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006년의 늦은 가을 무렵 기계식 키보드를 처음 접했습니다. 입문품은 아론(aron) 키보드라고 약 3만원 후반대의 저가형 기계식 키보드였는데 싼 맛에 샀지만 쓰다 보니 계속 망가졌습니다(물건을 조심스럽게 쓰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일한 키보드를 3개나 부숴먹고 2008년 8월, 필코 마제스터치 청축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아론 키보드를 쓸 때와 사용패턴이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제스터치는 망가지지 않았고 그후 약 41개월 동안 아주 만족하며 사용했습니다(군대에 있던 24개월을 제외한 사용기간). 그리고 2014년 3월, 마제스터치2 텐키리스 청축을 구입한 후 텐키리스의 세련됨과 변하지 않은 청축의 발랄한 키감에 또한번 만족하면서 약 6개월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던 중 용산에 갈 일이 있어 여러 키보드들이 진열되어 있는 매장에서 한 키보드를 타건해봤는데 그때 느낀 그 부드러운 감각이란... 살짝 놀라서 제품명을 확인해보니 '리얼포스 저소음' 모델. 그후 약 3주간 리얼포스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었고 결국엔 토프레 리얼포스 87 10주년 균등 55g 한글판을 구입했습니다. 구입 전에 제가 반했던 저소음 차등 모델 말고도 균등 모델도 타건해봤는데 조금 무거웠지만 리얼포스 특유의 감각은 살아있었고 왠지 '저소음', 그리고 '차등'이란 옵션이 붙어있는 모델은 standard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서 일반 균등 모델을 구입했습니다.

     36만원이라는 저가형 사무용 pc 한 대 가격과 맞먹는,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구입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격의 키보드. 동일한 가격대의 '해피해킹'과 함께 2008년의 저는 가격이 너무 높아 포기했었던 기성품의 끝판왕. 리얼포스를 산 후 한동안은 '끝까지 왔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웠는데 사용하면 할수록 '이 키보드가 이만한 가격에 맞는 가치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그리고 민감하지 않은 사람은 일반 멤브레인 키보드와 구별할 수 없는 '고급 멤브레인'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게 리얼포스를 처음 만졌을 때는 놀랍도록 부드러운 키감에 감탄했었는데 이제 좀 익숙해지니 무덤덤해졌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매장에서 저소음 차등 버전을 타건해봤지만 처음 그 느낌을 느낄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운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리얼포스처럼 깔끔한 느낌의 키보드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부드럽고 깔끔하게, 끝까지 내려가는 키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리얼포스를 구입한 첫날부터 리얼포스와 마제스터치 청축은 약 2배에 가까운 가격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이 특별히 낫다고 할 수 없는 키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약 이주일이 지난 지금, 그 생각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키보드 매니아에서는 리얼포스를 '구름 위를 걷는 키감', '키보드계의 샤넬'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키감을 평하기 전에 두세달은 시간을 두고 사용해보라고 합니다. 그분들의 말처럼 몇개월 후에도 제가 리얼포스를 산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