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년 전이다. 내가 갓 방구석 기타리스트가 된지 얼마 안 돼서 낙원에 올라가 살 때다. 낙원에 왔다가는 길에, 피크를 한 봉지 사기 위해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낙원 바가지 상가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피크를 깎아서 파는 노인이 있었다.

피크를 한 봉지 사 가지고 가려고 깎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를 것 같았다.

"얼마 알아보고 왔소?"
"한 장에 800원 아닙니까?"
"한 장에 3천원이오"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다른 곳은 800원이던데..." 했더니,
"피크 한 장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싸가지 없는 노인이었다.

더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플라스틱을 뜨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티어드롭으로 깎는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깎하고 저리 깎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쪽자처럼 찍으면 다 될 건데, 자꾸만 헛칼질만 뜨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싸달라고 해도 통 못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TV에서 "풀 하우스"를 방영할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로고 안 새기고 통기타형으로 깎아줘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깎을 만큼 깎아야 피킹이 되지, 화투장에 티어드롭으로 깎는다고 얼터 피킹이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다는 말이오? 노인장, 낙팔이시구먼, 돈다준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방영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손에서 뽀록나서 안되고 쉽게 닳는 다니까. 피크란 제대로 깎야지, 깎다가 팔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피크위에 커스텀으로 금장 로고를 씌운다고 기계에 돌려놓고 야동을 보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흥분해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피크를 들고 이리저리 스크래치도 해보고 돌려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피크다.

방영 시간을 놓치고 녹화본을 봐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낙팔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낙원 상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낙팔이다워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낙팔이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집에 와서 피크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이름모를 국산 싸구려 피크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깎으면 얼마 못 가서 피크끝이 갈라지거나 닳고 부러지기 쉽고, 무리하게 빨리 깎으면 그립감이 좋지 않다는것이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던롭 피크는 고급 폴리에틸렌 에 티어드롭 방식 펀치를 사용해 좀체로 뽀록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 이미테이션 피크는 한번 닳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피크로고를 새길때 이미지를 미리 뜬 뒤에 이미지가 제대로 떠졌는지 침한번 발라보고 다시 깎는다. 물론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판박이 방식의 스티카로 찍어내듯이 만든다. 금방 만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몇 시간씩 걸려 가며 깎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어느 낙팔이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정품 피크를 팔 리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피크를 사는는 그 순간만은 오직 잘 돌아가는 피크를 산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음악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커스텀 피크를 만들어 냈다.

이 피크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방구석 기타리스트에게 낙팔이 소리를 듣는 세상에서, 어떻게 질좋은 피크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자작곡 샘플이라도 들려주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낙원가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단속이 떠서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낙원상가을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공에 무너질 듯한 낙원상가로 낙팔이가 잠을 자고 있었다. 아, 그때 그 노인이 저 낙팔이를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피크를 깎다가 우연히 낙원상가의 마스코트인 낙팔이를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그랫쿠나 무서분 바카지를 쓴커쿠나!" 초난강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집에 들어갔더니 동생이 피크를사러가기 귀찮아서 집에있던 플라스틱 책받침으로 피크를 깎고 있었다. 전에 손톱을 길러서 피크대신 사용하던 생각이 난다.

깁슨 이미테이션 피크도 구경한지 참 오래다. 요새는 중고장터의 싸게 판다는 사기 메일도 날라 오지 않는다. "하이엔드급 기타"이니, "펜더 mbs" 처럼 악기병을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년 전 피크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