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까지 계속 콜라만 마셨었는데요, 많은 분들이 커피가 그렇게 좋다고 하셔서 유명한 동호회 가서 추천을 받아보고 큰맘먹고 비싼 돈 들여 한 번 구매해서 마셔봤는데.....우왁, 이건 쓰기만 하고 정말 좋다는 것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큰 돈 들인 것도 있고 해서 한두번 더 마셔보기도 했는데 도저히 적응이 안되는 것 있죠T_T. 그래서 말인데, 혹시 콜라맛 나는 커피 좀 추천해주시면 안될까요?"


위와 같은 질문을 보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저와 생각이 같으시겠지요?


제가 묻고 답하고 게시판 또는 자유게시판에서 비교적 자주 보게 되는 글 중 하나가 "DT-35 와 비슷한 키감의 기계식 키보드를 추천해달라"는 글입니다. 제가 댓글을 단 것만 대여섯 번이 되니 한달에 한두번씩은 꼭 보는 글이라고 해도 될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커피가 많습니다. 사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저는 커피전문점의 메뉴조차도 해석을 해야 할 만큼인데 애호가 분들의 예를 보면 그 수많은 원두의 종류, 복잡하기만 한 로스팅 조건 등등을 따져가며 커피를 즐기곤 하시지요. 그만큼 커피의 세계는 넓다는 반증이기도 할텐데, 그 길은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 길의 과정과 그 끝에 어떤 대단한 것이 있기에 그렇게 열심들이실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저는 커피에 대해 별로 알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마셔본 바로 커피에 대해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또 이제사 커피를 알게 된다고 해도 제가 그 과정이나 결과를 통해 크게 행복해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 커피는 제게는 그저 "맛이 쓴 음료" 이상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지금 제가 좋아하는 콜라 한 잔도 제게는 충분한 여흥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커피는 개인의 기호일 뿐 어떤 가치는 아닙니다.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닌, 그저 즐기는 수단일 뿐이죠. 그 작은 차이를 느끼는 즐거움을 위해 애호가 여러분들은 큰 댓가를 지불하고는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키보드도 마찬가지입니다. 키보드는 PC 에 자신의 의지를 전달할 입력수단일 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닙니다. 기계식 키보드에 환상을 가질 필요도, 그런 환상을 심어줄 필요도 없습니다. 항상 강조하는 말이지만 몇십만원을 호가하는 키보드가 어떤 사람에게는 5 천원짜리 키보드만도 못 할 수 있는 것이 키보드의 세계입니다. 마치 한 잔에 몇만원, 몇십만원씩 하는 최고급 원두커피가 어떤 사람에게는 몇백원짜리 캔커피만도 못 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저는 DT-35 가 좋은 키보드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DT-35 는 그저 많이 팔린 키보드일 뿐이지요. 역사를 따져볼까요? 1990 년대 후반 삼성전기가 키보드사업에 뛰어들고 무기로 삼은 것은 내구성과 사후서비스입니다. 상가에서는 물건 구하기 쉽고 뒷탈이 없으면 최고로 치는 탓에 이런 조건에 적합한 DT-35 를 많이 공급하게 되고 때마침 스타크래프트가 일대 유행이 되며 경쟁사의 제품보다 내구성이 우수했던 이 키보드가 표준처럼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수의 프로게이머들이 사용한 탓에 게임방송이나 대전을 많이 관전한 팬들이 DT-35 를 대단한 기기로 만들게 된 것이고요.


그럼 게임에 더 좋다는 기계식 키보드는 뭐냐 물으실 분들도 계실텐데, 1990 년대 후반은 기계식 키보드의 암흑기였다고 생각해도 될 만큼 물건이 없었습니다. 금성알프스와 마벨의 명맥을 잇고 있던 아론은 유사 알프스 스위치의 형편없는 내구성으로 게임에는 더더욱 젬병이었고 세진의 기계식 키보드가 있기는 했지만 가격이 너무 높고 구하기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IMF 구제금융까지 받을 정도의 경제위기는 외산 키보드를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로 만들었지요. 더욱이 상대적으로 낮은 연령층이 많은 게임 이용자층은 80년대가 전성기였던 기계식 키보드를 아예 구경조차 못 해본, 기계식 키보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많이 팔린 것이 덕목이라면 덕목인 것 처럼, 많이 팔려서 여러 사람이 사용하게 된 기기라면 그것으로부터 표준의 자격을 갖출 수도 있는 것입니다. DT-35 는 적어도 그런 측면에서는 결국 2000 년대 초부터 표준이 되었고 그렇게 많이 팔린 물건에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지게 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콜라에 만족하는 사람이 콜라 맛 나는 커피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것 처럼, DT-35 가 좋다면 그냥 DT-35 를 계속 쓰면 되는 것입니다. 몇 번을 강조하지만 DT-35 의 느낌이 나는 기계식 키보드를 찾는 것은 결코 권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큰 장점이며 구하기 쉽고 저렴하다는 것 역시 크나큰 장점입니다. DT-35 의 느낌과 비슷한 기계식 키보드를 찾는 것은 콜라맛 커피를 찾기 위해 노력과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것 만큼 바보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키보드는 추구해야 할 가치도 아니고 반드시 거쳐가야 할 관문도 아닙니다. 키보드는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자고 만들어낸 도구에 그 사용자가 노예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키보드를 보다 더 깊게 파 들어간다면 그건 키보드를 "어른의 장난감" 으로 삼은 취미의 영역으로 그 부분은 정말 매니악한 케이스가 될 터이니 모든 사람들이 그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기계식 키보드에 처음 관심을 갖는 회원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은 "익숙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DT-35 뿐 아니라 그 밖의 어떤 기기라도 익숙한 키보드와 느낌이 비슷한 기계식 키보드를 찾으시기 전에 그 키보드에 만족하신다면 그냥 쓰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그래도 기계식이 꼭 써 보고 싶다 하시면 그 때는 반드시 직접 써 보고 고르십시오. 괜히 콜라만 마시던 이가 남들이 좋다 하더라 하여 커피 맛을 보았을 때 나오는 반응은 '이 쓴 걸 왜 먹어' 라는 반응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커피와 키보드의 비유는 안 맞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기계식 키보드는 써 보는 순간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익숙하다는 점과 앞으로 들여야 할 노력, 시간, 비용을 생각한다면 기계식으로 가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부디 초보회원님들의 선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