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게시판들에 올라온 글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몇마디 글로 그 소회를 풀어볼까 합니다.

 

처음에 그저 '키보드가 고장났으니 가격대비 성능비가 괜찮을 걸로 하나 장만을 하자'라고 생각하며 이 커뮤니티에 발을 들인 것은 비단 저 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팔랑귀가 되어서 다른 고수 회원님들이 좋다는 거 다 만져보고 싶고, 가져보고 싶고 해서 장터 매복이다 이베이질이다 하면서 밤을 지세웠던 것도 비단 저 뿐만은 아니었겠지요.

 

키보드라는 물건도 일종의 기호품이자 자기만족의 특성이 강합니다.

역시 느낌이 전부이지요.

그런데 이 느낌이라는 것이 끝이 없는지라 아무리 질러대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놈은 이부분은 좋은데, 저부분은 좀 별로구..

옛날 치코니 키보드는 안그랬는데 왜 요즘 3000은 키감이 별로인 것 같지..(처음에소위 구형이다 신형이다라는 구분이 만들어진 것은 여러사람의 리포팅에 의한 결론이었지 어떤 일군의 사람들에 의한 조작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밝혀두고 싶습니다. http://www.kbdmania.net/xe/118048)

이색사출은 키감은 좋은데 요철도 없고 빨리 닳아지고..(http://www.kbdmania.net/xe/?mid=freeboard&search_target=user_name&search_keyword=%EC%84%B1%EC%8B%9C%ED%9B%88&page=6&document_srl=130502)  

보강을 하면 부드러움은 없어지는데, 탱탱하고 선연한 맛이 있고...

보강을 철판으로 하면 좀 퍽퍽한데, 알루미늄으로 하니 부드러운데다가 소리도 좋고...

.

.

좀 더, 좀 더, 좀 더 하다보면 키보드 박스는 산처럼 쌓여있고, 은행 잔고는 늘 밑바닥, 일말의 자괴감.

왜 느낌 좋은 키보드는 현행품이 아닐까.. 느낌찾아 삼만리..(http://www.kbdmania.net/xe/101237, http://www.kbdmania.net/xe/102070)

 

그러다가 05년도 즈음에 정말 조강지처로 삼을만한 키보드를 하나 만나, 그 이후로는 쭉 이것만 쓰고 있습니다.

한번도 메인의 자리를 내려간 적이 없습니다.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걍 키보드일 뿐이지만, 알고보면 결코 소박하지도 저렴하지도 않습니다.

MX5000, 5700각 한 대(그러니까 오징어 한세트...)에서 적출한 갈색 스위치를 윈키 3000(이색사출 키캡)에 넣고, CNC가공으로 사면 절곡한 알루미늄 보강판을 넣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걸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다른 키보드가 눈에 차지 않았으니, 미련이 없어지더군요.

배열도 풀배열 104를 가장 선호하는 터라 더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과연 돈이 얼맙니까...

 

우습게도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얼마전입니다.

-여친 曰 "나 오빠 자리에서 컴터 할래."

-나 曰 "웨~~"

-여친 曰 "키보드가 도각도각해서 기분 좋아~"

바로 이 때 입니다.

 

이색사출 키캡은 다 닳아서 맨질맨질 광이 날 정도고, 처음에 완벽하게 균일하게 튜닝했다고 자부했던 키감들은 이제 들쭉날쭉하지요.

천하의 5000 갈축도 쓰다보면 별 수 없습니다.

그래도 고장나지 않는한 이걸 메인에서 내려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걸로 글을 써나갈 듯 합니다.

 

제가 많이 활동할 때와는 달리 키보드라는 영역에 대한 저변이 대단히 넓어진 듯한 느낌입니다.

이베이나 개인 수입품 등에 의존해야만 했던 2000년대 중반에 비하면 정말 살 수있는 물건도 많고, 고급 수요에 대한 공급도 많습니다.

더구나 고급 수요에 대한 공급이 일부 개인적 공제 등의 형태가 아니라 공식 유통이라는 점은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PBT키캡을 따로 판매한다거나, 타입나우 솔리드 같은 것이 공식 유통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한정판 필코 메탈 알루미늄 키보드를 못구해서 안달이던 시절이 불과 몇 년전입니다.

 

더 좋은 것, 희귀한 것, 고급스러운 것을 찾아 다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매니아의 숙명인 듯 합니다.

집착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맞지만, 집착 이전에 열정과 애정이 깃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가장 마음에 드는 키보드 한대, 그리고 키보드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인 것 같습니다.

재밌는 키보드 라이프를 함께 즐기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