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기대한 건 실수였어……"

판 휴이 소위는 따끈한 녹차를 후후 불어 식히며 자조했다.

중앙 정보국의 요원들은 울바흐터 소위를 차에 태워 경찰 병원에 후송해 갔다. 거기서 간단한 치료를 하고 어금니에 자살용 독약 캡슐을 넣어두지 않았는지 심장이나 다른 장기에 폭약을 장치하진 않았는지 철저하게 검사하고, 진정제와 사념 억제제를 듬뿍 투여해서 다시 차에 밀어넣었다.

외곽 순환도로를 서쪽으로 따라 올라가 오래된 2차선 지선도로를 타고 15분 정도 내달리면 넓디넓은 에졸 호수(湖水)가 사람을 반긴다. 이곳은 시민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식수원이자 삶에 지친 도시인들이 한숨 돌리기 위해 찾는 휴양지이기도 했다. 맑고 투명하고 잔잔한 거울에 푸르른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떠오르면 햇빛이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반짝였고 연인들이 탄 조각배는 가랑잎처럼 떠다녔다. 호숫가 둘레는 비바람에 깎여나가 기괴한 모습을 한 화강암들이 조각처럼 둘러쌌고, 군데군데 보트 선착장이 있었고, 여기저기 호텔과 식당이 자리잡았다.

호수를 끼고 반 바퀴를 돌면 잡목이 무성한 펑퍼짐한 언덕이 나오는데 그 중턱에 화강암을 다듬어 쌓아 올린 돌담으로 가려진 별장 건물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부잣집 별장이 아니라 에졸 지부에서 비밀리에 유지하는 안가(安家)였고, 세시나가 하룻밤을 머문 곳도 바로 여기였다.

담장 안에는 나무도 풀도 없이 무미건조한 흙만 깔린 쓸쓸한 마당과 편평한 지붕을 씌운 왜소한 차고와 붉은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2층짜리 벽돌집이 있었다. 2층에는 방이 셋에 화장실이 하나였고 1층에는 넓은 응접실이 하나에 방이 넷, 화장실이 둘, 실용적인 부엌이 딸려 있었다. 그리고 부엌 뒤편의 철문을 열고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고 컴컴하고 높은 계단을 60단 정도 내려가면 상당히 넓은 지하실이 있었다.

지하실 내부는 셋으로 나눠졌다. 하나는 대기실 겸 휴게실, 하나는 통제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심문실이었다. 심문실은 창고보다 좁고 불편하고 냄새 나고 더러운 콘크리트 방이었다. 풍화되기 직전의 나무 책상과 의자, 밝지만 깜박거리는 할로겐 램프, 이 모두는 포로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을 주입하고자 계획적으로 꾸며진 무대장치였다. 벽체에는 내화재나 단열재 대신에 사념 능력을 최고 500분의 1까지 약화시키는 감쇄장치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1급 사념 능력자의 힘도 4급 이하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심문 중에는 한 사람 이상의 요원이 통제실에 앉아서 컴퓨터로 감쇄장치를 제어하고 심문실의 상황을 꼼꼼히 기록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야즈다-몬슬리 군사조약은 전투 도중에 포로로 잡은 적 전투원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가해선 안 된다고 명시했지만 첩보요원이나 암살자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묵시적인 허용이 아니었고, 정보국 요원들은 잔인한 고문을 즐기는 사디스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걸쭉한 협박을 풀어놓으며 가볍게 손찌검을 하고 잘 듣는 자백제를 투여하는 것까지 주저하진 않았다.

새벽녘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심문이라는 제목의 폭력적인 연극이 막을 올렸다. 정보국 요원들이 뺨을 후려갈기고 찢어진 어깨를 손으로 쥐어짜고 부상당한 무릎을 구둣발로 걷어찼지만 울바흐터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매섭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받아 치기만 했다. 귀에다가 설득과 애원과 위협을 번갈아 가며 외쳤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약물을 주사하면 눈이 풀리긴 했지만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꼬박 하루가 지나 동이 틀 무렵에는 주연도 조연도 똑같이 지쳤다. 주연배우의 이름도, 목적도, 뒤에 버티고 있는 조직에 관해서도,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짧은 휴식을 취한 뒤에 정보국에선 비장의 카드인 네라 판 휴이 소위를 내놓았다. 그녀는 사관학교 재학 중에 하일리란트-랜셀 대학으로 적을 옮겨 사념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재(人才)였다. 500년인가 600년 전, 이드문 제국의 상원 의회에서 정권 다툼을 벌이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십성 동맹으로 망명해야 했던 그녀의 조상은 '판'이란 호칭이 붙은 성(姓)을 물려줬지만, 그녀 자신은 몰락한 귀족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가끔 가다 술자리 분위기를 띄우는 얘깃거리로 삼는 정도였다.

판 휴이 소위는 활발한 야생마였고 귀여운 사슴이었다. 팔다리는 길고 날씬했다. 둥그런 얼굴은 원래 나이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였다. 눈 끝은 살짝 올라갔고 눈동자는 호수처럼 깊었고 코는 낮고 입술은 작았다. 들판의 잔디처럼 푸른 머리카락은 목 근처에서 단정하게 깎아 정리했다. 사념 능력은 3급이었지만 상대편의 마음을 읽어내는 심리 투시능력은 1급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정보국에 배속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순서였다.

그녀가 상대편에게 사념을 집중하면 알아내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의 눈으로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어냈고 경우에 따라선 어렴풋한 기억의 단편(斷片)과 상상의 조각까지 긁어냈다.

그러나 변경의 항구 도시에서 정보국의 초급 장교가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망명객의 감시, 지루한 서류 작업, 또 감시, 또 서류 작업. 재미없고 지루한 일이었다. 정보국에서 일한지도 벌써 1년이 넘었지만 주특기를 살릴 기회라곤 한 번도 없었다.

뮬 소령이 이 일을 맡겼을 때, 그녀는 독한 마음을 먹고 반드시 성공시켜 보이겠노라 다짐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깨는 자극이었으며 에졸에 뿌리내린 십자 연맹의 정보 조직을 분쇄시킬 수 있는 기회였고 출세의 발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판 휴이 소위는 자백제와 사념 억제제에 취한 포로의 마음을 읽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경험 부족에서 비롯된 오산이었다. 그 약물은 뇌를 스푼으로 뭉텅뭉텅 떠먹은 듯한 효과를 발휘했고 감쇄 장치는 강력한 사념을 쓸 수 있는 희망을 아예 지워버렸지만, 울바흐터 소위는 이럴 때를 대비해 철저하게 훈련받은 특수부대 요원이자 교활한 '여우'였다. 그녀는 삐걱거리는 의자에 흐느적거리며 앉아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미약한 사념을 동원해 사고 영역과 기억 중추에 무의식이라는 방벽을 둘러쳐 그 안으로 의식을 도피시켰다.

백지에는 무언가를 쓸 수는 있어도 읽을 수는 없는 법이다. 판 휴이는 눈을 감고 손 깍지를 끼고 초조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사념을 확장해 봤지만 질척거리는 안개가 낀 가시나무밭을 나침반도 지팡이도 없이 무작정 손으로 더듬으며 전진하다가 손끝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는 기분에 젖어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뇌조직과 물리적으로, 동시에 심리적으로 연결된 사념 장벽에 직접적인 공격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포로의 목숨이 위험했다.

판 휴이는 거의 3시간이 넘도록 백치 상태의 포로를 마주보고 앉아 끙끙댔고, 카디엔과 질리언은 축축한 벽에 기대고 서서 마지막 희망이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입술을 껌처럼 씹어댔다. 오전 11시, 마침내 백기를 들고 항복한 판 휴이 소위는 약물에 취한 승리자를 남겨놓고 비실대는 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대기실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쓰디쓴 패배의 맛이 스며든 녹차를 마시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니까.

"나한테 기대한 건 정말 큰 실수라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소위님." 숯처럼 새까만 콘크리트 벽에 질리언의 위로가 메아리쳤다.

카디엔 중위는 호주머니에서 엽궐련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니 피곤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는 오래된 소나무의 그윽한 향기가 피어 올랐다.

"그건 또 무슨 담배죠?" 판 휴이 소위는 하얗게 타오르는 연기를 멍하니 쫓았다.

"엊그제 북구 거리에서 만난 아사족(族) 행상한테 샀지. 케살로비카의 잎담배를 썼대나 뭐래나, 여하간 향기는 정말 좋더군."

판 휴이 소위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낡아빠진 더러운 테이블에 입맞춤이라도 하려는 듯이 허리를 구부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하얀 도기 잔에 담긴 녹차를 고양이처럼 핥아 먹었다. 대기실 귀퉁이를 서성이는 카디엔 중위는 입으로 담배 연기를 흘리면서 안쓰러운 눈길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와 사귄지 벌써 일곱 달이 넘었지만 이렇게 낙담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네라."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 내가 잘하는 거라곤 상대가 뭘 생각하는지, 뭘 알고 있는지 읽어내는 것뿐이야. 그것 말고는 달리 잘 하는 일도 없어. 그런데 그마저도 실패했으니 대체 내가 무슨 낯으로 여기 있을 수 있겠어?"

'맞아, 넌 사격도 전술도 운전도 평균점을 겨우 웃돌 뿐이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난 네가 있는 게 좋아.' 카디엔 중위는 그 생각을 함축해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조금 쉰 다음에 다시 한 번 해 보자고."

"그래요, 소위님. 소위님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다른쪽 의자에 앉아 있던 질리언은 길쭉한 플라스틱 컵으로 청량음료를 마시며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잡담은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끝났다. 하나는 둔중하고 하나는 살벌한 발자욱이 규칙적인 소리를 그리면서 대기실에 들어왔고, 카디엔 중위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엽궐련의 불을 벽에 지져서 끄고, 판 휴이 소위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고, 질리언 상사는 허리를 세우면서 경례를 붙였다. 뮬 소령과 스카리인이었다.

"판 휴이 소위. 경과는?" 뮬 소령이 짧게 질문했다.

그녀는 창피를 무릅쓰고 군인답게 요점만 말했다.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랬군." 스카리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꿰뚫어 볼 수 없나?"

"예, 그렇습니다. 스키더 소령님. 뇌 영역을 심리적인 방벽으로 둘러쌌습니다."

"사념 공격으로 방벽을 깨면?"

"뇌세포를 죽일 위험이 있습니다."

"감쇄장치를 작동시키고 있는 게 아니었나?"

"소령님도 아시겠지만 사념 억제제나 감쇄장치는 사념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지 소멸시키는 게 아닙니다. 억제제와 감쇄장치 덕분에 그녀의 능력은 4급 이하로 떨어진 상태지만, 뇌 영역에 심리적 방벽을 치는 것은 5급 능력자도 충분히 시간을 들여 연습을 거듭하면 흉내낼 수 있는 기술입니다."

"하긴, 그도 그래." 스카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네는 이곳에선 최고의 사념 투시 능력자라고 들었는데?"

"죄송합니다." 그녀는 꺾여진 자존심만큼이나 머리를 떨구었다. "예상 이상으로 무의식의 벽이 두꺼워서 투시가 불가능합니다. 모두 제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무의식이라니?"

"예, 그녀의 심리적 방벽은 유의미한 정보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무의식입니다. 그녀는 그 무의식 속에 자신의 의식을 감추고 있습니다."

"꽤 희한한 기술을 쓰는군." 스카리인은 중얼거렸다. "대책은 없나?"

"사실상 없습니다." 그녀는 의기소침해서 말했다. "한 달이건 두 달이건 그녀가 무의식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요."

"잘못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군. 그럴 수야 없지." 그는 뮬 소령에게 물었다. "뮬 소령, 제가 직접 심문해도 되겠습니까?"

"스키더 소령께서 직접 심문을 하겠다고요? 어떤 식으로 할 겁니까?"

"가능하면 제 방식대로 하고 싶군요."

뮬 소령은 뒷짐을 지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이렇게 말했다.

"흠, 가죽을 벗기거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자르거나 눈알을 뽑는 건 곤란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십자 연맹에게 꼬투리를 잡힐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가죽을 벗기고 손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은 건 순전히 그 가죽과 손발과 눈알이 목적이었지, 뭔가를 알아내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스카리인이 말하는 태도는 고귀한 야만인을 방불케 했다. "게다가 저는 정보가 필요하면 주로 항구의 정보통에게 돈을 주고 사는 편이죠. 포로를 붙잡아 팔다리를 비틀어서 정보를 짜내는 건 꽤나 비효율적인 짓이니까요."

"그렇다면 어쩔 셈입니까?"

"심리적으로 공격할 겁니다. 그 빌어먹을 잡년이 차라리 산 채로 가죽을 벗겨달라고 애걸복걸할 때까지."

상처가 일그러지며 불길함이 콘크리트를 깨부수고 무너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낮게 킥킥대며 속을 뒤집어놓는 웃음소리. 하지만 뮬 소령은 그가 암시하는 노골적인 위협을 무시하고 가치 있는 정보의 획득을 선택했다.

"알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만 포로가 미쳐 날뛸 정도로 지나치게 하진 마십시오."

이런 대화에 익숙치 않은 판 휴이 소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스카리인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아아, 충분히 주의하겠습니다." 스카리인은 슬쩍 판 휴이 소위를 쳐다봤다. "소위, 뮬 소령이 인정할 정도라면 자네 능력은 결코 부족한 게 아닐세. 다만 경험이 부족하고 요령이 없을 뿐이지."

"그 요령이란 건 어떻게 배우는 겁니까?" 판 휴이 소위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직접 보고 배워야지." 스카리인은 너무나 당연한 답을 제시했다.

그러자 뮬 소령은 어깨를 들썩이더니 자신의 직속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자네들은 스키더 소령의 심문에 참관하게. 특히 판 휴이 소위, 자네에겐 좋은 공부가 될 테니까 잘 지켜보게."

- 저 친구는 반미치광이나 다름없어서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그러니 조심해서 지켜보게나 -

"알겠습니다!" 일행은 그렇게 말했고,

- 잘 알겠습니다 - 또한 이렇게 답했다.

뮬 소령은 무거운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기고 홀가분한 발길을 계단으로 옮겼다. 부엌 냉장고의 물소젖 치즈를 안주삼아 흑맥주를 마시며 적당히 시간을 때울 것을 상상하니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카디엔과 판 휴이와 질리언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반미치광이와 백치가 썩어서 무너져가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대면하는 모습을 보며 기꺼워할 정도로 완벽하게 미치진 않았기 때문이다. 포로의 등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은 카디엔 중위는 혐오감에 찬 눈빛을, 반대쪽 벽에 기대고 선 질리언과 판 휴이는 의심의 눈빛을 스카리인에게 날렸다.

"뺨을 후려갈긴 정도군. 강간하진 않은 모양이야?"

스카리인이 퉁퉁 부어오른 울바흐터의 뺨을 쳐다보며 카디엔 중위에게 물었다. 판 휴이의 얼굴은 분노로 달아올랐고 카디엔은 펄쩍 뛰어올랐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그런 터무니없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소령님께선 여, 여기서 그런 짓을 할 겁니까?"

"이렇게 거지반 정신이 나간 여자는 강간해 봐야 별 충격도 받지 않아. 그러니 할 필요가 없지."

"항상 그런 식으로 정보를 뽑아내는 겁니까? 대단하군요." 판 휴이 소위가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필요하다면 산 채로 갈비뼈를 뽑아내서라도 알아낼 건 알아내야지. 안 그러면 내가 죽을 테니까."

껍데기만 남은 조국을 위해, 분노와 뒤범벅이 된 긍지를 지키기 위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위해, 하나 뿐인 목숨을 어둡고 컴컴한 바다에 지푸라기처럼 내던진 사나이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콘크리트의 상자는 적막함에 포위당했다. 그리고 인간은 이렇게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 삶의 기쁨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스카리인은 무의식의 세계를 부유(浮游)하며, 초점을 상실한 눈동자를 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까 소령과 약속한 것도 있으니, 폭력은 절대 휘두르지 않을 걸세. 걱정 말게. 난 약속은 절대로 어기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일행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자, 만일…… 자네들 앞에 아무리 손잡이를 당겨도 열리지 않는 방문이 있다고 가정해 보세. 방 안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하겠나?"

질리언 상사는 단순하고 군인다운 답을 제출했다.

"문을 부숴야죠."

"틀렸어. 그건 밀어야 열리는 문이였어."

"어린애들의 넌센스 퀴즈 같군요."

카디엔 중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지만 스카리인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건 넌센스 퀴즈가 아니야. '정복당하지 않은 자들'의 이카파 족장님께서 내려주신 가르침일세."

"정복당하지 않은 자들? 족장? 그건 또 뭐죠?" 판 휴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네르사-쿤타의 아톨 씨족(氏族)이 스스로를 높여 부르는 말이야. 하지만 여기서 랏스 연합의 지리와 종족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이 이야기의 요점인즉슨, 문마다 여는 방법이 다르다는 거야."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만……" 판 휴이 소위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끝을 흐렸다.

"안다고? 아는 사람이 대체 뭘 한 건가? 소위, 자네가 한 짓은 문을 계속 잡아당긴 것뿐이잖나."

숨겨진 말뜻을 짐작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낯빛으로 서로를 번갈아 쳐다봤다.

"의식을 무의식의 심연에 가라앉혀 도망쳤다면, 그 무의식을 꿰뚫어 볼 수도 없고 부술 수도 없다면, 스스로 심연에서 헤엄쳐 나오도록 만들어야지."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판 휴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스카리인은 백자처럼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웃음으로 답했다.

"이렇게!"

그의 눈은 울바흐터의 눈을 향했다. 선명한 녹색의 의지가 무의식 속에 방치된 그녀의 신경을 장악하고 한 줄기 뚜렷한 사념을 흘려 보냈다.

포로의 눈이 빛을 되찾았다. 그것은 총기(聰氣)가 아니라 공포의 빛이었다. 포로의 몸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전율이었다. 포로의 입에서 침 대신에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비명, 비명, 비명!

"소령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괴로워하는 포로를 보면서 판 휴이 소위는 당혹스러워했다. 스카리인은 태연하게 설명했다.

"아톨 씨족의 족장은 학생을 가르치거나 죄지은 씨족원을 훈계할 때 상대의 신경계에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직접 전달하는 방법을 쓰지. 듣자하니 아주 오래 전부터 전승된 기술이라고 하더군." 그는 손을 들어 두꺼비 등짝처럼 흉하게 갈라진 왼뺨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걸 약간 응용해서 내 얼굴이 불탔을 때의 경험을 그녀의 전 신경에 쏟아 부었지. 지금 그녀는 온 몸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거야."

콰당탕 소리를 내며 의자가 넘어졌고 포로는 눈물을 흘리고 게거품을 물며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대며 피부를 불태우고 눈알을 파먹는 불길의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해 손을 길게 내뻗어 희망과 구원을 갈구했다.

하지만 스카리인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것은 절망의 웃음소리.

"그리고 내가 느낀 화염의 기세를, 내 피부가 녹아 내리고 눈알이 말라붙고 고막이 터져나가는 느낌을, 그 통증을 몇 배로 증폭해서 보낼 수도 있지. 자아, 아가씨, 이제 슬슬 무의식의 벽을 깨치고 나와 보실까?"

아주 짧은 찰나, 포로의 몸이 거짓말처럼 얼어붙더니 동공이 하나의 점으로 수축되었다. 다음 순간, 환각이 빚어낸 화마(火魔)에 휩싸인 성대에서 터져 나온 것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가로로 쪼개고 세로로 베는 날카로운 단말마!

"아니면 계속 노래를 부르던가!"

거센 화염의 멜로디를 부추기듯 악마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성난 불길은 습기찬 벽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영혼을 태워버렸다. 남은 것은 뇌수가 말라붙고 폐가 쪼그라드는 두려움이었다.

포로는 몸부림치며 손으로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을 긁었다. 뚜두둑 소리와 함께 손톱이 부러지고 뽑히며 핏방울이 튀었다. 오른쪽 어깨의 상처가 벌어져서 핏줄기가 솟아나고 눈이 까뒤집혀 시뻘겋게 충혈된 흰자위가 드러나면서 저주받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카디엔 중위는 공포에 오염되어 사시나무 떨듯이 하는 몸을 겨우겨우 지탱하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잔뜩 겁에 질린 질리언 상사는 견디지 못한 나머지 문을 박차고 도망쳐 나갔다. 판 휴이 소위는 이미 정신을 반쯤 잃고 바닥에 쓰러져 길게 누웠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할 짓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

카디엔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배를 붙들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뱃속에 있는 것을 남김없이 게워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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