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자판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3벌식을 사용하지는 않으면서 막연히 3벌식이 2벌식보다 우수한 방식이려니 생각하실 줄로 압니다. 저도 3벌식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다가 이번에 휴학을 하면서 자유시간이 많아져 시도해 봤습니다. 올해 6월 쯤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니까 스스로 3벌식 사용자라고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벌식 사용자로서 제가 생각하기에 3벌식은 썩 훌륭한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3벌식의 가장 큰 단점은 키가 많다는 것입니다. 무려 4줄이지요. 제 사용 기간에도 불구하고 사실 가장 위에 있는 키들을 누르는 것은 결코 편한 일이 아닙니다. 특히 초성 ㅋ이 종성 ㅆ등의 키들이 4번째 줄 약지와 새끼 손가락에 배정되어 있는데 상당히 불편합니다. 빠르고 편한 타이핑을 위해 키의 수를 줄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3벌식은 이점에서 절대 마이너스 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2벌식은 자음 모음으로 나뉘어져 있는 반면에 세벌식은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세벌식 커뮤니티에 가보면 복자음은 초성의 경우 두번을 치기를, 종성의 경우 시프트키를 누르고 한번 치기를 권하고 있는데 이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복 종성의 경우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배치로 되어 있어서 저는 아직도 외우지 못했고 세벌식 커뮤니티에 가보면 외우지 못한 사람이 꽤 많은 것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커뮤니티 멤버들은 그것을 세벌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수행 부족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세벌식을 도구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분들이 하나같이 강조하시는 도깨비 문자 현상이 제가 보긴 별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도깨비 문자 현상이란 초성과 종성을 같은 자음으로 묶어 버리는 두벌식 자판에서 사용자가 친 초성 자음을 잠시 종성으로 판단하고 의도하지 않은 글자를 잠시 보여주는 현상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모자'를 칠 때 잠시 '몾'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것이지요. 두벌식 사용자분들 중에 한번이라도 이게 정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 보신 분 계신가요? ㄱ을 초성과 종성으로 나누어 자판에 배치해서 쳐야할 키 수를 늘리는 것 보다 ㄱ이라는 자음으로 묶어서 초성 종성 여부를 소프트웨어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건 저뿐인가요?

제가 보긴 방금 예로 든 도깨비 문자 현상 외에도 세벌식 애호가 들이 주장하는 것들 중 상당 수가 별로 근거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한글의 제창 원리가 어쩌네, 군사 정권이 어쩌네 하는 감정적인 발언이 세벌식 사용자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이는 것도 근거가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닌지 의심이 갑니다. 실제로 세벌식은 기계식 타자기에서 쓰이던 방식입니다.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눈 것도 한글의 제창 원리를 따르려고 했다기 보다는 기계식 타자기가 자음을 초성 또는 종성으로 판단하지 못해서 그랬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ㅜ와 ㅗ가 두개씩 배치 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물론 그렇다고 2벌식이 더 뛰어나다던지 하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단지 3벌식이 결코 2벌식보다 더 과학적이고 편한 방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초성과 종성을 소프트웨어 적으로 판단함으로써 키의 수를 줄인 2벌식이 더 과학적이지 않을까요? 저도 그렇지만 3벌식으로 바꾸시고 타자속도가 더 떨어진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타이핑의 리듬감? 뭐 그런 말을 하시는 분도 많은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벌식이 뜻있는 학자께서 좋은 의도로 많은 연구 끝에 만드신 자판이라는 건 잘 압니다. 실제로 자주 쓰는 키는 치기 편한 손가락에 할당 하려는 노력이나 숫자를 시프트로 치게 한 것이나 우리나라에서 쓰는 특수기호를 위주로 배치하는 등은 두벌식보다 더 애쓴 흔적이 보입니다. 하지만 플랫폼의 변화(기계식 타자기 -> 컴퓨터)에 거의 적응하지 않은 낡은 방식이고 일부 세벌식 유저들의 과장된 찬사는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ps 다른 세벌식 유저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시간이 허락해준다면 더 나은 자판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요.
* kant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11-18 1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