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미친 남정네한테 끌려 가는 레인 양의 얼굴에서 불행의 그림자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그와의 산책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입에서 행복한 미소를 떨어트리며 활기차게 걸음을 옮겼다.

깊어가는 어둠 속에서 높은 곳에 매달린 가로등 불빛은 거리에 깔린 화강암 포석(布石)을 은은한 회녹색으로 밝히고 뺨에 홍조를 띈 연인들은 그 위를 사뿐히 밟고 지나간다.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자동차의 무리를 뒤로 하고 원호를 그린 다리 위로 올라서면 포석의 빛깔은 연한 주황색으로 바뀐다. 구름 위로 머리를 치켜든 세 개의 청순한 달과 화려한 구름다리의 조명과 환락적인 도시의 야경이 무수한 빛으로 부서져 흐르는 검푸른 운하가 연출하는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연인들은 서로 입맞춤을 나누며 사랑을 맹세한다.

그러나 스카리인과 세시나는 연인이 아니었다.

사내는 단단하고 예리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부러진 장검(長劍)이었다. 동정심의 가치를 비웃고 양심을 애써 무시하고 사랑을 지독한 사치로 간주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감정은 뜨거운 분노, 그리고 가차없는 증오심.

소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미쳤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광인이란 사실을.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손을 맞잡고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기에.

그들이 다리 위로 올라서는 것과 건너편에서 북방 비탄교(北方悲嘆敎)의 승려가 발을 들이민 것은 거의 같은 순간의 일이었다.

승려의 팔다리는 수수깡처럼 가늘고 허리는 새우처럼 굽었다. 땟국물에 잿빛으로 찌든 승복을 두르고 왼손에는 탁발승을 상징하는 나무 사발을 들었다. 오른손의 지팡이로 포석을 따악 따악 소리 내어 짚으면서 모터가 부서진 로봇처럼 부자연스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솜털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밀어버린 둥그런 머리통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리고 그는 퀭한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아르마가나 살릭타 왕(王)은 광대한 영토의 지배자였지만 무도한 살인자이며 광폭한 약탈자이며 갖은 음행을 일삼는 탕자였다. 무고한 백성들을 함부로 죽여 그들의 땅과 보물을 빼앗고 아내와 딸을 자신의 첩으로 삼았고 어린 아들을 노리개로 삼았고 강력한 군대를 앞세워 다른 나라를 핍박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맏딸이자 국무대신인 아르마가나 미나기타가 검은 상복을 입고 대전에 나아갔다. 옥좌에 앉은 왕이 그녀가 상복을 입은 이유를 묻자 미나기타는 대리석 바닥에 길게 엎드려 머리를 찧으며 피눈물로 호소했다.

[제게는 자애로우신 아버지이자 열 다섯의 대륙 중에서 다섯을 지배하시는 막강한 왕이시여. 그대의 목숨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상복을 입고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겠습니까?]

살릭타 왕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 나이는 이제 겨우 마흔을 넘었고 내 육신은 아직도 건강하며 내 영토는 아직도 부족하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고 죽어서도 아니 될 사람인데 무엇을 벌써부터 슬퍼하려 드느냐?]

[왕이시여! 깨달으소서! 당신의 잔인한 폭정(暴政)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모른단 말입니까? 그들의 비통한 목소리는 하늘에 닿을 지경입니다. 하늘은 눈이 멀고 귀가 먼 줄 아십니까? 당신의 음란하고 사악한 행위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천하의 제후들이 당신을 진실로 존경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당신의 힘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그들은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쳐들어올 것이니 그때 가선 바늘 하나 꽂을 땅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오래 살기를 바라신단 말입니까?]

그러나 살릭타 왕은 그녀의 진심 어린 충정을 받아들이긴커녕 불 같이 화를 내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여봐라, 감히 자신이 섬기는 군주에게 건방진 소리를 하는 저 년의 혀를 끊어라. 감히 만백성의 왕을 오만하게 쳐다보는 저 년의 눈을 뽑아라. 감히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저 년의 목을 베어라. 내가 준 목숨이니 다시 내가 가져가겠다!]

미나기타는 병사들에게 붙들려 형장으로 끌려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시여, 아버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의 무참한 죽음은 수많은 백성들과 뭇 제후들의 공분을 샀다. 유력한 왕은 군사를 동원했고 부유한 귀족들은 무기를 공급했고 백성들은 손에 익은 연장을 잡고 일어섰고 하늘은 그들에게 운과 지혜와 용기를 아낌없이 베풀었다. 살릭타 왕의 군대는 스무 번 싸워 스무 번 패했다. 왕의 영토는 다섯 개의 대륙에서 한 개의 성(城)으로 쪼그라들었고 마침내는 그마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정복자들은 살릭타 왕을 죽이지 않았다. 그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더욱 고통스러우리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왕은 황금의 왕관과 화려한 비단옷과 단단한 가죽 신발과 믿음직한 칼을 모두 잃어버리고 초라한 거렁뱅이가 되어 황무지로 쫓겨났다.

살릭타는 비바람을 막기에는 너무 얇은 누더기로 겨우 몸을 가리고 맨발로 거친 돌밭을 방황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비웃고 욕하면서 돌을 던졌다.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은 뒤였다. 천륜을 저버린 살인 행위에 대한 하늘의 징벌은 그토록 가혹했다.

1년, 2년, 3년, 그리고 10여 년이 되도록 그는 뉘우치고 다시 또 뉘우쳤다. 그는 죄 사함을 얻고자 열 두 봉우리의 산을 넘고 두 개의 바다를 지나고 스무 줄기의 강을 건너 당대의 정각자(正覺者)인 미르키나 부처님을 찾았다."

미친 중이 스카리인과 세시나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딱딱 지팡이 소리에 박자를 맞추는 컬컬한 목소리가 정점에 달했다. 사내는 오직 경멸에 찬 눈빛을 던졌고, 그 곁에 바짝 달라붙은 소녀는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승려는 그들을 모두 똑같이 무시한 채, 똑바로 앞을 향해 걸어가며 설법을 계속했다.

"그 때, 미르키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룩한 아르마가나 아그문타의 8대손이자 한 때는 다섯 개의 대륙을 지배했던 왕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이기도 했던 그대, 아르마가나 살릭타여. 나조차도 그대의 죄를 용서할 수가 없구나.

음탕한 욕정을 이기지 못해 어린 소녀와 소년을 가리지 않고 능욕한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죄지은 사실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하늘에 엎드려 빌면 마땅히 사면 받을 것이다.

그대와 같은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영토를 침탈한 죄는 매우 크다. 하지만 열 번을 다시 태어나 선행을 베풀고 공덕을 쌓으면 능히 죄업(罪業)을 탕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백성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은 죄는 그보다 훨씬 무겁다. 허나 일백 번을 고쳐 태어나 선행과 공덕으로 죄업을 가벼이 하고 고행(苦行)과 참회를 거듭하면 마침내 때묻은 영혼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나 살릭타여, 어찌하여 하늘이 묶어준 아버지와 딸의 인연을 저버리고 미나기타의 혀를 끊고 눈을 뽑고 목을 쳤느냐? 그 죄는 일천 번을 고쳐 죽는다 해도 용서받을 수 없고 일천 번을 다시 태어나 선행을 베풀고 공덕을 쌓는다 할지라도 씻겨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네가 일천 번을 태어난 이후에 또 다른 정각자(正覺者)가 이 세상에 올 것이니, 만일 그가 너를 불쌍히 여긴다면 그제서야 죄사함을 얻을 것이다.]

10년, 20년, 30년이 지났다. 비참한 빈곤 속에서 뼈와 가죽만 남은 몰골로 숨을 거둔 살릭타 왕의 육신은 썩어 없어졌지만 죄지은 영혼은 무한한 윤회전생(輪廻轉生)의 굴레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났다. 강철이 녹슬어 먼지가 되고 단단한 화강암이 모래가 되어 부서지고 거대한 물줄기의 흐름이 바뀌고 산이 무너져 바다가 메워질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끝에 새로운 정각자(正覺者)인 아르삭스 부처님의 시대가 열렸다.

어느 날, 아리스타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아르삭스 부처님의 처소에 찾아왔다. 그 마음씨 착한 청년은 매일같이 부지런히 일했지만 병든 노모조차 만족스레 모시지 못하는 곤궁한 삶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궁색하고 초라한 인생에 회의를 느낀 아리스타는 아르삭스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물었다.

[스스로 하늘의 도(天道)를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자, 아르삭스여. 내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나는 어질고 착함을 덕목으로 삼고, 정성껏 어머님을 봉양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여기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 모든 시간을 바쳐 일하는 것으로 삶의 보람을 찾는 사람이오. 내 정직한 노동의 대가는 너무 작아서 어머님의 약값을 치르고 나면 우리 가족이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게 고작이요. 하지만 사악하고 이기적인 못된 인간들은 탈법과 불법을 서슴지 않고 금은보화를 갈쿠리로 긁어 모아 치부해 떵떵거리며 살고 있으니 이게 대관절 어찌 된 일이요? 착한 이는 빈궁해지고 못된 자가 득세하는 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면 그대가 설파하는 하늘의 도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요?]

그의 전생(前生)이 살릭타 왕이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본 아르삭스 부처님께선 이렇게 말씀 하셨다.

[들어라, 하스타와 비네기타의 아들 아리스타여. 그대는 이 세상에 열 다섯의 대륙과 열 여섯의 바다가 있었을 때, 살릭타라는 이름의 강대한 권력을 가진 왕이었다. 그리고 그대는 다섯 개의 대륙을 정벌하여……"


장황한 설법은 희미한 불빛을 집어삼키는 어둠 속으로 파묻히고, 잊혀지며, 사라져 갔다.

세시나는 못내 궁금한 표정으로 살며시 고개를 돌려 가로등 사이로 멀어지는 지팡이 소리를 쫓았다.

"주인님, 저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죠?"

그 질문에 스카리인은 차갑게 코웃음 치며 답했다.

"비탄교의 설법은 판박이처럼 똑같아. 이 모진 세상에 원죄로 더럽혀진 영혼을 부둥켜 안고 태어났으니 마땅히 슬퍼하고 탄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천국에 가려면 끝없이 참회해서 죄지은 영혼을 정화해야 한다고 협박하지. 창의성이라곤 쥐뿔만치도 없는 게으르고 덜 떨어진 땡추들이 그렇게 쓸데없이 지루한 얘기를 되풀이해서 떠드는 꼴을 보노라면 너무 한심해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싶어질 뿐이야."

그들이 다리 끝에 당도하자 대기하고 있던 붉은색 스포츠 카가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다가왔다.

"삼월야에 여길 건넜으니 레인 양과 스키더 소령님도 앞으로 잘 풀리시겠군요. 아, 굳이 그런 속설을 믿지 않더라도 한 번 건너볼만한 가치는 있을 겁니다. 아무튼 요즘 한창 뜨고 있는 관광 명소니까요."

카디엔 중위가 창문을 열고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을 걸자 스카리인은 문을 열어 세시나를 태우며 퉁명스레 받아넘겼다.

"그 미치광이 땡추만 없었다면 건널만한 가치라는 게 있었을지도 모르지."

"땡추? 아, 혹시 방금 전에 지나간 비탄교 승려 말입니까?"

"그래, 그 작자는 다리를 건너는 내내 목청 높여 헛소리를 늘어놓더군."

카디엔은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뒷좌석에 앉은 세시나를 돌아봤다.

"그랬군요. 하지만 뭐, 그래도 주변 분위기는 정말 끝내주지 않습니까? 그렇죠, 레인 양?"

"예, 정말 아름다운 다리에요."

문이 닫히고,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창 너머로 멀어져 가는 것은 어두운 거리에 홀로 남겨진 사내의 모습, 소녀의 가슴에서 커져만 가는 것은 희미한 불안감. 무의식 중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조그만 목소리는 날카로운 엔진 소리에 파묻혔지만, 상냥한 마음은 사념이 되어 전해졌다.

 - 주인님, 조심하세요 -

 - 걱정할 건 하나도 없다, 세시나 -

소녀의 근심을 차갑게 물리치고, 스카리인은 왼팔을 바지춤에 찔러 넣고 오른팔을 시계추처럼 흔들며 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갔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솟아오른 다리를 오르며, 공허하게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으며, 그는 아까의 탁발승이 남긴 설법을 곱씹어 보았다.

아버지라 불렀던 사람을 죽이고 형이라 불렀던 사람까지 죽여야 한다면, 과연 몇 번을 다시 태어나 그 죗값을 치러야 할까?

'아마 백만 번을 다시 태어나도 모자라겠지!'

그는 웃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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