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년을 함께한 키보드의 사용기입니다.

조만간 키캡을 점진적으로 교체하고 하우징을 도색할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 전에 사진과 기록을
남겨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키를 두드립니다.

제 기억이 요즘들어 급격히 떨어지지만, 이 키보드는 1988년 전후에 선물로 받았습니다. 선물한 이는 "서*오" 라는 분으로 한때 키보드매니아에도 있는 박순백님의 치코니 키보드 이야기에 이름이 나오는 김*국,오*철 등과 함께 친분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 세 사람등이 한동안 키보드에 열광한 적이 있는데, 특히 제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의 서*오님이 저의 맥없는 dec 멤브레인 키보드를 보고 구입한지 1주일도 안된 이 키보드를 제게 선물했습니다. 그후 제 집에서 학교 숙제할 때, imf 당시 대전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회사지급 키보드가 마음에 안들어서 대신 가져다가 사용하였고, 지금은 호주 시드니에서 일하게 되어 집에서 일할 때 사용합니다. 현재 직장에서는 몇몇 동료들이 색이 바래서 암을 유발할 수 있다고 믿는 관계로 그들의 건강 유지를 위해 집에서 혼자 일할 때만 사용합니다(이것이 도색하고 키캡을 교환하려는 주된 이유입니다. 동료들의 건강!)

지난 20여년 동안 컴퓨터는 계속 바뀌었어도 키보드만은 98% 이상 이 녀석만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키보드를 사용할 때는 눈으로 오타가 난 것을 발견한다고 한다면, 이 키보드는 누르는 순간 손끝에서 이미 오타 여부를 알수가 있는 그런 느낌의 키보드입니다.
회사에서는 경품으로 받은 아론 키보드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hkb-101에 익숙한 제게는 약간 불편한 키보드 입니다. 동료중 하나는 ibm-m 인수한 회사제품(이름은 잊었네요)이 있는데, 그것도 제게는 불편하더군요. 그 동료는 ibm-m 팬으로 선물로 받은 해피해킹 라이트 키감이 안좋다고 제게 주었습니다(정말로 키감 안좋더군요. 크기 때문에 밖에서 랩탑용으로는 좋을 듯 합니다).

이 키보드의 스위치는 체리 청축입니다만, 20년 세월동안 사용한 키보드라서 현재의 청축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얼마전 동료의 das keyboard 체리 청축과 비교해 보았는데, 제 키보드의 눌림이 약간 더 경쾌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약간 과장하고 긍정적으로 이야기해서 에이징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얼마전에는 세월의 탓인지 숫자키 '2'가 작동이 잘 안되더군요. 결국 스크롤 록의 스위치와 교체했더니 둘다 잘 작동합니다 - 아마 세월 탓에 남땜이 허술해 졌었나 봅니다. 체리 스위치가 몇번의 키스트록을 보장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지금쯤이면 이제껏 사용했던 날들보다 사용할 수 있는 남은 날들이 훨씬 적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뭏든 지난 20여년간 규칙적으로 키보드를 청소해 준 탓에 아직도 쓸만하고, 점점 더 제 손가락에 맞게 진화해 가는 제 키보드. 이런 키보드는 다시는 구할 수 없을 겁니다. 다른 키보드를 구입하면 키보드가 제게 익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 키보드에 익숙해져야 겠죠. 제가 익숙한 것은 키감뿐 아니라 큰 ㄴ자 구식 엔터 키, 작은 백스페이스, 윈키리스 등으로, 이제는 그런 키보드를 구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죠.

이 키보드의 자체적인 문제점은 현재를 기준으로 키보드의 커넥터가 ps/2 타입이라는 점, 커넥터 선의 길이가 짧다는 점, 안에 보강판이 있어서 무겁다는 점 이외에는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제 것은 키보드 높이 조절용 판이 그만 부러져서 못쓰게 되었습니다만, 얼마전 작업환경 조사시 제 키보드 자세를 교정받았는데, 높이 조정을 하지 말고 납짝하게 해서 사용하라고 하더군요(손목 받침도 없이 마치 피아노 연주하는 자세로 작업하랍니다). usb 어댑터를 이용하면 그나마 약간 문제점이 해결되므로, 큰 문제점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사용상의 문제점은 바로 소음입니다. 저야 익숙해져서 전혀 소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밤에 타이핑 하면 가끔씩 아이가 잠을 뒤척이거나 깨고, 와이프가 야밤에 뭐하는 거냐고 판잔을 주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와이프가 뭐 어쩌겠습니까? 밥벌이 하려면 열심히 두드려야 하는데요! 이제는 아이가 둘이고 가끔 밤에도 두들기지만 아무도 뒤척이거나 뭐라 하는 사람은 최소한 가족중에는 없답니다. 회사에서는 경리보는 직원들이 가까이 있는데, 뭐이리 시끄러운 키보드가 다 있냐고 하더군요. 다행히 저희 부서는 개발자 손가락 파워가 좀 세고, 네명의 개발자중 세명이 기계식 키보드 소유자라 눈 하나 깜짝안하고 엔터키 냅다 후려버립니다.
생각나는 에피소드 또 하나. 한번은 회사에서 쓰고 있는데, 동료(외국인이죠)가 와서 키보드 왜이리 낡았냐고 도대체 언제 것이냐고 묻더군요. 20년쯤 전 것이라고 하니, 하마터면 자기보다도 오래된 키보드 볼뻔 했다고 놀리고 가더군요. 아뭏든 이래저래 시선받는 키보드입니다.

left.jpg
한독 마크가 보입니다

middle-cables.jpg
usb 어댑터에 연결해서 씁니다

right.jpg
led에 'On Line'이 있습니다.

left-back.jpg
XT/AT 전환 스위치가 있습니다.

back-label.jpg
시리얼 번호등이 있습니다. 도색하는 것을 알아보려고 한번 떼어내서 약간 떴습니다.

right-back.jpg
왼편과 마찬가지로 오른편 높이 조절판이 없습니다.

switches.jpg
체리 청축입니다.

left-whole.jpg
옆에서 본 모습입니다.

사람마다 주관이 다르고 느낌이라는 것 자체도 다양하지만, 함께한 기간이 마누라와 함께 한 시간보다 훨씬 많은 제 키보드, 동일한 다른 키보드들보다 제 보살핌을 잘받고 제게 잘 익은,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이 키보드에 저는 10점 만점에 9.9를 부여합니다(반올림해서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