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물입니다.

졸문입니다만 어여삐 보아주시길.

분량상 세 개로 나누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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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김춘수의 시, 꽃 中에서

 

 

1.

 

 

 차창 밖으로 어스레하게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힘을 잃은 태양이 마지막 안간힘으로 드리워놓은 불그죽죽한 얼룩도 검게, 검게 스러져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는 아무런 빛도 온기도 밝혀주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저 불길한 실루엣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을 뿐입니다.
 폐허. 죽음이, 그리고 죽음 너머의 자들이 지배하는 주인을 잃은 도시. 당신과 나, 이곳에서 벌써 사흘째입니다. 한때는 주변의 부러움을 사던 은색의 신형 고급 세단 안에 발이 묶인 채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 잘난 은색 세단도 이제 와서는 어떻게 움직여 볼 도리가 없는 상처투성이의 쇳덩어리일 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덕택에 살아서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희미하게나마 놓지 않을 수 있었으니……. 참 고마운 노릇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이젠……. 한계입니다. 당신의 이마 위에 살짝 손을 얹어 봅니다. 이내 저절로 눈 사이가 살짝 찌푸려집니다. 당신의 가쁜 숨소리, 열꽃이 피어 짙게 상기된 양 볼, 그리고 몽롱한 의식 속에서 악몽이라도 꾸는 듯 가끔씩 내뱉는 뜻 모를 단어들……. 모든 것들이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이제는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고, 그저 겁먹고 주저앉아 있어봤자 아무 소용없다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나를, 그저 당신이라는 넓은 품 안에서 웃고 숨쉬는 것밖에 모르던 화초 같던 나를 내리누르고, 비틀고, 쥐어짜내고는, 이 주저앉아 버린 쇳덩어리 밖으로 뛰쳐나갈 것을 다그치고 있습니다.
 압니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당신이 저 소름 끼치는 괴물로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더 이상 내가 사랑하던 당신이 아니게 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이제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지금의 당신은 중독자입니다. 당연한 이야기로, 당신에게는 해독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더 버텨줄 수 있을까……. 아마 그리 오래는 아닐듯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내가 해독제를 구해올 수 있다면 당신의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다시 살릴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을 지금의 고통에서부터 구원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귀하디 귀하다는 해독제만 내 손에 들어온다면 말입니다.
 애초에 해독제를 구할 길이 아예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괴롭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어줍잖은 희망보다는 체념 쪽이 훨씬 수월한 법이니까요. 그런데 왜 희망이라는 것은 그리 얄밉게도 우리 주변을 닿을 듯 말 듯하게 배회하는 걸까요. 그 해독제가……. 있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바로 내 눈 앞에, 손 닿으면 뻗을 거리에 말입니다.
 우리 정면의 대략 20여 미터 앞에, 검은 색의 낡은 승합차 한 대가 나뒹굴고 있습니다. 긴급수송, 네 글자가 차량의 옆면에 선명합니다. 저 안입니다. 저기까지만 가면 됩니다. 차 문을 열고 딱 다섯을 셀 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도착할 수 있는, 그리고 다시 다섯을 셀 시간만큼만 뛰어오면 돌아올 수 있는 눈 앞의 저 검은 색 밴 안에 당신을 온전히 돌려놓을 수 있는 해독제가 있습니다. 네. 내가 다섯을 딱 두 번만 세고 나면 당신은 살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두렵습니다. 내가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당신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 주실 건가요.
 갑작스레 가슴이 싸하게 아파 옵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창밖에는 한 체격 좋은 사내가 침을 뚝뚝 흘리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습니다. 흐리멍덩한 눈, 그나마 한 쪽 눈알은 밖으로 빠져 나온 채 사내의 콧잔등 부근에 데룽데룽 매달려 시계추마냥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왼뺨은 맹수에라도 당한 것처럼 흉하게 뜯겨나가 뼈가 드러난 상태입니다. 얼굴뿐 아니라 몸의 곳곳 또한 죄다 상처투성이입니다. 상처들은 하나같이 뼈가 드러날 만큼 깊고도 치명적입니다. 상처자국마다 눅눅하게 엉겨 붙어 있는 피고름 덩어리들이 마치 썩은 잼처럼 줄줄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누더기가 다 된 사내의 옷차림 곳곳에는 오래된 핏자국과 시커먼 얼룩들이 그득그득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잘난 은색 세단의 실내에까지 스며 들어오고 있는 지독한 악취……. 네, 사내의 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내는 발병자인 겁니다.
 문득 사내와 눈이 마주칩니다.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아마 웃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납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꾹, 감습니다. 이젠……. 정말 한계입니다.

 

 

***

 

 

 우선, 당신의 딸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립 고등학교의, 그 안에서도 또래 학생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던 교내 스타였습니다. 성적도 좋았고 외모 또한 빼어났습니다. 성격이 조금 모나기는 했지만 나름 똑 부러지는 면이 있던 터라 주변의 평판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녀의 배경, 바로 당신이 그녀에게 드리워놓은 엄청난 크기의 후광이야말로 그녀를 빛나게 하는 진정한 아우라였습니다. 누구누구의 딸, 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선생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단단한 권위 그 자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신과 따님의 관계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당신의 앞에서 악다구니를 퍼부어대던 그녀의 모습이 문득 생각납니다. 피곤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릴 뿐이던 당신……. 당신은 그저 무력해 보였습니다. 지쳐 보였습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 왠지 안됐어. 화 내는 건 그녀였고 난감해 하는 건 당신이었습니다. 그 모습, 지독히도 부당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내 볼품없는 처지를 잠시 잊고서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정말 안됐어. 그것이 우리의 첫만남이었고, 당신의 첫인상이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시절, 당신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 걸. 당신의 모든 것을 당신이 책임져야 할 당신의 울타리 안의 그들에게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는 걸. 그런데 당신의 아내와 딸은 그것에 감사할 줄을 모르고 심지어는……. 아니, 아닙니다. 굳이 끄집어낼 이야기도 되지 못합니다. 걱정 마세요. 나는 누구보다 당신을 믿고 지지하기로 했으니까. 덕택에 내가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으니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 당신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여자였을까요. 아니, 어떤 아이였을까요. 그 시절의 나는 당신의 딸의 별 볼일 없는 동급생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미움을 한 몸에 받던 천덕꾸러기였습니다. 그녀는 학교의 스타였고……. 유감스럽게도, 스타의 적은 모두의 적일 수 밖에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반 전체가, 심지어는 담임선생님마저도 저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뭐, 이유는 다양합니다. 솔직하지 않아 보여서, 도벽이 있어 보여서, 왠지 비밀이 많을 것 같아 보여서, 뭔가 못된 짓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보여서……. 당신의 딸이 가져다 붙이는 대로, 모든 것이 나의 죄가 되고 업보가 되었습니다.
 내 탓이라면 내 탓입니다. 모든 것은 내 버릇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나는 어릴 적부터 항상 외톨이였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누군가 내게 호의를 가지고 말을 걸거나 하면 우물쭈물 시선을 피하고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웅얼거려대는 몹쓸 버릇이 있었거든요. 누가 보아도 그다지 보기 좋은 행동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타인이 내게 다가올 때마다 매번 움츠러들어서는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기 일쑤였습니다. 뭐랄까……. 주변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걷어낼 수 없는 투명한 철조망 따위가 놓여있는 것 같은 심정이 되어 버린다고 할까요. 굳이 넘으려고 했다가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 뻔한 철조망 말입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본의 아니게 무례한 짓을 반복하게 될 적마다 상대방이 좀 더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는 식의 바보 같은 생각을 매번 떠올려 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단정지어 버리는 순간 모든 잘못은 상대방의 것이 되고 나는 결백해질 테니까요. 아울러 스스로가 선물하는 값싼 위안을 얻게 될 것이고 말이죠. 물론 그 대가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의 가시는 더더욱 날카로워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이러한 낯부끄러운 바보짓을 줄곧 저질러 왔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한참 나를 노려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솔직 담백하게 싹 다 말해 줘."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다짐받아야만 하겠다는 기세. 그녀 특유의 오만함에 당연히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주 보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긴장으로 몸이 움츠러들었습니다.
 "……."
 그저 내가 본 걸 고스란히 털어놓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랬다면 그녀는 나를 그렇게까지 미워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나에 대해 고마움의 감정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목격한 두 사람, 그녀가 너무나도 미워하던 체육교사와 나의 또 다른 동급생에게 일말의 의리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서슬 푸른 시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 볼 엄두가 나질 않을 뿐이었습니다.
 동시에, 되도 않는 주판알 튕기기를 시작하고는 맙니다. 내가 입을 다물면 그녀는 나에게 화를 내겠지, 그렇다고 내가 입을 열면 또 다른 두 사람이 나를 미워하게 될 거야. 아, 어떡하지. 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여버립니다. 감히 그녀를 마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서 빨리 이 불편한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도합니다. 그녀의 사나운 시선 탓인지 목덜미가 화끈거립니다. 그리고 적막. 밑도 끝도 없는 적막. 온 세상이 입을 꾹 다문 채, 그녀와 나의 묘한 신경전을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참나."
 완전히 멈춘 듯했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조심스레 고개를 힐끔 들어 그녀를 훔쳐보았습니다. 경멸에 가득 찬 시선. 내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말이 통하는 년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몸을 홱 돌려 교실 밖으로 향했습니다. 몸의 긴장이 풀리며 현기증이 찾아왔습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보았습니다. 견딜만합니다. 이제야, 이제야 끝이 난 겁니다.
 얼마 뒤, 학교에는 약간의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체육교사는 사표를 냈고, 나의 또 다른 동급생은 전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따님은 이 두 사람대신 나를 열심히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2.

 

 

 밤은 공포의 시간입니다. 이미 한바탕 거친 발작이 당신을 휩쓸고 지나간 뒤입니다. 지금은 죽은 듯한 잠에 빠져들어 있는 당신……. 밤이 되면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가 더욱 힘들어지는 듯했습니다. 그저 격렬한 발작과 깊은 혼절을 주기적으로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아무튼 겨우 한시름 돌렸습니다. 손가락으로 이제는 반쯤 말라버린 눈물을 훔칩니다. 긴장이 풀리자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잠들 수 없습니다. 당신의 발작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까요. 이제 당신은 끝이 얼마 남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 나는 서둘러 정해야만 합니다. 기다릴지, 아니면 행동할지를 말입니다.
 우리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현재 우리가 있는 주변은 이른바 전술거점 즉, 정부에서 피난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공표한 일종의 집결지점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군인들은 이곳을 정찰합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비교적 운이 좋은 자들을 수용합니다. 만약 피난민들 중 중독된 자가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존엄사(尊嚴死) 처리를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해독제는 턱없이 모자라고, 자칫 중독자의 이송 도중에 발병이라도 했다가는 큰 재난을 초래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정말 운이 좋은 편입니다. 해독제가 바로 코 앞입니다. 당신을 구할 수 있는 그 귀한 물건이 바로 저기 승합차 안에 있습니다. 제때에 군인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당신과 나 둘 다 무사히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겁니다. 제때. 그래, 제때에 구조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견뎠습니다. 사흘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이제 한계입니다.
 '문을 열고 뛰쳐나가면서 다섯, 그리고 다시 다섯만 세면.'
 당신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의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입니다. 기다리는 게 아니라 행동을 해야만 할 때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결심…….
 창 밖의 사내는 창문에 코를 박은 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습니다. 발병자. 더 이상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이들. 사람들은 저들의 뇌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저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들 하지만…… 말이 안 통한다고 해서,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해서, 저들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보세요, 저 사내는 왜 이리도 간절하게 나를 바라만 보고 있는 걸까요. 왜 저들은 산 사람과 똑같이 움직이고, 무언가를 먹고, 무언가를 위해 싸우는 걸까요. 과연 우리는 저런 이들을 - 당신의 표현대로라면 - 영혼이 없는 자들이다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걸까요? 그저 혹시, 우리가 저들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뿐 저들도 우리에게 무언가 하소연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닐까요?
 이때, 사내의 콧잔등에서 데룽데룽 흔들려대던 눈알이 툭,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순간 상념에 젖어 잠시 잊고 있던 혐오감이 다시 물밀듯 밀려옵니다. 저 사내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이유?
 '그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
 맞아, 저들은 사람의 살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저 사내는 그저 나를 잡아먹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차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겁니다.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립니다. 팔뚝에 소름이 돋습니다.
 '저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어.'
 알다시피, 저들에게 살점이 뜯긴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치명적인 독에 중독이 되고 맙니다. 그 뒤, 큰 열병이 지나가고 나면 저들의 동족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 저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돼.'
 그런데 내가 밖으로 뛰쳐나가 저 사내와 직접 맞닥뜨릴 수 있을까요? 저 사내를 제치고, 해독제를 다시 가지고 돌아올 수가 있을까요? 나……. 난, 못해……. 할 수 없어. 그런 용기, 겁쟁이인 내가 끄집어낼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내가 미워집니다. 수치심이 치밀어 오릅니다. 이때.
 갑자기 당신의 입에서 격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놀라 돌아봅니다. 당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습니다. 또 다시 경련이 시작된 겁니다.

 

 

***

 

 

 나의 양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셨습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두 분이 나를 떠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도 어릴 때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시 어머니는 무척이나 외로움을 타셨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당신이 그다지 내켜 않는 입양을 별 말 없이 받아들이셨다는 확인할 길 없는 뒷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얼핏 전해들은 기억이 있을 뿐입니다.
 과거야 어쨌든 두 분 모두 내게 무척 성실하셨습니다.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나에게만은 제법 손들이 크셨습니다. 덕택에 어린 시절 내내 나의 먹성과 입성 모두 남부러울 것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쓸 것이 모자라 허둥대던 기억도, 무언가를 갖고 싶어서 끙끙 앓던 기억도 딱히 없습니다. 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만 하면 별다른 타박 없이 마련해주시고는 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조금 무리가 가더라도 개의치 않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내게 어떤 큰 대가를 바라신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가 두 분의 호의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그런,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도리 정도가 두 분이 바라신 보상이라면 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염치없게도……. 어느 순간부터 이 고마우신 두 분의 노력 모두가 무거운 짐처럼 내 어깨를 내리누르더란 말입니다. 이 기분은 뭐랄까…… 그래, 높은 이자의 빚 같은 것이 아주 느리게, 하지만 멈추는 법이 없이 쉬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가는 느낌이라고 하면 정확할까요. 분명, 나는 언젠가 이 보이지 않는 빚 덩어리에 숨이 막혀 버릴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공포는, 고통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문제였습니다. 나 혼자서, 오롯이 나 혼자서 만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나는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극복해내야만 했습니다. 결코 두 분의 헌신이 헛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노력했습니다. 나름의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필사적으로 노력을 했습니다.
 우선, 두 분께 항상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마움을 알고 이를 표현할 줄도 아는 당신들의 귀한 딸임을 증명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습니다. 베풂의 크고 작음은 상관없었습니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내가 얼마나 두 분께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려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소한 것에도, 예를 들자면 식탁 위에 매일같이 올라오는 마른 반찬 같은 것도 최대한 고맙게 먹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애썼습니다. 체질상 잘 먹지도 못하는 비린내가 역한 멸치조각을 생목이 올라오도록 오독오독 씹어대며, 행여나 내 얼굴에 싫은 티가 나지 않을까 전전긍긍 힘들게 웃어 보였던 적도 꽤나 여러 번입니다.
 행동거지가 올바른, 누가 보아도 참한 딸이 되어 드리고도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행여나 나의 경솔함 때문에 심려하시지 않도록 항상 생각하고, 또 생각한 다음에 행동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부모님께 걱정을 끼칠 것이 두려울 때면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습니다. 덕택에 학창시절 내내 그 흔한 수학여행 한 번을 가보지 못했지만, 그러는 쪽이 내 마음이 편했습니다.
 또한, 부모님을 끔찍이 생각하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두 분을 최우선에 두어 곰곰 따져보고, 조금이라도 두 분이 기뻐하실 것 같아 보이는 일은 모든지 했습니다. 특히 두 분의 생신을 비롯한 몇몇 기념일들은 나의 진심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내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정 돈이 궁할 때는 정성이 깃든 편지로라도 꼭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남기곤 했습니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음의 짐을 깨끗이 털어내고, 진정 좋은 딸이 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과는 달리 참 생각처럼 되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거였는지, 아니면 내 표현의 방식이 서툴러서였는지, 언제부터인가 부모님의 표정과 말투에 미묘하게나마 서운함 같은 게 언뜻언뜻 드러나곤 했거든요.
 "참 남 같다."
 어느 날 저녁, 설거지를 돕고 난 직후였습니다. 어머니는 정말 뜬금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습니다. 그뿐이었습니다. 이내 다시 심상한 표정으로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TV의 전원을 켜고, 돋보기 안경을 내려 놓으시고는 이내 드라마삼매경에 빠지시는 겁니다. 내 쪽으로는 시선 한 번 던지지 않고 말입니다. 기다렸습니다. 나를 바라봐 주시기를. 뜬금없는 이야기의 의미를 설명해주시기를. 하지만 아무 말씀 없이, 그저 TV연속극에서 눈을 떼지 않으실 뿐이었습니다.
 그날 밤늦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를 거듭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나 때문일까.'
 내게 문제가 없다면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나 때문일 거야.'
 갑자기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내 자신이 지독히도 싫어졌습니다. 나 때문인 겁니다. 내가 두 분의 은혜를 저버리고 있었던 겁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날 밤잠을 꼬박 설치고 말았습니다.
 창 밖이 희부옇게 밝아오기 시작해서야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두 분께 죄를 지어서는 안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어른들의 도움을 받지 않기 위해 애써보기로 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왜 세상살이에는 어린 학생들에게마저도 필요한 것 투성이인 걸까요. 그냥 학교만 오고 가는 게 전부일 뿐인데, 사야 할 것도, 내야 할 것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어갈 때마다 이러한 필수적인 지출들은 그 나이의 개수만큼이나 더 늘어났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분의 희생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내 죄는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 계속

왼 손에는 커피 오른 손에는 마우스.

키보드는 그냥 눈으로 즐기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