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좋은 키보드 갖고 싶다는 생각만 하다가 최근에 "맘에 드는 키보드 없으면 내가 직접 만든다!"를 해보겠다고 나섰습니다.
결국 엄청 삽질했는데… 그 썰을 좀 풀어보려고 합니다.
일단 최종적으로 이렇게 생긴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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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로서는 꽤 괜찮은 물건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좋은 경우) "뭔가 인체공학적이라는 건 알겠는데, 왜 이렇게 생긴 거냐? 왜 이렇게 해야 하냐? 이러면 정말 편하냐?"

(나쁜 경우) "도대체 이 해괴망측한 것은 무엇이냐"

;;
그래서 일단 어쩌다 이런 물건을 만들게 됐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생겼는지에 대해 먼저 좀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배경

저는 원래 LINE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했습니다. 메신저 만드는 회사요.
회사에 노트북을 LG그램으로 신청해서 쓰고 있었는데,
아시다시피 LG그램 물론 좋은 물건이지만 랩탑 내장 키보드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죠.
제 직업이 프로그래머이다 보니까 키보드 써야 되는 시간도 남들보다 긴데,
옛날에는 리얼포스, 해피해킹 같은 명성 높은 키보드들의 20만원 30만원 가격을 듣고

원 세상에… 키보드 값이 무슨 내 한 달 식비보다 비싸
하면서 그림의 떡 이상으로 전혀 생각을 하질 않았습니다.
(IMF 이후 집이 망해서 대체로 가난하게 살아온 터라 돈 드는 취미 갖는 게 불가능해서 코딩 같은 취미만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사 다니면서 월급을 받고, 혼자 살면서 돈 쓰는 거 없다 보니 저축이 아주 조금 생기고,
그래봤자 전세금도 안 되지만… 어쨌든 괜찮은 키보드 하나 장만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찾아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침 크라우드펀딩이라는 생산형태가 자리를 잡으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키보드가 등장하던 시기였죠. 그 중에 찾아보면 제 맘에 드는 키보드가 하나쯤 있겠지 싶었습니다.


제가 당시에 키보드의 조건으로 생각했던 것들은 이렇습니다.


1. 회내(pronation)를 좀 안 하고 싶다!

근골격해부학에는 어려운 용어가 많이 나오지만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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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아래팔에는 요골과 척골이라고 불리는 두 개의 뼈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평소에 "악수자세"라고 불리는 자세에서 자연스러운 평행을 이룹니다.
이때는 엄지손가락이 하늘방향을 가리키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아래팔만 돌릴 수 있는데 이 동작을 "회외"(supination)와 "회내"(pronation)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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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엄지손가락이 몸 안쪽을 가리키거나 바깥쪽을 가리키게 할 수 있고

키보드를 쓰려면, 팔꿈치를 둘러싼 근육·힘줄·인대를 움직여서
아래팔을 회전시켜 엄지손가락이 몸 안쪽을 가리키는 "회내"를 해야 됩니다.

회내가 왜 문제인가?

사람이 장시간 키보드와 마우스를 쓰면 아래팔을 회전시킨 회내자세가 강요된 채로 오래 유지하게 되는데,
뼈를 뒤틀기 위해 팔꿈치를 감싼 근육·인대·힘줄들이 당겨진 상태이다 보니 피로가 누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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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체는 원래 특정부위의 과도한 부하를 본능적으로 다른 부위의 움직임으로 완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키보드를 쓰면 쓸수록 몸 여기저기가 거북목 자세를 비롯해 나쁜 자세로 바뀌고
견갑골 통증, 허리 통증, 목 통증 등등 몸은 난장판이 되기 시작합니다.
사무직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건강은 다 이런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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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것들은 사람이 정말 강철같은 의지가 있어서
어떻게든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한 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서 스트레칭 등을 실천해서
극복할 수 있다 치더라도
정말 어떻게 안 되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손목 터널 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수근관 증후군(Carpal Tunnel Syndrome; CT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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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S로 인해 근손실이 발생한 환자의 손)


저는 프로그래밍을 오래 하다가 간혹 손이 시큰거리는 증상이 있어서 이게 그 손목터널인가… 하고 찾아봤는데요.


수근관 증후군(Carpal Tunnel Syndrome; CTS)은 말 그대로 수근관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수근관이란 손목 속으로 지나가는 관입니다. 이 안에 정중신경이라는 신경이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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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이 압박을 받으면 손목에 있는 정중신경이 압박을 받고, 정중신경이 압박을 받으면 손끝으로 이어지는 신경계 전체가 압박을 받아서
기능이 망가지고 무너져내리는 현상입니다.
수근관 증후군이 악화되었을 때의 증상은
지속적인 손끝의 찌르는 듯한 통증, 무감각증, 손 저림, 근육 위축, 근육 손실 등등이 있습니다.
프로그래머 인생을 얼마든지 끝장낼 수 있는 것입니다.
눈과 손이 유일한 제 밑천인데…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CTS로 인한 지속적 통증이 개선되지 않는 경우?
수술적 조치를 하게 되는데요,



혐짤주의



(혐짤이라 본문삽입은 하지 않았습니다. 수술장면 등에 내성이 있으신 분들만 아래 주소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arpal_Tunnel_Syndrome,_Operation.jpg
)

위키백과의 Carpal Tunnel Syndrome 항목에 실린 수근관 증후군 환자의 수술 장면 사진입니다.
이 수술은 쉽게 말해 손목을 째고 인대를 끊는 수술입니다.
위 그림으로도 보여드렸지만 가로손목인대를 끊으면 정중신경이 덜 압박을 받게 되기 때문이죠.
수술은 당연히 부작용과 후유증이 있습니다.
통증 등의 증상은 호전되나, 인대를 끊었기 때문에 악력이 떨어져서 무거운 물건은 들지도 못하게 됩니다.
악력이 다시 회복될 가능성도 불투명하고요.

CTS 예방을 위해 젤패드 같은 걸 쓰기도 하는데, 효과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결국 젤패드도 압력을 좀 더 넓은 면적으로 분산시켜주는 물건이지, 없애주는 물건이 아니죠.

애초에 자연스러운 악수자세가 아닌 부자연스러운 회내자세를 강요하니까
팔꿈치부터 시작해서 어깨 허리 목 등 사방팔방에 피로가 누적되고 통증이 생기는데
사실 키보드가 정말 인체공학적으로 올바른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근골격계 통증도 CTS도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입니다.

그러면 회내자세를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악수자세로 쓸 수 있어서 CTS도 예방되고, 팔꿈치 피로도 없는 키보드가 있는가?
있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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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feType이라는 녀석입니다.

그런데… 좀… 그렇군요…

정말 말 그대로 기존 키보드 레이아웃 유지하면서 쪼개놓기만 한 물건입니다.
그리고 비싸고($290),  딱 그 문제 하나만 해결한 물건이라, 다른 많은 기준에 걸려서 단념했습니다.


2. 손가락 관절과 인대 좀 안 아프고 싶다!

검지부터 소지까지 네 손가락은 내부적으로 인대와 힘줄에 의해 연결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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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따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애초에 근골격해부학상으로 손가락은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손가락을 구부려서 주먹을 쥔 뒤에 무명지(결혼반지 끼는 넷째 손가락)만 펴려고 하면 도무지 펴지질 않습니다.

이것은 해부학적으로 손가락폄근(extensor digitorum)이 검지에서 소지까지 네 손가락에 모두 연결돼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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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에 네 손가락과 연결되어 있는,  보라색으로 표시된 근육이 손가락폄근입니다.)

무명지를 펼칠 때에는 반드시 이 근육을 수축시켜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손가락을 펴지 않고서 무명지만 펼 수는 없는 거죠.
이렇게 따로 놀지 못하는 손가락들을 따로 움직이려고 억지로 비틀다 보면 손가락 많이 쓰는 사람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건초염, 건막염 등의 질환과 반복긴장성손상증후군(Repetitive Strain Injury: RSI)의 원인이 됩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비틀면 그냥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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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문제가 이런 단축키들입니다.
불여우에서 닫은 탭 다시 살려낼 때 Ctrl+Shift+T를 쓰죠.
새 탭 여는 단축 키가 탭(Tab)의 첫 글자를 따서 Ctrl+T니까
닫은 탭 살려내는 단축 키는 Ctrl+Shift+T라는 건 논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그걸 실제로 키보드에서 눌러야 되는 인간의 손이 좀 고통스러울 뿐;;
(그나마 일반적으로 잘 쓰는 트릭인 Caps Lock과 Ctrl 교체를 적용했는데도 여전히 저런 겁니다. 안 했으면 더 심하게 손이 아팠겠죠.)

Ctrl, Alt, Shift 등 다른 키와 같이 눌리는 것을 전제하는 키들을 프로그래밍에서는 "수식자"(modifier)라고 하는데
키보드에서는 수식자 키를 소지, 때로는 무명지와 소지로 누르게 되어 있습니다.
얘들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들이 아닙니다.
게다가 평소에 키보드 쓰던 위치에서 갑자기 Ctrl+Shift를 누르고 싶으면 손목도 꺾어야 합니다. 척골편향(ulnar deviation)이라고 손목 꺾는 자세인데 당연히 손목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나중엔 시큰시큰한 통증도 생기고요.

뭔가 잘못됐습니다.
다른 키와 조합해서 눌러야 하는 키라면
다른 손가락과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이 담당을 해야
고통스럽지 않게 누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손가락이 있습니다.
엄지손가락입니다.

엄지는 다른 손가락들과는 별도의 근육과 인대로 잡아당길 수 있기 때문에 완전히 독립적인 컨트롤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기존 키보드는 엄지 자리에 뭐가 있는가? … 스페이스바 하나가 있군요.
그것도 양손 엄지 다…


3. 손 안 떼고 싶다

사람이 집중해서 일을 할 때 인터럽트(interrupt; 문맥에 따라 "방해"로도 번역하고 "중단"으로도 번역해야겠죠)가 일으키는 생산성 저하가 생각보다 매우 큽니다. 인터럽트로 인해 생각의 흐름이 끊기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이 집중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총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럽트가 많을수록 이 집중시간이 낭비되는 것이죠.

사실 제가 말 안 해도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시는 문제일 겁니다. 아사디시피 키보드에는 기본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자리에 손을 둔 채로 누를 수 있는 키가 너무 적습니다. 얼마나 적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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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스페이스는 어떤 통계에서든 가장 자주 쓰이는 키 중 3위 안에 들 정도로 많이 쓰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은 실수를 하는 동물이고 백스페이스는 바로 실수를 교정해주는 키니까요. 그런데 그 백스페이스조차 저처럼 손이 작은 사람은 기본 위치에서 손 안 떼고 누르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누르더라도 손목과 손가락을 많이 꺾어야 합니다. 당연히 손목 건강에 좋지 않죠. 또다른 실수 바로잡기 키인 Ctrl+Z 역시 누르기에 충격적으로 불편한 위치에 있습니다. 자주 쓰는 키들이 이러한데 하물며 그렇게까지 자주 쓰지 않는 키들은… ESC 키는? 화살표 키는? Home/End는? 숫자 패드는? 그리고 끝판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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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는 그 아무리 이 세상에서 손이 가장 큰 사람이라도 기본 위치에서 잡을 수가 없겠죠.;;


예를 들어 일반적인 사무직 일을 하다 보면 워드프로세서, 스프레드시트, 프레젠테이션 정도는 기본으로 자주 만지게 됩니다. 아니 사무직뿐만 아니라 고등학생 대학생 정도만 되어도 학교과제 하려고 이런 툴들 쓰게 됩니다. 이런 작업을 하다 보면 키보드와 마우스를 왔다갔다 해야 합니다. 아래아한글 단축키 마스터한 분들은 단축키만 가지고도 복잡한 표를 만들어내는 마술을 부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우스를 아예 안 쓸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키보드와 마우스를 번갈아 쓸 때마다 손이 일종의 재조정(recalibration)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키보드만 쓰고 있다가 마우스를 써야 하면 마우스를 잡고 일단 흔들어 봅니다. 포인터 위치도 파악하고 마우스를 얼만큼 움직이면 포인터가 얼만큼 움직이는지 알기 위해서죠. 컴퓨터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본능적으로 이걸 합니다. 그러다가 키보드로 손이 돌아오면 또 정확한 위치설정을 다시 해야 합니다. 숙련자들의 타자속도가 빠른 것은 키보드 기본 위치에 손이 있을 때에는 키보드를 보지 않고 화면만 보면서 타자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화면에서 눈을 떼어야 하는 순간 입력속도는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한번에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그 시간 중 상당 부분을 키보드 마우스 위의 정확한 위치 찾느라 소모한다면 당연히 생산성이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 솔루션 중에 예를 들어 구 IBM 랩탑 같은 것들은 흔히 빨콩이라고 부르는 포인팅 스틱이 키보드 한가운데에 있어서 타자 치다가 손 안 옮기고서도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마우스나 트랙볼이나 터치패드 같은 진짜 포인팅 장치에 비하면 불편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꽤 쓰게 됩니다. 이유는 단 하나, 손 안 떼고 쓸 수 있어서. 그래서 괜찮은 접근이라고 전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4. 손목 좀 안 꺾고 싶다

말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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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위치에서 어떻게든 손 안 떼고 백스페이스 누르려다 손목 부러지겠다… 오랫동안 느껴왔습니다.


설계

이런 희망사항들을 정리하고 나서, 여기에 만족되는 제품을 찾아봤는데… 결과는 짐작하시겠지만 없었습니다. 지금쯤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물건 하나쯤 나왔을 법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물론 별별 키보드가 다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서 써본 녀석도 몇 대 있고요. 하지만 다들 뭔가 하나씩 걸렸습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은, 없으면 만들면 되지! "자작 키보드" 관한 글 몇 번 본 적도 있고, 명색이 공대출신 그것도 컴퓨터 전공자로서 키보드 하나쯤 못 만들겠는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일단 설계를 해봅니다.

설계상의 제약조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손 안 떼고 쓰는 키보드"를 만들려면 아무래도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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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기본 위치에서 누를 수 있는 것은 표준 101/102 키 키보드에서 대략 여기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키들도 어떻게든 기본 위치에서 다 누를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평면 키보드에 아무리 배열을 잘 해봤자 답이 없습니다. 3D 가야 합니다.


설계: 검지에서 소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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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의 해부학적 가동범위(range of motion)에 맞춰 각 손가락을 위한 키들을 곡선상에 배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야 한 손가락에 더 많은 키를 배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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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보시다시피 검지부터 소지까지 네 개의 손가락에는 세 개의 관절이 있습니다.
손바닥과 손가락을 연결하는 관절을 중수 수지 관절(metacarpophalangeal joint, mcp joint)라고 하고
손가락 두 관절 중 몸쪽에 가까운 것을 근위 지간 관절(proximal interphalangeal joint, PIP joint),
먼 것을 원위 지간 관절(distal interphalangeal joint, DIP joint)이라고 합니다.
관절 이름은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관절의 기능인데 이 중에서 좌우운동이 되는 관절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중수 수지 관절만 좌우운동(해부학적으로는 외전·내전이라고 합니다)이 되고
나머지는 전부 다 구부렸다 펴는 상하운동(해부학적으로는 굴곡·신전이라고 합니다)밖에 안 됩니다.
게다가 중수 수지 관절의 좌우운동이라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어서 가동범위가 0도에서 20도 나오면 정상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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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원위 지간 관절과 손끝은 가까운데, 중수 수지 관절과 손끝은 멉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상하운동은 아주 잘 되고, 편하고, 범위도 넓고, 미세한 동작도 쉬운 반면
좌우운동은 잘 되지도 않고, 불편하고, 범위도 좁으며, 미세한 동작도 어렵다

더 쉽게 말해 손가락의 상하운동은 신컨 되는데 좌우운동은 발컨이다.
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키보드는 검지-소지 네 손가락의 상하운동만으로 쓸 수 있게 하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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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키를 격자 위에 배열하지 않기로 합니다. 손가락을 구부렸을 때, 또 손가락을 폈을 때 손끝의 위치는 손가락마다 다릅니다. 각 손가락에 "키 컬럼"을 부여하되, 각 컬럼은 서로 평행하지도 않고 같은 위치에서 시작하지도 않으며 같은 위치에서 끝나지도 않게 합니다.

오래 전에 CAD 잠깐 만져본 경험을 되살려 배치를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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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배치된 키들은 다시 아래팔의 회내 강요를 막기 위해 세로로 세워놓습니다. (처음에는 90도로 세웠는데 나중에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75도로 수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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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키 스위치의 배치가 결정되면 거기에 맞춰 전면 프레임의 형상도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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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포인팅 장치

손 안 떼고 쓰는 키보드의 핵심인 트랙볼을 준비합니다.
평면에 엎어져 있던 키보드의 키 배열면을 일으켜세웠기 때문에
엄지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이 갑자기 확 넓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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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엄지 닿는 곳에 미니어처 트랙볼이 아닌 일반적인 트랙볼 장치에서 쓰이는 표준 34mm 트랙볼을 넣는 데에 무리가 없습니다.
사실 이 표준 크기 트랙볼 넣는 거야말로 최초에 키보드 직접 만들기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떠올리고 보니 너무나 좋은 생각인 것 같은데 아무도 안 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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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지에서 소지로 누르는 키들 중에 네 개를 마우스용으로 할당하기로 합니다.
좌클릭, 중클릭, 우클릭,
그리고 한 키는 "휠 모드"로 할당합니다.
휠 모드 키를 누른 상태로 트랙볼을 움직이면 휠 스크롤이 되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설계: 수식자

그런데 엄지가 트랙볼만 담당하고 끝이 아니라서 고민이 생깁니다.
아까 손가락들은 독립적 움직임이 어렵고 그래서 Ctrl, Alt, Shift 등의 수식자 누를 때 손가락이 찢어지는 듯하다,
그런데 오직 엄지만 완전 독립 움직임이 가능하다
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러므로 엄지에 수식자를 넣기로 합니다. 처음에는 엄지에 일렬로 키 스위치를 배열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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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보니까 엄지에 넣을 수 있는 키가 생각보다 적습니다.
일단 수식자 네 개(Ctrl, Alt, Shift, 그리고 흔히 "윈도 키"라고 부르는 Meta)를 넣어야 하는데
사실 좌우 엄지에 다 배치할 필요는 없고 하나씩만 있어도 되니 왼쪽에 Ctrl과 Alt, 오른쪽에 Shift와 Meta
이런 식으로 넣어도 되지만 그러면 수식자 조합이 안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Ctrl+Alt를 누를 수가 없게 되죠.
게다가 지금 "모든 키를 다 기본 위치에서 접근 가능하게" 하겠다는 상황인데
검지부터 소지까지 각 손가락에 6키씩 욱여넣어도 좌우 48키입니다. 101/102 대응은 턱도 없습니다.
그러니 별도의 레이어를 제공해줄 Fn키도 하나 필요합니다.
그러면 수식자 키가 다섯 개입니다. 도저히 넣을 공간이 안 나옵니다.
설령 공간을 어떻게 해결한다 해도 문제가 있는데, 예를 들어 Ctrl+Shift+Home을 누르고 싶은데
Home이 기본 레이어에 없고 Fn레이어에 있다면?
Ctrl+Shift+Fn+Home을 눌러야 되는데 좌우 엄지를 다 써도 세 개 누르기는 좀 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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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궁리 끝에 트랙볼 못지 않게 정말 괜찮은 방안이 나왔는데
게임패드의 십자키나 스틱 같은 방향스위치를 쓰는 겁니다.
4방향 및 대각선으로 움직일 수 있고 클릭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4방향에 각각 Ctrl, Alt, Shift, Meta를 배치하고 클릭에 Fn을 배치하면
좌하방향 대각선 이동시 Ctrl+Alt, 우상방향 대각선 이동시 Shift+Meta,
클릭상태로 대각선 이동시 Ctrl+Alt+Fn 등등
복잡한 수식자 조합입력이, 엄지손가락 원터치로 가능해집니다.
양손 엄지를 다 쓰면 Ctrl+Alt+Shift+Meta+Fn 같은 해괴한 입력도 어렵지 않습니다.


설계: 핸드레스트

손을 악수자세로 쓰게 되니까 손날이 지면을 누르게 되는데,
손날 압박 때문에 피로가 쌓이거나 통증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손의 무게를 고르게 분산하여 떠받칠 수 있도록 곡면으로 된 핸드레스트를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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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많은 분들이 핸드레스트를 보고 손목 받침대냐고 물어보시던데,
아닙니다.
손목 받침대가 아니라 손 받침대입니다. 손목은 닿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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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거치되는 것은 손날입니다. 손목은 포함하지 않습니다.
손목을 보호하는 것이 설계 목적이기 때문에 손목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막연히 키 배열면에 손이 위치할 것이고, 그보다 더 몸 가까운 쪽에 위치한 받침대이니
손목이 놓일 것이다… 이런 오해가 아닌가 싶은데
키 배열면에는 손가락이 위치하고, 핸드레스트에는 손날이 위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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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배열면과 핸드레스트의 각도는
"손 크기에 무관하게 사용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결정했습니다.
위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핸드레스트 상에서 손을 몸에서 더 멀리 두거나 몸에 더 가까이 두는 방식으로 시작점을 바꿀 수 있습니다.
손끝이 가장 멀리 있는 키들을 누르기 편한 적절한 위치로 손을 조정한 뒤에 안정적으로 거치하고
그 상태로 손가락을 구부리면 더 가까운 키들은 쉽게 누를 수 있습니다.


소결론

이상으로 제가 만든 키보드의 설계 과정,
그리고 도대체 왜 이렇게 생겼는지;; 소개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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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골격해부학에 근거를 둔 설계인 이상,
약간의 곡선이나 둥글림이 좀 들어갔다고 해서 "인체공학"을 자칭하는 무수한 키보드에 비해
훨씬 더 진짜 인체공학다운 인체공학 키보드 설계라는 생각입니다.

  • 손바닥이 눌려서 수근관 증후군이 발생하는 문제: 세워서 해결
  • 회내자세로 인해 아래팔과 팔꿈치의 근육·힘줄·인대에 무리를 주고 거북목 자세 등 나쁜 자세를 유도하는 문제: 세워서 해결
  • 장시간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팔·어깨·견갑골·목·허리 등등 몸 이곳저곳에 통증이 생기는 문제: 좌우 장치 분리하고 위치와 각도를 본인의 몸에 맞게 설정할 수 있게 해서 해결
  • 척골 편향(손목을 바깥쪽으로 꺾기)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RSI 문제: 모든 키를 손목 꺾기 없이 누를 수 있게 배치해서 해결
  • 검지부터 소지까지 네 손가락은 굴곡·신전(상하운동)에 특화되어 있고 외전·내전(좌우운동)은 불편하고 가동범위도 좁아 오타를 많이 일으키는 문제: 검지부터 소지까지 상하운동만으로 쓸 수 있게 해서 해결
  • Ctrl, Alt, Shift 등 수식자 누르느라 손가락 인대 찢어지고 RSI 위험에 노출되는 문제: 수식자를 엄지로 보내서 해결
    • 엄지 두 개만으로는 Ctrl, Alt, Shift, Meta, Fn 등 많은 수식자를 누르기에 부족한 문제: 십자키(D-pad) 또는 스틱과 비슷한 방향스위치를 엄지에 넣어서 해결


…등등, 근골격해부학의 극한을 추구하여 갈 수 있는 데까지 밀어붙였다고 생각합니다.

아! 내가 인체공학 빌런이다!

다음 편 글에서는 위 설계를 바탕으로
실물을 제작하기 위해 3D프린터와 삽질했던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