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 비중이 부쩍 늘어 랩탑의 작은 화면으로 종일 업무를 보기가 힘들어진 관계로 부득이 32인치 TV하나를 중고로 장만했습니다. 묻지마 중소 브랜드는 아니고 그래도 가전시장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이 좀 있는 업체 제품입니다. 


요새 하도 4K네 8K네 하는 고스펙 기기가 흔하고 75인치 미만은 TV로도 안 치는 분위기라, 평범한 32" FHD TV는 중고가 아주 저렴하네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런 가격으론 720p급밖에 못 샀었는데 이제는 FHD를 쉽게 구합니다. 



그래서 랩탑의 HDMI단자와 TV의 HDMI 단자를 연결하고.. 아차 싶더군요 

글씨가 또렷하게 안 보입니다. 

---


세팅에 들어가서 오버스캔을 끕니다. VGA등록정보와 TV세팅을 통해 스케일링과 관련된 건 모조리 다 끕니다. 

일단 잘린 화면은 없고 픽셀 매칭도 1:1입니다. 해상도는 네이티브입니다. 잘린 픽셀, 스케일링된 픽셀도 없습니다. 

네이티브 패널 해상도와 컨트롤러상의 지원해상도가 서로 다른, 한마디로 골때리는 TV들도 있는데 그런 케이스도 확실히 아닙니다. (사실 이쪽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했는데, 이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뤄보죠.) 


그래도 또렷하게는 안 보입니다. 

---


세팅을 뒤져보니 샤프니스가 있더군요. 다른 외부입력이나 TV모드에는 없고 오로지 HDMI 입력에만 존재하는 세팅입니다. 

이걸 조금 줄여주니까 좀 볼만한 화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너무 줄이면 반대로 글씨가 뿌옇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조절을 해도 일반 모니터처럼 깔끔한 화면은 나오지 않네요 


그제서야 십여년전 한국에서 구입했던 TV겸용 LG 모니터가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은 한국 본가에서 쓰고 있겠죠.) 

이녀석은 DVI, HDMI, D-SUB단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PC를 HDMI로 연결하면 바로 저 샤프니스가 극단적으로 강화된 화면이 나옵니다. 지금 TV와 완전히 똑같은 방식입니다.  DVI, D-SUB는 멀쩡하고요. 

그래서 멀쩡히 HDMI단자가 있는 PC를 굳이 HDMI-DVI케이블로 연결해서 썼었지요. 즉 모니터 입장에선 DVI입력을 받도록요. 그러면 깔끔하게 잘 나왔습니다. 


왜 이런 짓을 해놨나, 당시 곰곰히 생각해본 바로는,

DVD플레이어등의 영상 기기를 연결했을 때에는 그렇게 인위적으로 샤프니스가 강화된 이미지가 훨씬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일종의 눈속임으로 화질이 좋아지는 착각을 주게 만든 거죠. 음향기기로 치면 강제로 음장을 걸어논 겁니다. 그게 당시에 내렸던 결론이었습니다. 다른 단자는 멀쩡하고 HDMI만 그런 처리를 해놓은 걸 보면 알 수 있죠. 좀 더 이해가 쉬울 만한 예를 들어보면, 포토샵 등으로 그림을 리사이징한 뒤 샤픈을 먹여줬을 때 적당히 하면 보기좋지만 과하면 보기가 싫지 않습니까? 딱 그 상황입니다. 


지금 이 TV도 아마 틀림없이 똑같은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해놓았을 겁니다. 


문제는 이 TV에는 DVI단자가 없습니다. (...) HDMI 단자는 셋이나 되는데 죄다 똑같습니다. 

이런 문제를 예상하고 DVI단자가 있는 걸 골랐어야 했는데 설마 요즘 TV들까지 이런 짓을 했을까 싶어서 방심했더니 이런 꼴을 겪네요. 

D-SUB를 연결해보니 이제서야 좀 눈이 편안한 글씨가 나옵니다. 


근데.. D-SUB가 언젯적 기술입니까. 현역 전성기시절엔 누가 아날로그로 극한의 화질을 뽑는가 경쟁을 했지만 지금은 대충 돌아가게만 만들어 놓죠. 그래서 이쪽도 완전히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상술한 샤프니스 문제는 없지만 구식 저가형 아날로그 특유의 잔상이 조금씩 보입니다. D-SUB시절 조금이라도 좋은 2D 화질을 얻어보겠다고 ATi나 S3 다이아몬드 VGA를 찾아다니던 (매트록스는 비싸서 패스) 제게는 영 못마땅한 화질이네요. 


돈아끼려고 모니터대신 TV를 산 주제에 이제와서 고급 DP to DSUB를 장만하는 것도 웃기고, 사실 산다 해도 이제는 2D 화질을 누가 보증해줄 것 같지가 않아요. 대부분 프로젝터 등 구형기기 연결시 잠깐 간이용으로 쓰기 때문에.. 


뭐 워낙 헐값에 산 모니터라 아깝진 않은데, 

- FHD급 32인치 모니터 중고 살 돈이면 얘를 5대 넘게 살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거주하는 곳에서는요. - 


고급 부품을 안 써서, 아니면 원가절감때문에, 아니면 금전적인 한계같은 걸로, 아니면 팀킬방지용으로 생긴 일이 아니라, 

원래 있지도 않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기능을 굳이 일부러 만들어서 박아놨다는 부분이 아쉽네요. 


더욱 난감한 건 이런 건 스펙을 아무리 뒤져봐도 알 도리가 없다는 겁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제 것과 전혀 다른 브랜드의 TV를 쓰면서 이것과 매우 유사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몇몇 보이는데, 의도적으로 그렇게 설계된 거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지 대부분 틀에 박힌 답변만 달려 있습니다. (픽셀매칭 확인해라, 네이티브 해상도 써라, 케이블 갈아라....) 원인은 따로 있고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논 거라서 해결 방법따위 있을리 없으니 이것 저것 다 해본 질문자는 결국 영문도 모르고 울며 겨자먹기로 D-SUB를 사용하는 선택을 하고, 저도 마찬가지네요. 질병의 이름과 원인은 알지만 치료하는 법을 모르니 결론은 똑같은 거죠. 


마치 얼마전 잠깐 사용했던 SKY2300 LED 멤브 텐키리스 키보드의 우측 ALT/CTRL에 한영 한자 키코드가 펌웨어로 박혀있던 게 생각이 납니다. (이러면 원래의 ALT/CTRL 용도로는 때려죽여도 못 씁니다.) 둘 다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는 가는데, 끌 수 있게만 만들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건 그냥 돈을 아끼려는 사람들이 겪는 세금 같은 것이라고 봐야겠죠. 그거는 압니다. 이런 게 제가 취미를 즐기는 방식이기도 하고.. 


이상 별 의미 없는 잡담이었습니다. 


회사에서 DP 또는 HDMI to VGA 변환기를 죄다 긁어와서 하나씩 테스트해봐야 되겠네요. 

개중에 화질이 좀 볼만한 게 있길 바라며.. 


ps. UHD급 TV에는 이런 일을 해놓은 예가 없는 걸로 보입니다. 사무실에서 회의용으로도 많이 사는 제품들이니 일단 엄두도 못 내겠고, 해상도를 감안하면 그런 눈속임 처리를 한들 의미도 없을 테니까요. 나중에 언젠가 UHD TV가 지금 이 제품처럼 x값이 되면 그 땐 골탕먹는 일이 없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