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직서


LCD 창에 떠오른 그룹웨어 화면을 무심코 쳐다봤다.
그리고 바로 메일 아이콘을 클릭한다. 여느때와 같이 수 많은 수신, 참조 메일이 떠올랐지만 메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그야말로 미치기 일보직전의 순간 이었고
수 많은 생각의 조각들이 머리 속을 떠다녔다.

가슴의 편린을 미친 듯이 타이핑하고 싶었으나 내 피속에 이미 비겁한 월급쟁이의 속성이 가득차 있었음일까
차마 쓰고 싶은 내용을 쓸 수 없었다.

단지 '일신상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 두고자 합니다." 하고 매우 짧은 메일을 써서 부문 팀장에게 보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내 이름은 김범기. 한국 아이로보의 기획팀 과장이다.

내가 사직서를 쓰게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회사 내에서 PB 프로젝트의 기획을 나는 책임지고 있었다. PB 프로젝트는 미국 브라질 사의 '램프'를 모티브로 한 E-Book 프로젝트. 
 회사 나름대로의 짠 밥이 있었는지 여러가지 우여 곡절을 거쳐 PB 1은 작년 가을 출시했다.

일부 인터페이스 부분에서의 혹평이 있었지만 출시되자마자 순식 간에 5만 대의 판매. 소위 말하는 대박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체면
치례는  할 말한 수준이었다. 윗 사람들도 활짝 웃는 것은 아니었지만 회사 주가에 긍정적 영향을 끼쳐서인지는 차기 버전에 한번
대박을 노려보라는 덕담을 해주기도 했으며 정말 약소한 보너스를 받기도 했다.

그럭저럭 회사 생활이 재밌었는데... 제길 진짜 문제는 미국 브라질사가 아닌 오쳐드(Orchard)사에서 터졌다.

세상에 NuPad라니. 오쳐드의 신제품 NuPad는 나와 같은  하드웨어 종사자들에게는 공포의 마왕이라고나 할까.
오쳐드 사의 주력 모바일 제품이라고 할 수 있는 L폰의 핵심 OS를 가져 왔으며 껍데기는 디자인의 오쳐드 답게
심플하고 쌈박하게 잘 뽑았다. 게다가 아이로보와 같은 중소 기업에서 꿈도 꿀 수 없는 299불이라는 살인적인 가격.

브라질의 램프와는 단지 이북 컨텐츠만을 비교당하는 그래도 해볼만한 경쟁이었지만 램프는 다르다.
이건 이북이기도 또한 완벽한 타블렛 PC 및 인터넷 단말기이기도 했다. 혹자는 일반 IPS LCD을 쓰는 NuPad를 보고
E Ink 패널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혹평을 하기도 했다.

허나 백명중 아마 구십오명은 돈 50만을 가지고 평범을 이북을 살래 아니면 NuPad를 살래라고 하면 아마도 NuPad를 살 것이다.
안봐도 블루레이~ 아닌가?

그리고 바야흐로 한 달전 NuPad는 미국을 시작으로 전세계 런칭을 시작했다.

우와 미국에서 판매 하루 만에 30만대가 팔렸단다. 그리고 수 많은 출판사와 L폰용 어플을 만들던 수 많은 써드 파트 회사들이
쭉쭉 NuPad 전용 컨텐츠와 어플리케이션을 뽑아내고 있다.

그리고 나의 PB 프로젝트는 돗단배 마냥 무개념의 바다를 떠다녔다.

사장과 개발이사는 NuPad에 자극을 받았는지 알듯 모를 듯한 스펙쉬트를 매일 매일 던지면서 끝없는 회의로 나를 몰아 넣었는데
내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야하는 지도 모르면서서 매일 매일 3~4간의 무개념의 회의에 붙들리면서 나의 그리고 우리 동료들의
인내심은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NuPad가 세상에 판매된지 한 달만에 나는 결국 사직서를 던지기에 이르렀다.

알아. 아이로버.. 그래도 한국에서 하드웨어쪽에서는 이름 있는 회사다. 두세물 갔지만 2~3년은 더 버티겠지. 아마도..
비록 사모 펀드로 경영권이 넘어갔지만 꼬박꼬박 월급은 잘 나온다고...
그런데 이제 틀렸다. 경영진이 욕심은 너무 많은데다가 판단력은 느려 터졌어. 거기다 사원들을 쪼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도 없고
한 때 MP3 시장 점유율 세계 1위나 순이익 1천원 돌파, 코스닥의 다크호스라는 말은 전설이 되었을 뿐이고..

노가다를 하던 호빠를 뛰던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

아마 부문 팀장이 좀 더 있으라고 잡기는 하겠지 .

" 미안해.... 나도 숨 좀 쉬어야 겠어.,,"

에잇 오늘 오후는 반차로 짼다고 결심하면서 언젠가 써놓았던 케비넷 맨 아래 칸의 두툼한 사업 계획서를 들고 무작성 사무실을 뛰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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