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크루즈님이 방출하신 unicomp 101을 가지고 왔습니다.
사실 가장 써보고 싶었던 것은 확장1이나 리얼포스였지만, 확장1은 도무지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번번히 놓쳐버리고 리얼포스는 가격이 장난이 아니라서 보류했습니다.

크루즈님께서 마침 키보드를 정리하시면서 이걸 내놓으셨는데, 딱 보아하니 직접 신품을 미국에서 공수하신 것 같았고 가격도 싸게 올라와서 냉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살림살이를 좀 정리했더니 실탄이 있었다는 것도 한 몫 했지요. 있는 실탄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버클링 방식은 옛날에 내가 써본 키보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 94년도쯤이었을까요, XT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는 것은 뭐 당시 유행했던 황금도끼(..) 및 아케이드 게임이었는데, 당시 시스템이 시스템이니 만큼, 모니터는 흑백에다가 황금도끼에서 마법 한번 쓰러면 디스켓을 바꿔넣어야 하는 실정이었지만, 나름대로는 즐거운 어린시절이었습니다.
시스템 메이커는 갑을컴퓨터라고 하는 곳이었는데, 혹시 아시는 분이 있을까요. 본체도 모니터도 키보드에도 <甲乙>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때 키보드가 버클링이었습니다.

어제 유니콤프를 받아서 써보니 역시 예감이 맞았습니다. 예전의 바로 그 키보드였습니다. 갑을이라는 메이커가 어째서 ibm의 키보드를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예전의 향수가 살아나더군요.

이후에 한 10년간 컴퓨터는 펜티엄, 그후에 펜티엄3, 지금의 컴펙 프리자리오 1500(펜티엄4)로 바뀌어 왔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그때 사용했던 그 묵직하고 '퉁퉁'소리를 내던 그것을 떠올려 본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게 좋은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나 봅니다.

그리고 대망의 2004년 1월(아마도..), 우연히 키보드가 고장이 났습니다. 회로에 문제가 생겼는지 본체에서 계속 삑삑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물건을 살때 저가의 물건은 사지 않습니다. 저가의 물건은 당장 살 때는 싸고 돈이 들지 않으니까 부담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품질도 내구성도 없는 물건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런 물건이라면 처음 쓸때도 별로 좋지 않을 뿐더러 더럭 금방 고장이라도 나면 기분도 좋지 않고 돈도 이중으로 들어갑니다. 이래저래 좋지 않지요.

그래서 저는 물건을 살때, '중급이상 상급이하'의 것을 선호합니다.
어떤 물건이고 상급의 것은 가격도 만만치 않을 뿐더러 일반적으로 쓰기에 지나치게 좋은 물건인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아랫단계의 것, 중상정도의 것을 쓰면 저의 기준에 딱 맞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저의 기준, 즉 '중상급의 키보드'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에서 '키보드'란 주제어로 검색을 했습니다.
그리고 등장한 것은 iomania 쇼핑몰이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뭔 물건이 좋은 걸까?'라는 호기심에 kbdmania, zoooz의 게시판을 뒤졌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체리 클릭'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의 기준에 맞지 않은 물건입니다. 왜냐? 최상급의 기종이니까. 가격도 장난이 아니니까. 그런데도 질러버리고 말았습니다. 왜냐? 그 수많은 아름다운 뽐뿌와 찬미의 글들, 게다가 친절하게도 이런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구매'버튼..

한달 아르바이트비가 몽땅 날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忍苦의 시간.. 저는 아날로그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카메라도 수동을 쓰고, 책도 서점으로 가서 삽니다. 수동카메라의 셔터버튼소리, 서점에서의 아이쇼핑의 즐거움은 디지털카메라의 편리함과 인터넷 서점의 할인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인터넷 쇼핑몰 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았죠. 그런데 거기서 한번 질러보니 배송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죽음이더군요.

그리고 도착.
어머니 : "거 얼마냐?'
나 : "...비~이~밀.."
어머니 : "얼마냐니까?"
나 : "...밝힐 수 없음...묵비권 행사.."
어머니 : "자~알~한다~"

오늘까지 어머니는 체리 클릭의 가격을 모르십니다. 컴맹이라서. 내가 키보드에 미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후부터는 학교로 배송을 받아서.
아시게 된다면 정말 '키보드의 진정한 힘-리얼포스'를 경험하게 되겠지요.(비록 리얼포스는 없지만 유니콤프로..)

이리하여 체리클릭은 저의 두번째 기계식 키보드가 되었습니다. 모르고 사용했던 어린 시절을 빼면 진정한 의미로 첫번째라 할 수 있겠지요.
체리 클릭은 정말 '신세계'였습니다.(백화점이 아닙니다)
가볍게 짤각이는 소리, 경쾌한 키감, 기분좋은 키캡의 요철.
그때 워드 검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말 오타나지 않고 깨끗하게 쳐질 때의 그 리듬과 그 소리는 정말 사람으로 하여금 쾌감의 극한으로 몰고갑니다.
정말 그때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가끔 게시판에 체리 클릭을 좋지않게 평하는 글들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흥! 웃기시네~~이게 최고야~~'하고 비웃으며 넘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좋았다가 싫어지고, 싫었다가 좋아지는 것이 간사한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던가요. 어느 순간 그 째깍이는 소리가 짜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늦은 밤이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아주 그냥 승질이 나더군요.
어찌보면 클릭음을 내는 방식의 한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었습니다.
그래서 넌클릭 방식의 키보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찾는 물건은 애플확장시리즈. 마침 아크엔젤님의 뽐뿌가 등장한 무렵이었습니다.
우째우째해서 확장2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사당역에서 직거래를 했는데, 사고팔고에서 imate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뻔히 수중에 있는 물건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라는 자기 암시와 최면과 분노에 빠져 일요일에는 대부분 문을 닫는 용산으로 갔습니다. 마침 또 사당과 용산은 지하철 4호선이죠.
여기서 천신만고 끝에 imate를 구했습니다만 무려 7만원(!)에 가까운 가격이었습니다. 웬만한 모델M 가격이지요. 그런대도 그때는 흥분과 분노상태라 비싼줄도 모르고 냉큼 집어왔습니다.
그런대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가져온 확장2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확장2의 개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나름대로 한번 손을 보겠다고 봤다가, 괜한 것 하나를 더이상 손쓸 수도 없는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교훈을 얻었다면, 키보드는 섬세한 물건이니 함부로 손대면 안되겠구나~입니다. 자유게시판과 사용기에서 제 이름으로 검색을 하시면 그 당시 저의 황당 개조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확장 한대를 버리고 확장2 리니어라는 있지도 않은 초~레어 아이템을 만들어도 보면서 키보드라는 것의 속성과 그걸 만드는 사람들은 정말 섬세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개조의 실패로 완전 의기소침 상태였던 저에게 한줄기 희망이 되어준신 분은 바로 digipen님 이었습니다. 처음에 올리셨던 개조 확장2들은 구하지 못했지만 최후의 한대를 운좋게 제가 가져올 수 있었거든요. 게다가 마침 실탄 있을 때에 그 전설 중의 전설이라는 체리 1800갈색축을, 그것도 새것을 내놓으셔서 가격은 비록 싸지 않았지만(갈색축에다 새것인 것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저렴하지만, 절대적인 가격을 생각할 때지요) 망설임 없이 구매를 했고, 결국 트레이드 불가 1호 선수가 되었습니다. 체리 클릭은 결국 군침을 흘리던 선배에게 발렌타인 17년 산으로 트레이드 당했지요.

이후로 갈색축 11800, 체리 빨간불 리니어, 유니콤프, 이제 곧 수중에 들어올 체리미니.

이제 만져보고 싶은 것은 거진 다 만져 갑니다. 체리 백색축이 남았지만 그다지 끌리는 아이템이 아니고, 알프스 클릭도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고, 리얼포스나 해피해킹프로는 실탄을 조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안되고, 진정 만지고 싶은 것은 확장1인데..
번번히 장터에서 놓치는군요. 오늘 zoooz에도 하나 있었는데 놓치고 말았네요.

그래도 이제는 키보드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3시간 정도는 장터에 뭐가 올라왔다 들여다보고 본 사용기와 리뷰 또 보고, 좋은 것 올라왔는데도, 실탄이 없어서 못사고, 한끗 차이로 놓치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키보드에 취미 붙이고 워드연습은 가장 주요한 일과가 되어버렸지요.
게다가 자꾸 하나만 편애하면 다른 애들이 질투해서 종종 바꿔가면서 해줘야 되고요..
그런데 이제는 얼추 만져봤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장터도 훨씬 편한 마음으로 보게되고 다른 일에 조금씩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아~정말 한 6개월간 질풍노도의 방황이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광적인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본업에 충실하게 공부도 좀 하고(사실 밀린 보고서가 산더미..), 앞으로 원대한 '우매한 중생구제 프로젝트'를 한번 구상해 봐야겠습니다.

p.s
-to 나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니들도 한번 빠져봐라. 옆에서 염장 질러주마.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