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iconGraphics 801 Saver



## 살아간다는 것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는 것.
그 이야기 안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자신이며 선택과 결정, 결과에 대한 기쁨과 후회 또한 오롯이 그 자신의 몫인 것.
그것은 살아간다는 무게감이 주는 힘겨움이자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련함과 애틋함으로 남아서는 기억이라는 삶의 선물을 늘 받아든다는 것.

그렇지만 산 속 외딴집에서 보내는 때론 길고, 때론 짧은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제게는 살아간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지금은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살아있기에 생을 영위해 나간다는 생물론적 숙명론에 더 가까이 서 있는 듯 하네요.

도시에 남겨두고 온 저의 이야기들을 끝마치지 못했기에 지금의 시간은 늘 불안하기만 합니다. 큰 애착으로 만져오던 키보드들에 대한 관심도 분명 예전만은 못한 거 같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속에서 몇 개의 키보드를 만들었습니다.
두 대의 wyse는 지난 봄 부터 키보드를 만들어 드리고 싶던 회원분들께 드릴려고 재료를 구해두기만 하고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산 속에서 일하는 사이 사이에 어설프게 만들게 되어서 전달해 드렸구요.
지금은 다른 한 대의 키보드를 드릴려고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가장 중요한 하우징 제작이 남아있는데 이 글을 올릴 때쯤이면 전달해 드리게 되겠네요.

그러고보니 오늘 이야기에 등장하는 키보드까지 (시기상으로 두번째 만들어진 세이버네요)  벌써 다섯대의 세이버를 만들게 되었군요. 초절정 고수분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던 그런 작업을 저같은 허접하기만 하고, 뭐든지 대충 얼렁뚱땅 만들고서 좋아라하는 제가 만들게 되었다는 사실이 사실 신기하기만 합니다.
기술적인 것들에 대한 가르침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 들에 대한 여러 회원님들의 헌신적인 가르침들이 있었기에 어설픈 세이버지만 보여드릴 수 있게 되었던 거 같습니다. 감사의 마음이야 언제나 부족하기만 합니다.





사진상의 키보드는 다들 아시는 통상 SGI라고 불리는 Silicon Graphics사의 키보드로 알프스 스위치를 채용하고 있죠. 와이어링 없이 일반 pc에서 사용할 수 있는 녀석들도 있고, 와이어링을 해야만 하는 녀석들도 있구요. 올드델과 매우 유사한 체형을 지니고 있지만 대부분 채용 스위치들이 키감이 떨어지는 스위치들이 탑재되어 있어서인지 제가 보기에 아주 큰 인기(?)가 있는 키보드는 아닌 거 같습니다. 지금은 위상이 많이 높아진 거 같기는 합니다만 역시나 스위치 교체등의 작업이 동반되어야 하는 듯 하구요.
저 역시도 그동안 크게 관심이 없던 키보드였는데 실물을 보는 순간 관심이 180도 돌변한 2대의 키보드 중 한대가 되버렸습니다. 그 하나는 옴니키 클릭이었구요. 또 하나는 바로 SGI였죠.
애플 키보드에 적용된 유니버스 폰트가 채용되어 있고, 투톤 컬러의 키캡이 주는 단정함과 작업여하에 따라 매우 훌륭하게 상승되는 키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적어도 키보드를 뜯었다, 부셨다, 땜질했다 하는 일을 일상으로 하는 저희들에게 최상의 파트너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구하게 된 하나의 SGI는 매우 좋은 상태라고 했지만 생각만큼 좋은 상태는 아니었는데, 하우징이 균일 선탠이 아닌 얼룩덜룩한 변색이 진행되고 있었고, 보강판의 녹도 어느정도 생겼고, 무엇보다 스위치의 키감이 전체적으로 너무 망가져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과감하게 잘라볼 결심을 해버렸네요...^^;

여러번의 삽질끝에 애플의 확장2 세이버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었던터라 과감하게 도전을 해봤는데 일터에 있던 직소기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보면서 고정용 장비가 확실히 있지 않은 상황에서 직소기 같은 것을 쓰면 오히려 더 망가진다는 것을 SGI 를 망가뜨려 가면서 배우게 됐습니다.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세이버의 기초를 잡아두고 naga님처럼 보강판도 빨간색으로 예쁘게 도색도 했구요.  일터에서 틈틈히 와이어링까지 마쳐두었습니다만 여러가지 개인적인 일들이 생기면서 껍데기를 만들어줄 시간을 갖지 못한채 몇 달을 떠돌다가 산속에 들어와서야 제 집을 갖게 되었답니다.



## 키감은 언제나 궁금하다






사용기란의 글을 볼 때마다 개인들이 느끼는 키감이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어떻게보면 궁금증 해소차원에서 여러 키보드를 만져보게 되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키감이라는 것이 뭐 별거 있나 싶은 생각을 늘 하지만 머릿속 한켠에 도사리고 있는 일말의 궁금증은 늘 사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켜 버리게 되죠. 그것을 우리들은 '지름신의 강림' 이라고 불러왔죠..^^
궁금할 키감이 아직도 남아있냐고 누군가 제게 물어본다면 솔직히 지금은 키감에 대한 궁금증 보다는 키보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져가는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시기가 지나가면 또 어떤 마음으로 키보드와 친구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뭐 어쨌거나 자르기로 결심한 이 키보드는 어떤 느낌의 키보드여야 할까 싶은 고민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당시 자금 사정상 SGI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다고 여러분들이 얘기해주시던 오렌지 스위치 채용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여분의 스위치로는 백색 클릭 스위치가 있었지만 언젠가 옴니키를 구하면 쓰고 싶어서 이 SGI는 짝퉁(?) 리니어를 만들게 됐습니다.
원 스위치들의 키감이 워낙 제각각이어서 알프스 스위치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야기시키는 주 원인인 판 스프링을 빼버리고 유사 리니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회원 초기부터 판 스프링을 뺀 llgs의 키감이 정말 좋다는 얘기를 자주 들어왔지만 한번도 해보지 못했었는데 SGI에 드디어 적용을 해보게 됐네요.





조건이 다르다면 슬라이더가 댐퍼가 적용된 것이라는 것. 확장2에 있는 것과 같은 스위치에서 판스프링을 제거하고, 슬라이더와 스프링에 윤활제를 가해서 조립을 한 느낌은.. 뭐랄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댐퍼 슬라이더의 재발견' 이라고 부르고 싶어졌었습니다.
슬라이더가 진행될 때의 은은한 사각거림과, 판스프링이 빠지면서 엉망이었던 키감이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리니어 특유의 키감으로 승격되는 정갈함에 더하여 댐퍼있는 슬라이더가 마지막 충격을 흡수하면서 전해지는 손끝의 푸근한 느낌. 덤으로 그동안 어떤 스위치들이더라도 기계식 키보드의 타이핑이 가지는 소란스러움을 현격히 앗아가는 소음감소의 효과까지 SGI 원 스위치의 변형 리니어가 주는 느낌은 제게는 지나치게 만족스럽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현재 작업을 거의 마친 모 회원님께 갈 키보드에도 확장2의 댐퍼 리니어 스위치로 해드릴려고 했는데 핑크 스위치 키보드를 한대 건내주셔서 그것으로 작업을 했습니다만 제가 가졌던 좋은 느낌이 어땠었을지 짐작이 가실거라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이 나이를 점점 먹어가며 조금씩 밋밋해져 간다고나 할까요, 둥글둥글 해져간다고나 할까요.. 자극적인 것보다는 익숙한것과 편안한 것을 좆는 마음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이 접하고 있는 키보드들에서 클릭의 화려함과, 넌클릭의 분주함 대신에 점차 리니어의 한결같음을 조금씩 이해해가는 마음이 제 안에 더 크게 자리잡아 가는 걸 생각해보면 키보드, 또는 키감의 방랑기에도 겨울 새벽같은 고즈넉함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 비.....





이 글을 올릴 수 있을 때쯤이면 비가 오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무려 12일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왔습니다. 그리고 한 이틀 안개 낀 햇빛이 나더니 또 사흘간의 비가 오고, 태풍이 온다고 또 계속해서 비가 온다고 하네요.
지난 비로 힘들게 딴 고추를 100여근 버렸는데,  (9월 30일 현재 최종적으로 버린것이 약 250여근이 될 거 같습니다. 대부분 밭들과 마찬가지로 저희 밭의 고추도 다 죽어버린 상태구요. 빗속에서 죽을 고생해서 판매한 것이 150여근이니..ㅠ.ㅠ) 또 이번 비로 많은 고추를 버려야 할 거 같습니다. 비단 비 뿐만 아니라 말려서 보관해야할 여러 작물들이 모두 썩어서 버려버리는 사태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힘겹게 수확한 것이기에 지켜내고 사람들의 먹거리로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 애절합니다. 힘겨운 농사로 생을 꾸려가시는 농부 어르신들의 마음을 배워가는 시기인 듯 합니다. 전에는 그저 비가 오면 좋았었는데 지겨워질대로 지겨워지고, 지칠대로 지쳐가네요.
문득 비 얘기를 꺼낸 것은.. 간혹 읍내에 나갈 때 군청이나 우체국에서 글을 잠깐씩 보곤 합니다. 그 안에서 변해가는 키매냐에 대한 걱정과 우려의 글들이 보이기에 끝없는 비에 빗대어 이곳을 가꾸어온 이들이 이곳을 지킬 의무로 남아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적어보게 됐네요.
지키는 이가 있어야만 비로 대변되는 여러 시련들이 이곳을 휩쓸어도 저같은 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숨을 쉬면서, 삶을 나눌 수 있게 되지 않을지..
지금은 그저 방관자인 부엉이의 넋두리였습니다.


좋지 않은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순간들에도 기운들 내주시기 바라며.. 2007년 9월 16일 비오는 일요일 아침에 빨간부엉이였습니다.



덧붙임 :카프리옹님께 진심어린 감사함을 전하며, 사진은 어두운 밤에 희미한 형광등 아래서 찍은 것들이니 그러려니하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