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 Model M에 안주하고 평온하게 지내던 내가 접한 키보드들 가운데, 개안(開眼)의 통렬한 감동을 전해주는 것들이 두엇 있었다.

1) Model F 5170은, 같은 버클링-스프링 방식의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Model M이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상냥한 감촉으로 내게 놀라움을 전해줬다. 다른 분이 쓰셨던 표현이지만, Model M의 남성적인 인상은, 그것이 아무리 부드럽다 해도, Model F가 품은 여성적인 속성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혹시 IBM Model M은 Masculine, Model F는 Feminine의 머릿글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애플 제품이라면 그런 추측이 맞을 수도 있어도 IBM은 그런 명명법을 쓸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5150 은 다시 한차례, 가장 온화한 5170이라도 미치지 못하는, 장벽을 살짝 넘은 감촉이다. 나는 분명 80년 후반, XT 컴퓨터에서 도는 보석글을 쓰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때는 비교할 대상이 없어서였을까, 전혀 그 감촉에 대한 느낌이 남아있지 않다. 시간이 지나서 다시 손에 닿은 5150은 느닷없이 오래전 전산실에서 더듬거리며 리포트를 입력하던 옛추억을 몰아치듯이 전해줬다. 레트로 유행이 한창인 가운데 그 원인이 무얼까 생각해 본적이 있었다. 5150은 단 한번의 접촉으로 내게 답을 준 셈이다. 세상에, 시각과 청각이라면 모를까, 손끝의 촉각으로도 그 잊고 있던 옛 시절을 되돌이킬 수 있다니. 감동이 아닐수 없다.

M과 F. 아마도 러버돔-정전용량의 차이라기 보다는 스프링의 차이일것 같다. M 들도 연식과 사용정도에 따라 키감이 천차만별이다. M과 F는 그것을 뛰어넘은 스프림의 질적 차이가 있는것이 틀림없다. 능력이 된다면 스프링의 재질이 어떻게 다른지 한번 조사해보고 싶은 심정이다. 빠샤님의 컨버터덕에 5150이 2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당시 물려 돌아가던 CPU MIPS의 수십배를 뛰어넘는 첨단기기에서도 가쁜 소리를 내며 철컥철컥 동작한다. 다시 한번, 감동이 아닐수 없다.

2) 와이즈(WYSE) 키보드도 그 놀라운 키보드 가운데 하나다.

와이즈 키보드를 쳐보면서 전율했던 주요한 이유는 리니어 방식에는 전혀 매력도 흥미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을 손을 대보기도 전에 굳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델 M의 클릭이 진정한 기계식 키보드의 반응이라고 흔들림없이 믿어온 짧지 않은 시간 때문일까. 백번 양보하여 넌클릭에까지는 손을 얹어도, 택타일감이 전무한 리니어 타입의 감촉이 어떨지는 눌러보지 않아도 익히 손끝에 전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파커 볼펜의 뒷꼭지를 누르면서 리니어가 바로 이럴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짐작이 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수소문끝에 WYSE 900866-01 을 한대 장만해 PC에 연결한후 나는 내 선입견이 모두 틀렸다는것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스위치가 키보드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선탠없는 깨끗한 바디의 은은한 흰색과 회색, 그리고 살짝 들어간 노란색 레이블의 아름다운 조화와 모델 M을 방불케 하는 육중한 무게를 하고서도 모델 M에 비하면 얇고 날렵하여 마치 책상에 착 달라붙는 듯한 모양새를 한 와이즈는 내 선호/기호를 떠나 이미 타이핑 하는 이를 압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노트패드를 열어놓고 늘 그렇듯 이런 저런 문장을 입력해보았다. 오, 눌림을 거부하는 듯한 그 강력한 반발감과, 그럼에도 모델 M으로 다져진 손가락으로 끝까지 밀어붙였을때 그만 굴복한다는 듯, 하지만 더이상 물러설곳은 없다는 듯 손끝에 짜릿하게 전해지는 철판과의 접촉은,체리 블랙과 스틸 플레이트가 견고하고 잘 다듬어진 바디속에 담겨져 탄생된, 키보드가 가질수 있는 완성도의 정점이 아니었을까 한다.

섣부른 자랑으로 여기는 분들이 계실것 같아 덧붙이자면,  위의 키보드들 가운데 와이즈와 5170은 이미 내 손을 떠나 다른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윗 글은 순전히 머릿속에 남은 기억만으로 쓴 것이다. 긴 여운을 남기는 명기와의 만남은 그것이 수천불을 넘어가는 고가의 제품이 아니라 해도, 또 내가 그다지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이렇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내 손을 떠났다는데 아쉬움을 품게 만든다.

다음으로 또 내게 찾아와 전율과 감동을 전해줄 키보드는 무엇일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