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달 전부터 모델 M과 버클링 스프링 방식이 궁금해서 키보드를 몇 개 모아보았습니다.
버클링 방식을 접한 것은 아주 옛날 XT방식의 컴퓨터를 가지고 놀 때였지만 그때는 그게 버클링 방식인줄도 몰랐었지요. 이곳을 알게된 후에야 그 때 그 키보드가 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장터를 통해 유니콤프 커스터마이저를 구입해서 사용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버클링 방식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IBM의 키보드가 궁금해진 것은 모델 F를 만진 후부터입니다.
모델 F는 이전의 사용기에도 썼듯이 실로 기념비적인 키보드라고 생각합니다. 키감이라는 측면에서도 최고봉에 올라있는 극소수의 물건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이지요.
이런 모델 F를 만져보았으니 후계 기종인 모델 M을 만져보고 싶다는 단순한 발상에서 저의 모델 M의 여정은 시작합니다. 그러나 Model M은 워낙 예전부터 숨은 고수분들이 많이 계셔서 글 쓰기가 참 어렵습니다. 실수가 있다면 질정 부탁드립니다.
(텍스트만 너무 많아서 이미지를 무단으로 퍼왔습니다. zoooz에 cooluck님이 올려놓으신 그림입니다. cooluck님께 양해를 구합니다.)


1. 84년의 5170 AT 84, 그 이후의 키보드

5150과 5170의 키보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대로 버클링 스프링 방식에 탄소판을 이용한 정전용량 방식었습니다. 소재도 노릴과 같은 발군의 소재가 이용되고 있었지요.
모델 M은 여기에 비하면 여러모로 손색이 있는 키보드입니다. 정전용량 방식에서 멤브레인 시트의 접점으로 이행한 것은 그 숨길 수 없는 증거입니다. 결국 마이너 체인지된 후계기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확보해서 사용한 연식은

86년 5월 (미국)제조 1390120(이중키캡, 다색인쇄, 케이블 분리형)
86년 7월 (미국)제조 1390120(이중키캡, 다색인쇄, 케이블 분리형)
87년 7월 (미국)제조 1391472(스페이스 세이버, 단일키캡, 다색인쇄, 케이블 분리형)
88년 7월 (미국)제조 1390131(이중키캡, 다색인쇄, 케이블 분리형)
88년 11월 (미국)제조 1390401(이중키캡, 다색인쇄, 케이블 분리형)
96년 6월 (영국)제조 42H1292(단일키캡, 단색인쇄, 케이블 일체형)
96년 1월 (렉스마크)제조 52G9658(단일키캡, 다색인쇄, 케이블 일체형, 박스 신품)

으로 총 7개입니다. 88년 이후로 90년대 초반의 물건을 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90년 이전의 것들은 비교적 촘촘하게 사용해 볼 수 있었고, 1390120 같은 경우는 두개를 구하게 되어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습니다.
1390120이나 1390131은 특히 우측 상단에 IBM의 메탈로고가 있습니다. 이 메탈로고는 극히 희귀한 것으로 Model M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개씩 가지고 싶어하는 물건이기도 합니다.
85년에 제조된 물건은 아크엔젤님이 터미널용을 하나 확보해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장터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사용해볼 기회는 닿지 않았습니다.


2. 이중키캡의 필요성에 대한 궁금증

이중키캡은 Model M에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5150과 5170을 보았을 때에는 그것들이 모두 단일 키캡이라서 이중키캡은 이후 Model M으로 오면서 고안된 것이리고 추측했었으나 이 추측은 틀리고 말았습니다.
실물로 가장 초기에 확인되는 이중키캡은 얼마전에 e-bay를 통해 국내에 많이 들어온 EMR 키보드입니다.
거의 모든 사양이 5150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밀리터리 스펙으로 케이블 결속부과 같은 부분이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지고, 5150과 달리 이중키캡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중키캡은 초창기 Modle F 시대부터 확인 되고 있습니다.
이 이중키캡은 별도의 커스터마이징 셋트를 통해서 투명키캡으로 교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전에 Q&A를 통해서 확인이 되었으니 더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IBM이 5150에는 넣지 않았던 이중키캡을 EMR에는 넣었다는 것은 한 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애초에 XT 시스템은 PC라는 이름이 반증하듯, 그야말로 개인 사용자를 위한 것이었고 EMR은 군용으로 납품된 물건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PC보다는 특수 용도로 사용되었던 EMR이 특수한 펑션키등을 사용할 확률이 높았을 겁니다. 때문에 오리지널 배열보다는 특수 배열이 사용될 경우가 있었을 것이고, 이것은 이중키캡에 대한 수요로 이어졌을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쿼티자판과 드보락 자판의 호환이라는 문제로 잠깐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습니다만, 이것보다는 특수배열이라는 문제가 더욱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Modle M, F는 모두 스텝 스컬처1 방식을 사용하고 있기때문에 단순히 쿼티와 드보락 배열만이 문제가 된다면 키캡을 바꾸어 꽂으면 됩니다. 평션키나 텐키 부분까지 이중키캡을 사용할 이유가 없지요.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원가도 이중키캡이 높았을 겁니다. 사출공정도 한번 더 늘어나고 키캡 두개를 결합하는 공정까지 거쳐야 했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광범위한 연식을 통해 이중키캡이 확인되는 만큼 IBM의 특수 사용자, 프로페셔널 사용자에 대한 작은 배려는 꾸준히 이어졌다고 봅니다.


3. 96년 이전의 Modle M

눈치 채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96년은 Model M의 중요한 분기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96년은 바로 IBM의 키보드 파트가 렉스마크로 매각된 해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제가 90년대 초반의 물건들을 직접 구해서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90년대 이전의 물건들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86년에서 89년의 물건들은 모두 깨끗한 물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물건들이 처음부터 다 깨끗했던 것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물건이 15년에서 20년 가까이 되게 되면 여기저기가 삐걱대고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이 당연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사용량이 적었을까 하면 또한 그것도 아닙니다. 87년산 스페이스 세이버의 경우 물건이 부서지지 않고 멀쩡했다 뿐이지 더럽고 지저분하기가 이를데 없었습니다. 세척을 위해 키캡을 빼니 먼지는 기본이었고 옵션으로 음료수 엎지른 자국에서부터 머리카락이 수도 없이 나왔습니다. 결국 세월과 사용량을 반증하는 것이었겠지요. 88년산 1390131은 정도만 덜했다 뿐이지 더럽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씻겨놓고 나니 거짓말처럼 새것과 다름없게 느껴질 정도로 깨끗한 외관을 보여주었습니다. 게다가 먼지에 가려 잘 느껴지지 않던 키캡의 요철들이 거짓말처럼 생생하게 손가락에 와 닿았습니다.
또 상판과 하판의 이음새도 한치의 유격이 없을 정도로 확실한 마무리가 되어 있습니다.
키감은 1390131과 1390120(5월), 1390120(7월) 모두 약간씩 다른 키감을 보여주었습니다만, 그 차이는 매우 미세한 것이고 본질적으로 어떤 키감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는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391472(스페이스 세이버)는 확연히 약간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키감에 대해서는 잠시후에 상술하도록 하겠습니다.  


4. 96년 영국산과 미국산

96년 영국산을 미국산보다 먼저 받게 되었습니다만, 그 인상은 정말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더럽다라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물건 자체가 처음부터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상판과 하판은 꽉 물리지 않아 덜걱거리는데다가 결정적으로 키캡위의 요철이 거의 다 지워져서 민자나 다름 없었습니다. 아마도 만듦새가 좋은 80년산들을 많이 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실망감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키감 또한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스페이스 바는 스테빌라이저가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격이 있어서 타격이 견고하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미국산은 만듦새가 조금 나았습니다. 유격이 별로 없고 키감도 영국산보다는 나았습니다. 아무래도 신품이라는 것의 메리트가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키캡의 재질이 영국산과 다를 바 없어서 시간이 좀 지나면 요철이 마모될 것은 명약관화 했습니다.
또한 둘 모두 80년산의 것들보다 통울림이 심해서 퉁퉁거리는 소리가 많이 났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96년 산들은 80년산 노장들에게 패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두개 다 80년산과는 다른 특이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배수구의 존재입니다.
스페이스 바쪽 밑부분을 보면 구멍이 4개 나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음료수나 커피를 엎질렀을 때 그 걸 빼는 구멍이지요. 투박한 모양의 Model M이지만 이런 작은 배려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조는 미국산이 더 나아보였습니다.


4. 키감의 비밀

사실 많이 고민스러웠던 부분이 바로 이 키감입니다.
Model M의 키감과 그 차이를 분별하기 어려운 몇 가지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너무 오래된 물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올드에서도 적당히 키감 괜찮고 깨끗한 물건을 구해서 쓸 생각이라면 모르지만, 여러가지 연식과 모델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이것은 대단히 곤란한 문제였습니다. 일단 비교의 기준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파트넘버의 것이라 해도 상태가 아주 좋지 않다면 신품으로 구할 수 있는 Model M이나 유니콤프의 것보다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때문에 80년 산들이 외관은 멀쩡하더라도 어느정도의 상태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운 좋게도 1390120을 2개를 구하여 비교함으로서 어느정도 기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는 파트넘버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입니다.
파트넘버가 다르다는 것은 결국 생산 방식에 뭔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최대한 많이 구해보지 않는 이상 알 도리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못 구한 파트넘버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만, 당장은 더 이상은 능력이 안되서 안 되겠더군요. 나중에 구하여 생각이 바뀌는 점이 있으면 수정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셋째로는 Model M은 분해후 조립이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스프링과 접점이 들어있는 주요 부분은 철판과 플라스틱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철판에 플라스틱을 녹여서 붙여놓았습니다. 때문에 분해하려면 플라스틱을 뜯어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재조립이 불가능해 집니다.
때문에 내부구조나 스프링에 차이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손의 감각으로만 판단을 해야만 했기에 난감함이 더욱 심했지요.

본격적으로 키감에 대해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80년산들의 키감은 대체로 키압이 낮게 느껴지면서 바닥감이 단단했습니다. 전에 우기님이 M과 F사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반면 96년산들은 바닥도 좀더 물컹거리는 느낌이 있고, 울림이 심합니다.
또 80년 산들의 소리는 스프링과 멤브레인 바닥을 치는 소리 외에는 거의 잡음이 없습니다만, 96년 산들은 통울림이 심합니다. 80년 산들이 훨씬 단단하고 절제된 소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80년 산에도 약간의 단점은 있었습니다. 전에 댓글에서 본 것 같은데, 어떤 분께서 80년 산들의 키감이 지루하다고 하셨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던 터에 그 글을 보게 되어 매우 놀랐었습니다. 또한 어느 정도 확신도 가지게 되었지요.
키감이 지겨워 지는 이유로는 80년 산들의 것들이 대체로 반발력이 약하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80년 산들의 반발력은 96년산의 것보다 약간 낮습니다.
이것이 그렇지 않아도 약간 물컹거리는 키감에 악영향을 주어 경쾌함을 없에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스페이스 세이버는 80년산의 단단함이란 장점들과 96년산의 경쾌함을 겸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물건중에서 가장 낫다고 할 수 있겠군요.(더불어 이 글도 이걸로 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차이가 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재조립이 불가능하니 뜯어 볼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사실 다 뜯어서 혹시 멤브레인 시트에 뭔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럴만한 배짱도 용기도 없어서 차마 감행하지 못하겠더군요.
일본 쪽 사이트를 뒤져봐도 버클링의 구동방식은 이런 것이다, 뭐가 좀 낫다라는 식의 것이고 본질적인 차이를 말한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저만 모르고 있는 곳이 있을수도 있으니, 이런 곳을 아시면 알려주세요.)
그러나 딱 하나 제가 변인을 통제해 볼 수 있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키캡의 차이에 대한 실험이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M의 키캡은 총 4종입니다.

1. 80년산 이중키캡(80년산 대부분)
2. 80년산 단일키캡(스페이스 세이버)
3. 96년산 이중키캡(영국산)
4. 96년산 단일키캡(미국산)

키탑에서 느껴지는 요철과 재질의 감촉으로 보았을 때 1과 2가 거의 같은 소재였고, 3과 4가 거의 같은 소재였습니다.
키캡을 끼우는 바디가 된 것은 87년 7월 1390120, 87년 스페이스 세이버, 96년 영국산 이었습니다.
그리고 Model M의 버클링 방식에 있어서 키캡은 키감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효과는 96산의 두개는 거의 대동소이 했으나 80년산의 이중키캡과 단일키캡의 차이는 확연했습니다. 단일키캡이 훨씬 분명한 텍타일 필과 빠른 반발력을 주었습니다. 또한 훨씬 단단한 타격감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앞서 이중키캡을 말하면서 그것이 단일키캡보다 원가도 더 투입된 고급품이라고 말했지만, 키감에 있어서는 단일키캡이 더 나으니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키캡을 바꾸어 사용해 본 결과 본질적으로 스프링의 압력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키캡이 주는 텍타일 필의 타이밍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키감에 키캡만이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멤브레인 시트에 대해서도 많이 궁금하고 확인해보고 싶지만 차마 뜯어보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5. 마치며

그럭저럭 Model M을 모아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스스로도 아직 궁금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 더 있다보면 새로운 것, 신기한 것들도 볼 수 있게 되겠지요.
그 때 생각이 바뀌는 것이 있으면 수정해 보겠습니다.
며칠간 생각만 하고 있다가 쓰고 나니 후련하군요. 장문의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