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년의 동결을 강요당한 빙하(氷河)의 차가움이 엄습했다. 냉정해야 한다. 침착해야 한다. 그는 되뇌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빙하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극한(極寒)의 빛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여 추위로 감싸 안을 뿐이다. 그리고 탐험가들은 얼음과 눈의 세례를 받으며 기쁜 마음으로 죽어간다.

마음을 비운 빙하는 희생자를 기다렸고 시계 바늘은 멈추지 않았다. 8시, 9시, 10시 45분, 10시 89분, 11시. 11시 5분, 6분, 7분, 그리고……

낌새가 느껴졌다. 불확실한 육감이 아닌, 촉각이나 시각과 같이 확실한 사념 감각으로 느낀 것이다. 스카리인은 슬며시 눈을 감고 잠자는 척 몸을 뒤척이며 숫자를 세었다. 문밖에서 어슬렁거리는 놈이 하나, 옥상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녀석이 하나였다. 창문을 닦거나 복도 청소를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누군가를 죽이기엔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5초, 6초, 시간이 초 단위로 지나갔고 생각은 계속됐다. 광명성장은 매일같이 드나드는 청소차 운전수의 신분도 철저하게 확인하는 고급 호텔이었다. 청소부나 종업원으로 변장해서 침투하려면 먼저 견고한 보안 장치를 무력화시켜야 했는데 그건 숙련된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 에졸에서 암약하는 십자 연맹의 정보 조직이 이번 작전을 뒷받침했을 것이다.

14초, 15초, 객실 문이 열리면서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응접실 안에 누군가가 고양이처럼 살며시 들어왔다. 십자 연맹 지상군 166군단 1662사단 소속의 나가 울바흐터 소위, 나이 23세, 병종은 보병, 주특기는 저격과 암살이었다.

그녀는 단정한 홍차빛 블라우스와 윤기가 흐르는 공단 레이스로 장식된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었고 쪽진 머리에는 하얀 모자를 썼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쏟아지는 복도의 불빛에 날카로운 얼굴선과 붉은 입술이 도드라졌다. 교활하고 영리하고 민첩했기 때문에 '여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문이 닫히면서 빛이 사라지고 암흑이 덮쳤지만 크고 검은 눈동자는 금방 어둠에 익숙해졌다. 그녀는 드레스를 소리 없이 걷어 올리더니 허벅지 스타킹의 가터 위에 둘러찬 권총집에서 광택 없는 검은색의 짧은 열선총(熱線銃)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십성 동맹군의 제식 권총인 야트 14형, 고출력 레이저 광선으로 반 뼘 두께의 강판(鋼板)에 손가락 굵기만한 구멍을 뚫는 위력의 총이었다.

18초, 19초, 특수 밑창을 댄 구두가 카펫 위를 부드럽게 천천히 한 발짝씩 확실하게 전진했다. 그리고 아주 신중하게 사념을 확장시켜 스카리인의 위치를 탐색했다.

20초, 21초, 한 대의 청소용 로봇이 245층에서 244층으로 내려왔다. 지름 5리크(4.5미터)의 반구(半球)형 로봇은 이곳 직원들 사이에서 '거북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창문을 향한 배 부분에는 물 분사기와 회전식 롤러 스폰지가 붙어 있었고 반질반질한 흰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거북이 등딱지는 세월과 비바람에 잿빛으로 퇴색된 지 오래였다. 양옆으로는 2개의 케이블이 옥상의 대형 도르래와 연결되었고 머리 부분에는 한 사람이 겨우겨우 앉을 수 있는 좁다란 개방형 조종석이 붙어 있었지만 여기에 사람이 앉아서 직접 조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체로 자동 조종에 맡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조종석엔 사람이 타고 있었다. 1662사단 소속의 아인작스 기든 중위, 병종은 보병, 주특기는 파괴공작과 암살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살인 예술의 대가로 여겼고 그 사실에 자부심마저 가졌다. 부하들은 그의 솜씨를 솔직하게 존경하고 그의 존재를 경외했다.

뼈와 근육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마른 체형이었고 짧게 깎아 삐죽삐죽 세운 갈색 머리카락과 불거진 광대뼈와 여윈 뺨, 좁은 이마와 푹 파인 눈 때문에 사납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젊은이였다. 지금은 주황색 청소부 옷을 입고 손으로는 허리춤의 고정쇠에 연결된 안전띠를 쥐락펴락 하고 노란색 장화를 신은 발을 건들대며 초조하게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예술을 창조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25초, 26초, 이제 242층은 턱 밑까지 왔다. 기든 중위는 가슴팍을 헤치고 손을 집어넣고 길쭉한 총신을 가진 총을 꺼냈다. 그것은 슬로바 공화국군의 제식 권총인 헬메인더 8식 권총이었다. 한번에 15개의 강철침(鋼鐵針)을 날려보내서 상대편의 몸뚱이를 찢어발기는 전자장 가속총(電磁場加速銃)으로 검붉은 총신은 교만했지만 반응은 지극히 경쾌했고 소음은 없다시피 했다. 헬메인더 사(社)에서 일반 판매용으로는 한 해에 1천 정밖에 만들지 않는다는 희소성이 있었고 성능도 대단히 훌륭한데다 원형 코일이 삽입된 비정상적으로 긴 총신이 독특한 멋을 자아냈기 때문에, 암시장에 나오는 족족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는 권총이었다.

27초, 기든 중위의 머릿속에서 울바흐터 소위의 목소리가 울렸다.

- 바로 그 창문입니다. 중위님 -

거북이의 머리가 침실 창문턱에 걸리는 순간, 그는 빨간색 브레이크 스위치를 힘껏 잡아당겼다. 모터가 꺼지고 윙윙 우는 소리가 잦아들며 거북이가 제자리에 멈췄고, 기든 중위는 조종석에서 몸을 빼고 거추장스런 안전띠 걸쇠를 풀고 권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사념을 뻗어 마음의 눈으로 커튼 너머를 응시했다.

29초, 방 안의 구조가 손에 잡힐 듯이 그려지고 목표물의 위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희생자의 머리통을 정조준하며 마음으로 외쳤다.

 - 지금이다, 소위! -

문이 벌컥 열리고 휘황한 빛이 한 자루 창이 되어 날아왔다. 정으로 바위를 쪼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유리창에 작은 구멍이 뚫리고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새겨지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강철침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실내 공간이 크게 뒤틀리며 방향이 꺾인 빛과 침은 한 점에서 만나는 대신에 목표를 잃고 허공에서 옆구리를 스치며 교차해 지나갔다. 넓은 공간을 지배하는 힘, 광파(光波)와 전파(電波)의 흐름마저 굴복시키는 힘, 전체 사념 능력자 중에서 그 숫자는 채 1푼에 미치지 못한다는 제 1급 사념 능력자의 힘이었다.

울바흐터와 기든 역시 1급 사념 능력자였지만 코앞이나 다름없는 거리에서, 그것도 동시에 두 방향에서 공격을 받으면서 광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스카리인은 놀랄 틈조차 주지 않았다.

눈부신 빛이 어둠을 밝히고 커튼을 태우고 유리창을 녹여 새로운 구멍을 뚫고 거북이의 케이블 하나를 끊으면서 다시 진로를 바꿔 '대가' 기든 중위의 목을 뜨겁게, 그러나 시원하게 도려내고 고층 건물의 불빛을 뒤로 하며 드높은 창공으로 사라져 갔다. 균형을 잃은 거북이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졌고 기든 중위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는 낯빛으로 총을 떨어트리며 구멍 뚫린 모가지를 손으로 부여잡았고, 그 몸뚱이는 옆으로 쓰러지며 조종석을 벗어나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가 스스로의 육신으로 죽음의 예술을 완결시켰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가 없다. 중력의 힘에 이끌려 딱딱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보도 블록에 정통으로 부딪혀 쪼개지고 으스러진 핏덩이는 아무 말도 못하는 법이니까.

'여우'는 짧게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뜨거운 강침이 오른쪽 어깨죽지를 관통하며 많은 양의 근육을 덜어낸 탓이다. 강철침이 벽에 박히면서 망치로 못을 박는 소리가 연달아 귀를 때렸고 피가 뭉글거리며 블라우스에 스며들고 찢어진 살점이 바닥에 떨어지고 오른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급히 왼손으로 총을 바꿔 쥐어 방아쇠를 당겼다.

한 번, 스카리인이 상반신을 일으켰고, 두 번, 빛줄기는 그의 얼굴을 밝혔고, 세 번, 문드러진 얼굴 가죽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짐승의 웃음 소리가 광휘에 휩싸였다. 그리고 광선은 일그러진 공간을 비뚜루 지나 커튼을 태우고 창을 녹이며 허공으로 증발해 버릴 뿐이었다.

"소용없어."

스카리인이 웃음을 멈췄다. 울바흐터 소위가 들고 있던 권총의 총신이 구부러지고 총열은 어그러졌다. 그녀는 못쓰게 된 권총을 스카리인에게 냅다 집어 던지며 뻣뻣하게 굳어져 가는 오른손을 억지로 움직여 왼쪽 손목에 찬 굵은 은팔찌를 벗겨냈다. 겉보기엔 평범한 팔찌지만 안쪽은 플라스마 기폭장치와 화약, 가늘고 날카로운 금속 파편으로 채워져 있었다. 소음이 크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효과는 대단히 훌륭한 폭탄이었다.

울바흐터는 자신의 힘으로는 스카리인을 어쩌지 못할 거란 사실을 깨달았고 고작 이 정도의 폭탄으로 그를 죽일 수 있으리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연기와 파편으로 시야를 가리고 몸을 뺄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래서 진주 장식으로 위장된 안전핀을 이빨로 물어 뜯고 바닥에 팽개치듯 던지면서 강렬한 충격파와 파편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사념을 확장했다.

팔찌는 폭발했다.

연기는 솟아나지 않았다. 충격도, 파편도, 아무것도 없었다. 팔찌를 둘러싼 손바닥만큼 좁은 공간이 극적으로 일그러지고 축소되며 폭발의 위력은 더 이상 뻗어가질 못했다. 답답하게 번쩍이고, 새까만 연기가 머리통 절반만한 크기로 팽창하고, 자잘한 파편들은 동전 지갑처럼 요란하게 쩔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보이지 않는 벽에 격렬하게 부딪혔다. 공간의 모퉁이가 왜곡되며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이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금속 파편들은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스카리인이 다가왔다.

"소용없다고 말했잖아?" 그는, 다시, 웃었다!

숨이 막히는 절대적인 위압감 앞에서 그녀는 굴복하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고 공간을 지배하려 했지만…… 능력의 차이는 의욕만으로 극복할 수 없었다. 울바흐터 소위의 사념은 웃음 소리에 튕겨져 나와 자취를 감췄다.

"정말 귀찮군. 꿇어!" 그는, 다시, 웃음을, 멈췄다!

중력의 열 배가 넘는 힘에 붙잡힌 무릎은 엄청난 기세로 바닥에 부딪혔다. 부드럽지만 얇은 융단 아래, 단단한 대리석과 충돌하며 무릎 연골이 부서지는 충격에 그녀는 일시적으로 눈을 까뒤집었지만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엎드려." 그는, 가볍게, 말했다!

윗몸이 탄력 있는 용수철처럼 튕기더니 앞으로 엎어졌다. 융단에 흐드러진 푸르고 노랗고 빠알간 꽃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이마에 번개가 내리쳤다. 정신을 잃고 까무러친 여인에게 찾아온 것은 짧고 평화로운 안식, 결이 고운 융단 위에 화알짝 핀 것은 검붉은 피의 꽃, 그리고 악마에게 떠오른 것은 흐뭇한 미소!

- 카디엔 중위, 질리언 상사, 그쪽에서도 이미 다 봤겠지? 어서 이 여자를 데리고 가게 -

반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념을 보내면서 그는 지상에 낮게 깔리는 불유쾌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잡년이 불어댈 게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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