 지상에 직접 내려오는 배도 있었다. 먹구름을 헤치고 내려오는 우주선이 시커먼 하늘에 하얗고 긴 자취를 비명처럼 새기면, 철없는 아이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어른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우주선이 뜨고 내리는 것은 서사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일상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오랜 여정을 끝마치고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단단한 대지를 밟으며 중력의 속박을 찬미했다. 그리고 발걸음도 가볍게 도시로 향했다.

먹빛 하늘 아래, 거리는 잿빛이었다. 생기를 잃고 박제된 건물들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유령처럼 춤추며 돌아다녔다. 을씨년한 거리에서 뱃사람들이 찾는 것은 술집,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한 잔의 술이었다.

여독을 풀기 위해서, 고독을 달래기 위해서, 쓸쓸함을 잊기 위해서, 뱃사람들은 오만 가지 핑계를 갖다 붙이며 술을 마셨다. 그것도 보통의 술이 아닌, 냄새만 맡아도 코가 문드러질 것만 같은 독주(毒酒)만 골라서 물 마시듯 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하지만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는 것은 뱃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었다. 법적인 성인이라면 누구나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

'그러니까 나도 한 잔 마셔도 괜찮겠지.'

카디엔 중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중키에 넓은 어깨를 지닌 젊은이였다. 다부진 몸집을 감추기라도 하듯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쥐색 코트를 걸쳤다.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림질한 목깃은 비스듬히 세우고, 두 손은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옆 가르마를 타서 단정하게 넘긴 검은색 머리칼은 찬바람을 맞아 하늘하늘 흔들렸다. 넉넉하고 서글서글한 인상, 하지만 차가운 탄회색(炭灰色) 눈동자는 면도날처럼 예리했다.

그는 빨간색, 노란색, 하얀색, 검은색, 가지각색으로 빛나는 차들이 거친 숨소리를 일으키며 빠르고 민첩하게 오가는 차도를 가로질러,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히며 복작대는 큰길로 올라갔다.

길가에 세워진 시계탑이 가리키는 시간은 잉야르-에졸 표준시로 오후 5시 50분. 다른 곳이라면 술판이 벌어지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에졸, 아침밥보다 해장술이 더 많이 팔리는 항구였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보다 취한 사람을 상대로 하는 장사가 더 쉽고, 많이 남는 법이지.' 카디엔 중위는 속으로 그렇게 뇌까렸다.

에졸의 인구는 천 이백만을 헤아렸지만, 실제로 터를 잡고 사는 사람은 팔백만에 미치지 못했다. 나머지 사백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뜨내기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호방한 뱃사람을 자처했고, 지상에서의 짧은 시간을 말술을 퍼마시는 걸로 허비하기 일쑤였다.

그 결과, 에졸은 술집으로 넘쳐날 지경이 되어 버렸다. 넓은 길에서 좁은 골목길에 이르기까지, 한 집 건너 하나가 술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카디엔 중위가 찾아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발길이 향하는 곳은 [그림자], 세월에 뒤틀리고 비바람에 깎여 군데군데 금이 가고 칠이 벗겨진 하얀색 5층 건물의 지하에 둥지를 튼 술집이었다.

건물 입구엔 초라하게 퇴색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카디엔 중위는 곁눈질로 가게 이름을 확인하고선 곧장 어두침침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머리 위의 할로겐 등은 슬프게 깜박이고, 발 밑의 그림자는 구불텅하게 춤을 췄다.

'뭐, 술집이 적당히 낡은 것도 나쁘진 않지. 그래야 술맛이 나니까.'

계단 끝에선 허름한 나무 문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디엔 중위는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대신, 어깨로 밀듯이 하며 문을 열었다.

삐걱, 역사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혼란스런 시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른 개가 넘는 원형 테이블이 무작위로 늘어선 넓은 공간이었다. 어느 테이블이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바깥은 싸늘하지만, 여기엔 뜨거운 열기가 충만했다.

한쪽 구석엔 천박한 욕설을 웅얼거리며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주정뱅이가 있었다. 그 옆자리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용이 불분명한 계약서를 들이미는 사기꾼이, 건너편엔 낮은 목소리로 긴요한 정보를 주고받는 수상한 차림새의 신사가 보였다.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테리어스 성단의 장사치가 떠들썩하게 현실을 즐기는 반면, 이드문 제국의 몰락한 귀족은 침침한 불빛을 등지고 앉아 싸구려 술을 홀짝이며 현실을 잊으려 애썼다.

한 잔의 술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우의를 다지고 때로는 악감정을 드러내고 때로는 싸움을 벌이는 공간, 그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술집이었다.

양쪽 벽면에는 거대한 스크린이 마주보고 붙어 있었다. 왼쪽에선 무미건조한 문자와 숫자의 행렬이 차갑게 명멸하며 느릿느릿 지나갔다. 그것은 궤도 엘리베이터의 운행 예정표, 그리고 우주선의 발착 시간표였다.

오른쪽 스크린에선 준마(駿馬)에 올라탄 사내들이 조그만 공을 둘러싸고 하얀 스틱을 휘두르며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규칙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 그것은 에졸 시의 메인 스타디움에서 진행중인 격구(擊毬) 경기였다.

열렬한 격구 팬을 자처하는 카디엔 중위는 장내를 가로지르는 도중에 연신 화면을 힐끗거렸다.

'오늘은 아즈다니엘이 출전했군. 저런, 저렇게 하면 안 되지! 그러고 보니 이번 달엔 한 번도 경기장에 가 보질 못했네. 다음 달엔 경기를 볼만한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정말 시끄럽군.'

선수들이 스틱을 휘둘러 공을 후려치는 소리도,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도, 관객들의 열렬한 응원도, 취객들이 흥청망청 떠드는 소리에 파묻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국제 무역어인 구(舊) 아사 어(語)를 중심으로 해서, 마구잡이로 뒤섞인 세계 각지의 언어로 온 사방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휴가를 받아 나온 젊은 군인들은 자기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은어로 대화를 나누며 낄낄거렸다. 코가 뒤집혀질 정도로 진한 향수를 아낌없이 뿌린 흑수성 대공국(黑水星大公國)의 장사치들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신(新) 아사 어로 수근대고 있었다. 허름한 옷을 걸쳐 입은 뱃사람은 에딜 어로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용인(龍人)은 아무 말이 없었다. 파충류에서 진화한 차가운 피가 흐르는 종족들은 술의 유혹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술은 그들의 몸을 뜨겁게 달구지 못했고, 정신을 고양시키지도 못했고, 영혼을 해방시키지도 못했다. 다만 혀끝을 시리게 할 뿐이었다.

'하여간 원숭이들이 하는 짓은 이해하기 어렵군. 도대체 저런 걸 뭐하러 퍼마셔 대는 거지?'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솥뚜껑만한 손으로 커다란 대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주전자 분량의 물소젖을 단숨에 들이켰다.

카디엔 중위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젠장, 저 덩치들이 먹는 건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군. 어떻게 저 비린내 나는 물소젖을 저렇게 먹어대는 걸까?'

그는 머리를 흔들며 카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운터 앞의 바에는 사람들이 간격을 두고 듬성듬성 떨어져 앉아 있었다. 카디엔 중위는 왼편 끝자리에 자리를 잡고, 코트를 벗어 등받이에 걸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겨서 딱 소리를 내며 바텐더를 불렀다.

"여기 흑맥주 한 잔."

말쑥한 옷차림의 바텐더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맑은 흑옥빛 액체가 담긴 큼직한 유리잔이 나왔다. 깔끔하고 순수한 보리 냄새, 묵직한 뒷맛을 혀끝에 남기는 흑맥주는 에졸의 토박이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다. 중위는 잔을 입술에 갖다 대며 슬그머니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번들거리는 잿빛의 눈동자는 이름 모를 사람들을 차례로 건너뛰어 반대편 끄트머리에 앉은 두 사람을 포착했다.

하나는 상큼하고 푸르른 연두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였다. 나이는 열 일곱, 팔다리는 섬세하고 허리는 가늘어서 힘껏 껴안으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했고 짙은 녹색 눈썹은 활처럼 휘어졌고 크고 맑은 눈동자는 투명한 갈색으로 빛났고 콧날은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탄산 음료와 얼음이 담긴 높은 유리잔을 어루만지는 가냘픈 손가락엔 즐거움이 배었고, 빨대로 음료수를 빨아올리는 진홍빛 입술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거야 원, 천사가 따로 없군.'

중위는 맥주를 입에 머금고, 그녀와 팔짱을 끼고 번화가를 누비며 데이트를 즐기는 광경을 머릿속에서 그렸다. 하지만 눈가에 행복한 웃음을 떠올리는 것도 잠시, 그는 달콤한 꿈을 떨치고 씁쓸한 술을 삼키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천사에게 손을 댈 수는 없을 거야. 워낙에 지독한 악마가 딸려 있으니까 말이야.'

소녀의 바로 옆에는 동상처럼 차갑고 단단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얼핏 보기에 나이는 20대 중반, 하지만 30대의 노련함과 40대의 연륜이 후광처럼 감돌았다. 넓고 듬직한 어깨엔 구릿빛의 가죽 점퍼를 걸치고 길고 탄탄한 다리엔 헐렁한 회색 바지를 입었다. 장딴지부터 발끝까지는 새까만 가죽 장화로 튼실하게 감쌌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선 흔해빠진 뱃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코앞에서 눈을 마주치면, 제아무리 강철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고 할 말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의 얼굴은, 부드러운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으로 이뤄진 조각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적이라기보다는 전위적인 청동 조상(彫像)이었다.

준수하고 깨끗한 미남자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오른쪽에 한정되어 있었다. 왼쪽 이마부터 왼뺨을 따라 턱과 목에 이르기까지, 나머지 절반은 벼락맞은 고목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왼쪽 귓바퀴는 흔적만 남았고 가느다란 눈썹은 듬성듬성했다. 뜨거운 열기에 녹아서 뭉그러진 흔적은 깊은 균열처럼 뺨에 새겨졌고, 거무죽죽하고 불그스레하게 죽은 피부를 따라 거칠게 꿰맨 자국이 산맥처럼 길게 턱밑까지 이어졌다.

깊은 바다처럼 푸르른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왔다. 희끄무레한 불빛은 소용돌이 문양을 그리는 흉터를 붉은 빛으로 밝혔다. 역삼각형의 눈, 분노가 응집된 황록색의 눈동자는 냉랭한 금속처럼 번쩍이며 저주받은 운명을 직시했다.

'여하간 지독한 얼굴이야.'

카디엔 중위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돌렸다. 그 대신, 귀를 쫑긋 세웠다.

사내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술집 주인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리고 주변의 소음은 그들의 목소리를 마치 스폰지처럼 빨아들였다.

'젠장, 덩치는 꼭 곰만한 녀석이 계집애처럼 수근대기는……' 카디엔 중위는 원망스런 눈초리로 술집 주인을 바라봤다. '좀 큰소리로 말하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나? 무슨 얘길 하는지 전혀 들리질 않네.'

주인장은 회색 정장을 입은 사십 대 중반의 거한이었다. 축 늘어진 뱃살과 이중으로 접힌 턱 때문에 둔하고 답답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메기처럼 넓은 입에선 선량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카디엔 중위는 머릿속에서 술집 주인의 자료를 정리했다.

'랏스 연합군 정보부 제 3국 소속, 이딜 클라루즈 상사. 나이는 마흔 넷이라……' 그는 슬쩍 눈을 굴려 술집 안을 살폈다.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잘도 정보를 교환하는군.'

겉보기엔 평범한 술집, 그러나 실제로는 랏스 연합군의 정보 중계지, 그것이 [그림자]의 정체였다.

이드문 제국에 망명한 랏스 연합 정부와 십성 동맹(十星同盟)은 상호 군사 원조 조약을 체결한 관계였다. 하지만 랏스 연합군은 12년 전에 최후의 거점 바라쿠사가 함락된 것을 마지막으로 철저하게 몰락해 버렸다. 머릿수만 채운 의용병, 한 줌에 불과한 해적(海賊) 함대로 겨우 체면치레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연합군 정보부는 여전히 왕성한 행동력을 자랑했다. 그들은 십자 연맹 깊숙이까지 퍼진 정보망을 이용해 민감하고 소중한 정보를 잔뜩 긁어모았다. 그리고 십성 동맹은 그 정보를 제공받는 대가로, 랏스 연합의 해적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줬다.

'따지고 보면 저 녀석도 그 중 하나지. 조금 특별하긴 하지만 말이야.'

카디엔 중위는 맥주잔을 입에 대면서 곁눈질로 푸른 머리카락의 짐승을 쳐다봤다. 그는 십자 연맹에겐 악몽이었지만 랏스 연합에겐 영웅이었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겐 부담스런 골칫거리였다. 그를 보호하고 감시할 것, 그것이 카디엔 중위에게 떨어진 명령이었다.

'하지만 내가 저 치를 따라다녀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 여기 있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달려들어도 당해내지 못할 텐데 말이지.' 맥주 거품이 묻은 중위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뭐,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는 현상금을 노리고 덤벼드는 멍청이가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야 없겠지. 그래 봐야 돈을 벌긴커녕 불꽃에 뛰어드는 불나방 꼴이 될 뿐이겠지만.'

그 때, 젊은이 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나는 갈색 자켓을 걸친 우락부락한 뱃사람, 다른 하나는 동맹 해군의 검은 제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장교였다. 어깨에 달린 소위 견장은 매끄러운 은빛, 깊이 눌러쓴 제모 아래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시원한 감색이었다.

그들은 카디엔 중위의 오른편 빈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흑맥주를 주문해 가볍게 목을 축이며 쾌활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요즘 벌이는 어떤가?" 해군 소위의 질문이었다.

"죽을 맛이야. 그 빌어먹을 십자 연맹 놈들이 또 관세를 올렸어. 젠장 맞을, 요즘 같아선 정말이지 그 자식들을 상대로 해적질이라도 하고 싶다니까." 선원이 푸념을 늘어놨다.

"위험한 소린 하지 말라고, 메나인. 아직 우리하고 십자 연맹이 전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야."

"그야 그렇지. 전쟁을 하는 건 랏스 연합 놈들뿐이니까. 정말 겁도 없는 놈들이지."

카디엔 중위는 한숨을 쉬었다. 이 모자란 얼간이들아, 랏스 연합군은 겁이 없는 게 아니라 잃을 게 없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감시자의 덕목은 침묵이기 때문에. 그는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한 모금의 맥주와 함께 되삼켰다.

푸른 머리칼의 사내는 술잔을 내려놓고 옆자리의 소녀에게 속닥거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소녀는 공손한 태도로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보통 사람들에게 친숙치 않은 낯설고 생경한 단어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단어의 존재를 알아차린 해군 소위의 얼굴엔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잠시만요, 아가씨."

그는 길게 손을 뻗어, 막 자리를 떠나려 하는 소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시죠?" 소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박였다.

"방금 전에 뭐라고 말한 겁니까? 그러니까……주, 주인님이라고 말한 건가요?"

젊은 소위는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더듬거렸지만, 어린 소녀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예, 제 주인님께 다녀오겠다고 말씀 드린 게 맞습니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소녀는 깃털처럼 가볍게 소위의 팔 사이를 빠져나갔다. 종종걸음으로 테이블 사이를 가로질러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던 해군 소위는, 고개를 돌려 '주인님'이라 불린 사내를 바라보며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동맹 회의의 이름으로 자유가 약속된 땅에 이드문 제국의 시대착오적인 봉건영주가 올 줄은 몰랐군요."

그것은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넘겨짚지 말게. 난 이드문 제국 황제의 신민(臣民)이 아니고, 시대착오적인 봉건영주도 아니니까. "

"젊은 처녀를 노예처럼 다루는 짓거리는 똑같지 않습니까?" 소위가 반박했다.

"그렇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그녀를 '노예처럼' 부린 적이 없어. 다만 '노예로서' 부려먹을 뿐이지."

"예?"

미묘한 표현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젊은 소위를 위해 사내는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그녀는 진짜 내 노예거든."

거칠게 빈정대는 목소리에 섞인 것은 지독하게 불유쾌한 단어. 그 단어를 들은 사람들은 대화를 멈추고 그들의 설전에 귀를 기울였다.

"뭐라고요?" 젊은 소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방금 말한 그대로야. 뒤라인에서 큰 돈을 주고 샀지."

"이제 보니 노예 상인이었군요. 하지만 여긴 혼돈이 지배하는 뒤라인이 아닙니다. 평화와 자유의 원칙이 살아 있는 십성 동맹입니다. 그녀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미안하네만 이번에도 틀렸어. 나는 노예 장사처럼 큰 돈벌이하곤 인연이 없는 사람이거든."

사내는 술잔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청동처럼 차가운 눈으로 소위를 주시하며, 차디찬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내 앞에서 자유 운운하며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내는 건 집어치우는 편이 좋을 거야. 나한테 없는 것 중 하나가 참을성이니까 말이야."

소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사내의 오른손에 들린 작은 유리잔에 도전적인 시선을 던졌다.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의 좁은 공간, 그 공간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렸다.

쨍강, 날카로운 소리를 내뱉으며 유리잔이 쪼개졌다. 후두둑, 유리조각이 바닥에 비처럼 쏟아지며 찬란한 광채를 흩뿌렸다. 공간의 일부분을 일그러뜨리고 사물을 직접 파괴하는 힘, 그것은 제 3급 사념(思念) 능력이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군인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질렸다.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선원 친구, 메나인은 정색을 하고 일어나 소위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하틴? 민간인을 상대로 사념을 쓰다니, 미쳤나?"

"이거 놔!" 하틴 소위는 버럭 화를 내며 친구의 손을 뿌리쳤다. "참을성이 어쩌고 저째? 저 건방진 자식에게 버릇을 가르쳐 주고야 말겠어!"

사내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렸다. 하얀 이빨이 드러난 입술 사이로 킥킥대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비웃음,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 정도 솜씨로 내게 버릇을 가르쳐 주겠다고?"

불길한 웃음소리가 갑자기 뚝, 멈춰 섰다. 사내는 한기 서린 눈빛을 번득이며, 오무리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펼쳤다.

"철없는 애송이 같으니라고, 버릇을 배워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애송이? 너 지금 날 애송이라고 한 거냐?"

하틴 소위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모욕을 폭력으로 청산하기 위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움직임이 끊어진 영화 필름처럼 정지해 버렸다. 하틴 소위의 눈은 불신과 경악으로 끓어 올랐다. 그리고 멍하니 벌어진 입에선 짧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맙소사!"

사내의 손아귀 안에는 핏빛 갈선주가 떠 있었다. 유리잔은 깨어져 흩어졌지만 술은 단 한 방울도 흩어지지 않은 채, 잔에 담긴 듯한 모양새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에 고정되어 있던 술이 서서히 증발하기 시작하면서, 손가락 사이로 하얀 수증기가 연기처럼 피어 올랐다. 유기물의 세포 조직과 무기물의 분자 결합 상태를 자유로이 조종하는 힘, 그것은 제 2급 사념 능력을 의미했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고, 침묵은 무겁게 주저 앉았다. 뚱뚱한 장사치의 손에서 떨어져 내린 술잔이 바닥에 부딪히며 깨지는 소리, 호리호리한 선원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 건장한 용인(龍人)이 비늘을 세워서 바르르 떠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한데 묶여 천둥 소리처럼 울렸다.

"애송이 녀석." 사내는 오른손을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게 세워서 내밀었다. "꿇어!"

하틴 소위는 턱에 결정타를 맞은 권투 선수처럼 휘청거리다가 두 무릎을 꺾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뒤이어 두 팔이 흐느적거리며 공중에 떠올랐다. 천천히 어깨가 움직이고, 팔꿈치가 꺾이면서, 광기 어린 야상곡을 연주하는 음악가의 손가락처럼 격렬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그 자신의 목을 노리고 안쪽으로, 안쪽으로 활처럼 휘어져 들어왔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는 손을 쳐다봤다.  지금 하틴 소위의 손가락을, 팔뚝을, 어깨를, 사지를 실처럼 옭아맨 것은 강력한 염동력(念動力)의 끈, 그리고 그 끈을 조종하는 것은 녹주석(綠柱石) 빛깔로 번들거리는 흉악한 의지였다.

사내는 적의로 가득찬 눈길로 하틴 소위를 노려보면서 이죽거렸다.

"자, 이제 내가 버릇이란 걸 가르쳐 줄 테니,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배우는 게 좋을 거야."

하틴 소위는, 자신의 목줄기를 노리고 덤벼드는 자신의 손가락을 피해 자신의 고개를 필사적으로 젖혔다. 하지만 헛된 발버둥이었다. 같은 몸뚱이에 달린 손을 피해서 도망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새 넓은 손바닥이 목울대를 감싸 쥐고, 강인한 손가락이 경동맥을 파고들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관자놀이의 혈관이 튀어나오고 도축 당하는 가축처럼 꺽꺽대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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