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암살자



잉야르의 하루는 26시간이고 1시간은 90분, 1분은 80초다. 우주 표준시는 세슘 원자가 100억 번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약 1.08696초)을 1초로 삼지만 이곳에선 세슘 원자가 97억 번 진동하는 시간이 1초였다. 먼 바다를 오랫동안 떠돌아 다니느라 표준시가 완전히 몸에 배인 사람이 시차에 적응하려면 하루나 이틀로는 불가능하고 적어도 1주일은 필요했다.

스카리인이 얻어 탄 질리언 상사의 노란색 중형차가 남구를 빠져 나와 크고 작은 자동차로 한참 복작대는 북구의 밤길을 거북이 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와 호텔로 도착했을 때, 시계는 이미 8시 7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에졸을 소개하는 관광 안내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250층짜리 특급 호텔, [광명성장(光明星莊)]은 거대한 빛의 탑이었고 그 둘레를 크고 넓게 감싸는 도로는 빛의 강이었다.

질리언의 차는 느릿하게 흐르는 빛의 강으로 되돌아갔고 스카리인은 굳건한 빛의 탑에 들어가 카운터의 여직원에게서 객실 열쇠를 받았다. 그는 '안녕히 주무십시오' 내지는 '좋은 밤 되시기 바랍니다' 운운하는 깍듯하고 의례적인 인사를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242층으로 향했다.

광명성장의 단면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층부터 160층까진 밋밋한 사각형으로, 160층부터 220층까지는 육각형으로, 그 위로는 팔각형이었다. 그리고 호텔 직원들 사이에서 '특급층'으로 불리는 240층부터 250층 사이에는 최고의 요금을 자랑하는 특등실이 몰려 있었다.

특급층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것은 고대 유적을 연상케 하는 크고 굵직한 원주(圓柱)였다. 8대의 고속 엘리베이터가 쉼 없이 오르내리는 원형 기둥, 그 기둥을 넓은 복도가 에워쌌고, 팔각형의 복도 벽에는 한 면마다 네 개의 객실이 들어서 있었다.

스카리인은 무덤덤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연한 베이지색 벽면에 걸린 투명한 꽃봉오리 모양 전등에서 쏟아지는 불빛을 받아 낭만적인 장밋빛으로 타오르는 카펫이 깔린 넓고 시원한 복도를 걸어 동남쪽 면의 3번째 방, 242-23호실로 다가갔다.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널찍한 문에는 열쇠구멍이 뚫린 청동제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열쇠구멍은 옛 양식을 철저하게 모방하느라 생긴 단순한 장식에 불과했다.

스카리인이 손가락만한 굵기와 크기의 금속제 열쇠를 손잡이 부근에 갖다 대자 잠금 장치가 풀려 문이 활짝 열리고 불이 환하게 켜지면서 특등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응접실 1개, 침실 3개, 화장실 2개, 대형 목욕탕에 미니 바까지 갖춰진 크고 넓고 호화로운 객실이었다. 응접실 천장에선 투명한 수정을 모아 만든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번쩍이며 실내를 밝혔다. 바닥에는 백옥같이 하얀 대리석을 깔고 다시 그 위에 화려한 문양의 고급 융단을 펼쳤다.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은백색 물소 가죽을 덧댄 소파에선 천년 전의 아름다움을 다시 되살린 듯한 기품과 안락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커튼을 접고 창을 열어 발코니로 나아가 소용돌이 문양이 양각된 황동 난간을 짚고 몸을 기울이면 발 밑이 꺼질듯한 아찔함이 몰려들었다. 뒤이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이 눈으로 덤벼들었다. 여기 올 때면, 세시나는 밤마다 쪼르르 발코니로 달려나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싫증 내지 않고 밤 경치를 구경했다.

'오늘은 그나마도 즐길 수 없으니 안 됐군.'

스카리인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돌려 텅 빈 세시나의 방문을 힐끔 쳐다보곤, 응접실을 지나 예스런 경첩 문을 열고 자기 방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 밝은 불빛이 소박하고 실용적인 침실을 그려냈다. 넓이는 응접실의 절반 정도, 바깥이 보이는 넓은 창문에 침대가 접했고 반대쪽 면에는 큼직한 책상과 의자가 놓여졌고 좌우로는 책장과 옷장이 서 있었다. 고동색 나무 책상 위에는 작은 손가방이 뒹굴었고 책장에는 호텔 직원이 갖다 놓은 것으로 추측되는 싸구려 잡지책이 드문드문 꽂혔고 옷장에는 갈아입을 옷 몇 벌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점퍼를 벗어서 의자 등받이에 걸고 장갑을 책상 위에 던져놓고 장화를 신은 채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삐걱거리며 몸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편안하게 튕겨줬다. 침대 머리맡의 조그만 서랍장에는 독서용 전등과 자명종 시계가 있었는데, 그 시계는 고전적인 장식미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 물건이었다. 둥그스름한 청동제 몸통에는 연꽃 무늬가 촘촘히 음각되었고 흑철색의 바늘은 은빛의 숫자판 위를 부드럽게 달렸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스카리인은 슬그머니 목을 비틀고 눈을 돌려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를 읽었다. 8시 75분에서 80분 사이. 그는 호주머니에서 아까의 열쇠를 꺼내 들고선 머리 부분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커튼을 쳐."

점점이 반짝이는 빛들이 강을 이루고 기둥을 이룬 도시가 창문 양쪽에서 튀어나온 자줏빛과 갈색의 단풍잎을 수놓은 진한 녹색의 커튼에 감춰졌다. 그는 계속해서 다른 명령을 내렸다.

"방문을 닫아. 그리고 모든 방의 불을 꺼."

모터가 돌며 방문이 닫혔고 차례로 불이 꺼지면서 소스라치게 막막하고 조용한 어둠이 펼쳐졌다. 휘황찬란한 도시의 야경은 커튼을 얼룩처럼 물들이며 어두운 방에 아주 약간의 빛을 던졌고, 눈이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희끄무레한 녹색으로 빛나는 야광 시계바늘이 보였고 깨끗한 직선을 그린 벽과 가구의 윤곽선이 흐릿하게 잡혔다. 그는 열쇠를 시계 옆에 내려놨다.

시간은 아직 9시 전, 잠들기엔 아직 일렀거니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졸리지도 않았다. 황폐한 싸움으로 단련된 육체는 피로를 몰랐기에 마음만 먹으면 나흘 밤을 줄창 세울 수도 있었다. 스카리인이 침대에 누운 이유는 잠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냥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객실 전체가 덫이었고 그는 미끼인 동시에 치명적인 독약이었다.

정적이 몇 겹으로 덧칠된 새까만 침묵이 잦아들고, 낮은 소음이 두터운 벽 너머에서 불규칙하게 울렸다. 간헐적으로 부스럭대는 소리, 벽체를 관통하며 자음이 불명료하게 뭉개진 탓에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소리가 섞여 있었다. 잠시 후에 문 닫히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터지더니 다시 긴 정적이 찾아왔다. 스카리인은 옆방에 들어왔던 정보국 요원들이 일부러 소란을 떨며 철수한 것이리라 추측했다.

그 추측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보국 컴퓨터에 직접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귀 안쪽에 이식된 적혈구 세포 크기(약 7~8미크론)의 생체 컴퓨터를 작동시키며 사념을 확장했다. 그리고 광속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 우주를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사념 통신망'에 뛰어들었다.

수천 수만의 행성을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는 사념파(思念波)의 소용돌이에 실린 막대한 양의 정보가 그의 정신에 흡수되고 영혼에 동화되었다. 커튼의 주름을 따라 반투명하게 드리워진 흐릿한 빛 다발 위로 시신경에 직접 전송된 그림이 3차원적으로 겹쳐졌고, 고독한 침묵은 찐득거리는 소음의 합중주에 휩쓸렸고, 아주 옅은 국화향이 스며든 실내에는 구역질 나는 냄새와 향기로운 냄새가 휘몰아쳤다.

스카리인은 후각 정보를 차단하고, 청각 정보를 골라내고, 시각 정보에만 집중했다. 그는 무한한 바다에 고립된 개인이었지만 무력하진 않았다. 사상의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는 사념의 가닥을 쫓아 올라가 십성 동맹군 정보국, 잉야르-에졸 지부의 대형 생체 컴퓨터의 단말기를 찾았다.

- 접속 암호는? 그리고 신분은? - 단말기의 질문이었다.

그는, 뮬 소령에게 건네 받은 1,284,653,944자리의 암호를 끄집어 내면서 자신의 신분을 명명백백히 밝혔다.

- 랏스 연합군 해군 소령, 데스 스키더. 소속 부대는 없음. -

세슘 원자가 채 10번도 진동하기 전에 컴퓨터가 암호를 확인하고 랏스 연합군 정보망에 동맹군 자격으로 접속해서 그의 사념파(思念波) 파문(波紋)을 조회했다.

- 암호 일치. 본인 일치. 지금부터 정보망 접속 및 2급 이하 군사 기밀 정보의 열람을 허가합니다. -

다른 일체의 정보가 차단된 공간에 잉야르-에졸 지부의 정보망이 활짝 열렸다. 암흑의 공간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것은 글자, 무수한 텍스트였다. 그는 마음의 손을 뻗어 텍스트를 더듬으며 질문했다.

- 스카리인의 옆 방을 지키던 사람들은 철수했나? -

눈앞에서 글자가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새로운 텍스트를 형성했다.

- 근접 경호팀은 금일 오후 8시 81분을 기해 철수, 본부로 귀환하고 있다. 광명성장에서 반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180층 호텔 '에조레드'의 옥상에서 질리언 상사와 판 휴이 소위가 원격 경호팀을 구성하고 있으며 40분 내로 카디엔 중위가 여기 합류할 예정이다. 그리고 광명성장을 중심으로…… -

'다들 고생이 많군.'

스카리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마음의 손을 좌우로 흔들어 텍스트를 치웠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여길 감시하는 팀이 있으니 차를 몰고 호텔 근방을 빙글빙글 돌며 사건이 터지기만 기다리는 팀도 있을 것이다.

'놈들이 뮬 소령의 역정보에 속아넘어갔다면 늦어도 11시에는 나를 습격하려고 들겠지. 기왕이면 좀 더 일찌감치 와 줬으면 좋겠군. 기다리는 건 질색이니까.'

그는 에졸 지부의 접속을 끊고 공개된 정보망으로 되돌아갔고 거기서 다시 랏스 연합 정보부의 단말기를 찾아 들어갔다. 암호 확인, 신분 확인, 틀에 박힌 절차가 지나고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정보가 뇌세포로 직결되었다.

……해군 전과(戰果) 보고서: 딘메르게스의 유격 함대가 아이티카 3 해역에서 이동 중이던 십자 연맹의 수송 선단을 습격해서 호위함 7척(오뤽 2, 발스레인 5)을 격침시키고 화물선 2척을 대파, 나머지 화물선 12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피해는 샤카무트 1척과 스칼레드 2척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진 것이 전부이며……

'붉은 수염' 딘메르게스 대령님, 당신은 아직도 원기왕성하군요. 같이 일했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드문 제국 정세: 국민당 '온건파'의 정신적 지도자인 알릭서드 맥라인 교수는 '강경파'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나키셰에이저'의 책임자인 이아썬 반 퀜톤 남작은 맥라인을 여전히 위험 분자로 간주하고 있으며……


황실 비밀경찰이 주목하고 있다면 무사히 넘어가긴 어렵겠군. 터무니없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가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테리어스 성단 연합(星團聯合) 경제: 용병 부대 '핏빛 갈매기'가 십자 연맹의 예나 사(社)와 장기 계약을 체결, 칼텍 행성에 지상군 2개 대대와 해군 1개 사단을 주둔시키기로 했다. 계약금 액수는 공표되지 않았지만 대략 20억 지타로 추정되며……

뷔라아민 녀석이 엄청난 돈을 들여 '핏빛 갈매기'를 고용한 걸 보아하니 칼텍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군. 이건 조사해 볼만한 가치가 있겠어.

……십자 연맹 및 본토 동향: 정기 중의회(衆議會)에 출석한 상원의원 알렌 던컨이 테리어스 성단 연합의 무역 관세 정책을 비난하는 바람에……

던컨, 알렌 던컨. 차가운 살의(殺意)가 솟아나 등줄기를 따라 흐르며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의 정신이 정보망에서 튕겨져 나와 영상과 글자와 소리가 새하얗게 부서져 날아가면서 눈앞에 벗처럼 친숙한 어둠이 돌아왔다. 목표를 상실한 살기는 공허한 암흑을 떠돌고 분노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되었는데 어찌나 세게 힘을 줬는지 손톱이 안쪽 손바닥을 파고들어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다정하고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보다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음모가 싹트고 모략이 꽃을 피워 형제의 우애와 친구의 신뢰를 남김없이 앗아가고 골수에 사무치는 후회와 한 줌의 잿더미를 남겼다. 한때 친근하고 정겹게 형이라고 불렀던 그 이름은, 이제는 혈관을 따라 강침(剛針)처럼 흐르는 증오심의 상징이었고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상처로 남은 분노의 대상이었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응징해야만 하는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의 이름이었다!

스카리인은 무의식 중에 손을 들어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하고 우툴두툴한 왼뺨을 더듬어 올라가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피를 증발시키며 근육과 살점을 새까맣게 구워버린 시뻘건 불길은 그의 왼쪽 눈을 통째로 노릿하게 태워버렸다. 지금의 눈은 자비오프가 새로 만들어 넣은 것이었다. 유전 정보를 이용해 세포 배양기에서 생성된 대체 안구는 크기부터 흰자위, 동공, 홍채의 색깔에 이르기까지 이전의 눈과 완전히 동일했고 코앞에 들이댄 손가락의 지문을 또렷이 파악하고 머나먼 바다의 별빛을 확실히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좋았다.

하지만 그 고통, 눈알이 열기에 달아오르고 눌어붙고 깨어지고 박살 나는 순간의 고통, 신경이 촛불처럼 천천히 타 들어가고 가닥가닥 끊어져 뽑혀나가는 고통은 사악한 저주가 되어 영혼을 옭아맸다. 이식 수술이 끝나고 며칠 동안은 한 시간 간격으로 끔찍한 환상통(幻想痛) 발작이 찾아왔고 그 때마다 눈꺼풀을 누르고 입술을 깨물면서 신음 소리를 필사적으로 삼켜야 했다. 발작 간격은 몇 주 뒤엔 서너 시간으로, 몇 달 뒤엔 하루에 한 번으로 늘어났고 통증도 점차 약해져서 1년 뒤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잊을 수는 없었다.

그는 텅 빈 눈구멍을 까마귀가 단단한 부리로 쪼아대며 신경을 온통 들쑤셔 놓는 고통을, 새빨갛고 샛노란 화염 속에서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가는 친구의 주검을 기억해 냈다. 머리가 새하얗게 질리고 귀가 멍멍해지고 등골이 마비되고 손가락 끝에까지 전류가 흐르는 통증, 근육이 떨리면서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면서 아드레날린이 용솟음쳤다.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며 부드득, 이빨 가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지나친 흥분이었다. 사냥을 앞두고 필요한 절대적인 미덕은 침착함이었기에 그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요동치는 감정을 붙들었다. 몸이 매트리스에 가라앉으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쿵쾅대던 심장이 천천히 숨을 죽였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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