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키매냐 눈팅만 하다가 오랜만에 글을 남기게 되네요. 요즘 한참 키보드에 불이 붙어서 이러저런 키보드를 많이 거쳐갔습니다.


우선 풀알루 키보드에 입문해서 기성품 졸업 단계에 다가섰습니다. 저는 저소음 환경과 풀알루의 단단한 느낌에 동경을 품고 있어서 풀알루+저소음 흑축 조합을 구상했습니다. 숫자 입력을 많이 해서 텐키패드는 꼭 있어야 하고요. 텐키패드는 AR21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4월 말에 앱코 AR96 킷을 중고로 구했습니다. 다만 저소음 흑축을 구하지 못해서 실사용은 며칠 미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소음 흑축을 구하고, 본격적으로 타이핑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정작 키보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배열이 저와 안 맞았습니다. AR96의 라세 배열은 노트북을 모티프로 했는데, 저는 풀배열 외의 키보드에 진짜 적응을 못 하는 타입입니다. 이 때문에 AR96은 한동안 방치하고, 기성품 중에 뭐가 좋을지 탐색해 봤습니다. AR87도 좋아 보이지만, 몬스타기어에서 풀알루+퀵스왑+황동 보강판을 적용한 xo v2를 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전 퀵스왑에 큰 거부감이 없는 터라 xo v2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매물이 귀한 터라 구하는 데 정말 애를 먹었습니다. 중고 거래자에게 연락을 해도 놓치기 일쑤였고요. 그렇게 며칠 동안 수소문 끝에 간신히 구매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원래는 저소음 흑축을 물려 쓰려고 했는데, 구매자가 에버글라이드 오렌지축을 같이 준다고 해서 에버글라이드 오렌지축을 장착했습니다. 다행히 제품 상태는 이상 없습니다. RGB 효과도 마음에 들고요.


(몬스타기어 자체는 썩 좋아하는 회사는 아닙니다. 매크로 마우스 논란도 있고요. 하지만 xo v2 자체만 놓고 보면 잘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키감이 여태 겪어보지 못한 수준입니다. 황동 보강판은 처음 써 보는데, 특유의 부드러운 울림소리가 아름다울 정도입니다. 보강판을 때리는 소리가 예쁘게 들린 건 이 키보드가 처음입니다. HHKB 유저들이 말하는 '조약돌을 손에서 굴리는 느낌' 을 매우 깔끔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래서 커스텀 키보드에 황동 보강판이 적용된다는 걸까요? 3.1kg의 무게와 흡음재 설계 덕에 통울림도 전혀 없습니다. 체리 저소음 축을 안 쓸 뿐이지, 저소음 축을 장착해 구름타법을 구사할 경우 무소음 수준의 타이핑도 가능하겠구나 싶습니다. 에버글라이드 축도 처음 써 보는데 서걱임 없는 리니어 느낌이 깔끔하고, 여기에 레승 키캡을 장착하니 이보다 부드러울 수가 없더군요.


텐키패드는 AR21로 갈 생각이었습니다만 운이 따라주지 않아 제때 구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FC210TP 저소음 적축을 물렸습니다. 이 조합도 마음에 들더군요. 텐키패드는 타이핑 떄와는 달리 필요할 때만 잠시 쓰는 도구이니 FC210TP 정도면 충분해 보입니다.


이 키보드를 통해 기성품은 졸업했습니다. 현재 보유중인 키보드 중 일부를 개조하거나 간단한 키캡놀이는 몰라도, 키보드 본체는 이 조합으로 갈 생각입니다. AR96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키보드로 오는 동안 여러 곡절이 있었는데, 그 동안 미뤄두고 있던 키보드 공부를 참 많이 했습니다. 풀알루 키보드에서부터 보강판 재질, 각종 스위치 종류, 커스텀 키보드 개요까지... 좋은 키보드를 사면 키보드 지식이 껑충 뛰어오르는데, 제 경우는 IBM 모델 M과 리얼포스 하이프로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한 번 많은 지식을 쌓고 갑니다.


키보드 구매 글은 이 정도로 하고... 여친님의 제보를 적겠습니다. 원래 여친님은 제가 선물해 준 레오폴드 FC900R을 쓰고, 제가 쓰던 AR96도 배열에 문제가 없어서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물을 하려고 했는데, AR96을 처음에 연결했을 때는 잘 작동하다가 그 다음날부터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키보드의 RGB 조명도 들어오고 마우스 등 다른 장치는 연결이 되는데 키보드 입력 연결만 유난히 말썽이더군요.


백방 문제를 찾아봤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쓸데없는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을 모두 제거 프로그램으로 없앴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그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은 삭제되면 키보드 입력 체계를 꼬아놓아서 외부 입력장치 연결에 문제를 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갖은 수단을 동원하다가 장치 관리자의 키보드 드라이버를 삭제 후 재설치하고서야 겨우 해결했습니다. 그나마 한 번은 바이오스에서 이상한 세팅값이 나와서 큰일날 뻔하기도 했고요.


어찌어찌 고치는 데 성공은 했지만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이 이렇게까지 체계를 꼬아놓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나마 생각해보니 여친이 노트북을 썼으니 망정이지, 만약 데스크톱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데스크톱은 키보드가 없으면 입력할 수단이 마땅치 않으니까요.


마지막으로 현재 책상 구성입니다. 원래 하이프로가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xo v2+에버글라이드 오렌지(ESC와 Insert 키는 저소음 흑축. Insert 키가 잘못 눌리기 쉬운데 혼자 고압 스위치를 넣어주니 좋더군요)+FC210TP 저소음 적축+레오폴드 그레이블루 승화 한글 키캡입니다. 기성품 조합은 이것으로 종결을 볼 생각입니다.


(물론 하이프로를 방출할 생각은 없습니다. 모델 M과 더불어서 제 무덤 속까지 가져갈 키보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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