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런 류의 글을 쓸 때는 아무래도 개인적인 관점이 많이 들어가므로, 다음 사항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1988,        컴퓨터를 접함
1989,        프로그래밍을 시작
1998,        KS X 5002:1982에서 3-90으로 넘어감
1999,        3-90에서 공병우 세벌식으로 넘어감
1999,        ISO/IEC 9995-1:1994, ANSI INCITS 154-1988(R1999)에서 ANSI INCITS 207-1991(R2002)로 넘어감
2004,        키네시스 체형공학 키보드 사용

이렇게 바꾸다 보니 몇가지 오해가 눈에 밟힙니다.

0. 공병우 세벌식이나 안마태 한글 소리 글판, 또는 Dvorak과 같은 배열은 뭔가 특별하다. 그래서 빠를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타수가 빠른 것은 운동신경과 반복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모아치기를 하는 안마태 글판 조차 운동신경이 안 좋아서 손이 꼬이면 두벌보다 느릴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기타 연주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과연 권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미 익숙해진 우리들은 잘 못 느끼지만 키보드는 컴맹들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가장 큰 장벽입니다. 또, 이런 연구 작업에 있어서 시험 대상은 항상 전문 타자수였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지만 같은 타수의 사람이 효율적인 배열을 쓸 경우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더 빨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마나 게으른지는 생각해야 합니다. :-)

1. 3-90은 프로그래머를 위한 것이다?
코딩에 한글을 빈번하게 이용하는 분. 굳이 지적하자면 C#에서 enum 거센소리 {ㅋ, ㅌ, ㅍ, ㅎ};같은 코드를 쓰는 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실제 업무에서 저랬다가는 감봉이 아니라 권고사직이겠지만...) 실제 현장에서 한국어 문장과 함께 각종 연산자들을 같이 쓸 확률은 0에 수렴하고, 따라서 한국어를 위한 한글 배열이라면 한국어의 문장부호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런 점에서 위에 열거한 배열들 가운데에서는 공병우 세벌의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참조표(당구장 표시)를 ㅁ C-Spc 6으로 입력할 필요가 없다는 점 등은 한국어 사용자에게 충실한 부분입니다. 이모티콘의 경우조차 MSN 메신저의 창궐과 함께 일본에서 유래된 ^^류는 많이 빛을 잃었습니다. 세벌을 새로 배우시는 분은 공병우 세벌식을 쓰시길 권합니다.

2. 도깨비불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두벌식에서는 없앨 수 없다.
놀림 받을 정도의 도깨비불이 생긴 까닭은, 모 교수님이 대학원생 시절에 한국어 오토마타 모델을 만드시면서 장난 삼아 넣은 것을 그 뒤에 아무도 손 댈 생각을 하지 않은 데에서 기인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도, "한국어에서 가장 큰 빈도를 차지하는 받침이 (없음)인데 많이 이상하지? 누가 나중에 구현할 일 있으면 제대로 해라."라고 하십디다. 실제로 오토마타를 신경써서 구현하면 도깨비불의 태반은 안 볼 수 있습니다. 도깨비불 현상은 심각한 시각공해입니다. 모니터 주사율이 낮아서 괴로운 것은 못 참는 분들이 심각하게 프레임이 튀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뭔가 사리에 안 맞아 보이기도 합니다. 아예 없앨 수는 없지만 꽤나 의미있는 수치까지 줄일 수 있습니다.

3. 그러면 뭐하러 배열을 바꾸는 거냐?
VDT 한 번만 당해보시면 알게 됩니다. 손목이 뒤틀리고 수전증이 생깁니다. :-( 좋은 배열은 손에 부담을 덜 주고 동선이 짧기 때문에 타수도 덩달아 잘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키보드랑 가까이서 밥벌어 먹고 산다고 생각하시면 배열을 바꾸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버는 돈보다 병원비가 더 깨져나가서야 쓰겠습니까?

4. 그래도 표준이라니 더 좋은 것이 아닐까?
QWERTY의 경우 타자기 파손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손이 최대한 꼬이도록 만든 배열임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두벌식의 경우에도 빈도수 조사를 얼추 해 보아도 전혀 연구과정 없이 대충 만든 자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 다 표준이긴 합니다만. 가까운 표준 중에 XML이라는 간소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사장되다 시피 하던 ISO 8879 SGML이라는 녀석도 있습니다. 사실 이제 키보드라는 입력장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더 효율적인 도구가 등장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그 전까지는 키보드가 표준 입력 도구일 것입니다. 표준이란 결국 사람 사이의 의사 소통을 위한 약속입니다. 좋은 것과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끝으로, 제가 쓰고 있는 키네시스 키보드뿐 아니라 뇌출혈 키보드 등처럼 통상의 2차원 레이아웃을 탈피한 키보드들이 시장에서나 하이엔드 키보드 사용자에게 외면받게 되는 이유를 작업 동선을 고민하다가 깨달았습니다. 윈도우 이후엔 마우스 없으면 살기 불편한 것이 그 이유입니다. 마우스를 쓰자니 한 손을 떼야 하고, 나머지 한 손으로 모든 단축키를 쓰는 것이 매우 곤란합니다. 그래서 키네시스 사에다가 다음 라인업에는 양 검지 위치에 트랙포인트를 붙여 달라고 요청할 예정입니다. 이런 점은 역시 Datahand가 한 수 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합이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컴퓨터를 쓸 수 없어 보안성은 좋아지는 현상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