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0년 전에 썼던 글입니다.
한동안 블로그 포스팅에만 주력했더니 다시 글을 쓰기가 만만치 않네요.
'문학동네' 오픈을 기념하여(응?) 예전 글이나마 올려 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에피메테우스입니다.
아마 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겁니다.
신화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래도 고맙게도 저의 가계에 대해서는 밝혀져 있더군요.
저의 형님 프로메테우스가 아주 유명했기 때문에 그 유명세를 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형님은 신입니다.
올림푸스 산에 올라 있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그러기에 최고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우스조차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거신족이지요.
다른 거신족들이 올림푸스의 신들과 전쟁을 벌인 후에
하데스가 다스리는 하계에 감금된 반면에
저희 형님은, 그리고 형님 덕택에 저까지도 자유의 몸으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앞에 잠깐 언급한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능력 때문이지요.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하지만 이것은 형님과 저의 차이점을 알리기 위한,
그리고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변명 아닌 변명의 기초가 되는 것이기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형님은 '미리 아는 자'이고,
저는 '나중에 깨닫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에서도 그렇지요.
형님은 신들이 '판도라'를 만들어 보낼 것을 미리 알고서 저에게 경고했지만,
저는 '판도라'의 매력에 빠져서 형님의 경고를 까맣게 잊어버렸답니다.
뒤늦게야 형님의 경고가 그녀에 대한 것임을 알아차렸지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저를 어리석은 존재로 취급하며 조소를 일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의 변명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형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그리고 앞 일을 미리 아는 신으로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님이 과연 행복했을까요?
저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결코 아닐 거라구요.
형님은 말 그대로 미래를 내다보시는 분입니다.
형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그들의 타락과 배은망덕함을 예견하셨기에
창조의 기쁨을 온전히 만끽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실 결심을 하셨을 때는
제우스의 분노를 한 몸에 받으실 각오를 이미 하셨을 것이며,
그 죄의 댓가로 코카서스 산정에 쇠사슬로 묶여
끊임없이 새로 자라는 간을 독수리에게 파먹힐 때에는
풀려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형님에게는 이미 새로운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실망/좌절/기쁨은 형님과 아무 관계없는 말이었던 것이지요.

저는 한치 앞의 일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투성이고
경험을 통해서 하나하나 깨닫기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결과를 알 수 없는 일에 전념하고는 실망을 한껏 안게 될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실망이 클수록, 그리고 좌절이 깊을 수록
그만큼의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노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형님이 영원히 경험할 수도,
그리고 미리 알 수도 없는 감정들을 느낄 수 있는 것이죠.
판도라가 상자를 연 후에
그녀와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신화가 이야기하던가요?
저의 형님 프로메테우스가 코카서스 산정에서 풀려난 후
신화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던가요?
과연 제가 형님보다 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르실 겁니다.
아마 알 수 없을 겁니다.

이제 저에 대해서 어리석은 자라느니,
판도라를 잘못 단속해서(?) 세상에 모든 악한 것들이 떠돌게 만든 자라느니
그런 비난은 그만해 주셨으면 합니다.
궤변일지도 모르겠지만
판도라로 인해서 세상이 더 살만해지지 않았나요?
기쁨을 기쁨으로 느낄 수 있고,
행복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냔 말입니다.
저는 지금도 형님과 자리를 바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거든요.
이만하면 저에 대한 변명이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