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들어가며

IBM은 XT 컴퓨터인 5150과 그 후속타인 AT 5170으로 드디어 소위 IBM 호환 개인용 컴퓨터라는 것의 시작을 개막했습니다. 그 이후로 컴퓨터는 소위 '무어의 법칙'으로 대변되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가파른 상승기류를 타고 발전하고 그에 따라 시장 또한 급속하게 팽창되어 갑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사용자들은 CPU 클럭이 기가 헤르즈를 마크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세상이지요.

흑백 단색의 모니터는 둠3 같은 3D 그래픽을 쏟아내고,
비프음 밖에 낼 수 없었던 스피커는 홈씨어터 조차 구현 할 수 있는 현장감을 만들어내고,
기껏해야 워드와 스프래드 쉬트만의 기능이었던 개인용 컴퓨터가 이제는 어디있는 누구든지 리얼타임으로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엄청난 컴퓨터의 질적 인플레에서 몇몇 장치들은 원가 절감이라는 이유로 퇴보한 것이 있습니다.
널리 아시고 있듯이 그 중의 하나가 이 곳의 우리들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키보드 이지요.
실제로 요즘의 키보드들을 예전것과 비교해보면 한숨밖에 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멀티미디어 키들이 붙어 있는 것이 메니아 입장에서는 군더더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일반 사용자들의 선호도나 시장의 형성으로 봤을 때 일방적으로 부정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키감으로만 봤을 때,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지요.

그간 명기라고 알려진 키보드들은 키감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완성도에 있어서도 명성에 걸맞는 것이었습니다.

애플사가 만든 확장1, 확장2, 2gs.(알프스 스위치)
Zkb 시리즈(역시 알프스 스위치)
체리 스위치를 사용한 키보드들
최근 높은 완성도와 부드러운 키감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토프레 정전용량 스위치 계열
IBM의 모델 F, 모델 M, 5576 시리즈 등이 대략 명품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하나같이 명품인 이들 중에서도 역시 IBM Model F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5170 AT 84는 아주 기념비적인 것이지요.


(2) 모델 F xt 5150

일단 모델 F xt에 대해 간략히 논해보겠습니다.
일단 이것을 만지게 되면 느끼게 되는 것이 '무겁다!'라는 것입니다. 키감이 무겁다는 것이 아니라 무게가 무겁다는 것이지요.
XT는 무식하게도 철판이 무려 3장이 들어 있습니다. 일단 스위치 부분에 2장이 들어가고 하판까지도 두꺼운 철판이 들어가 있습니다. 크기는 AT 보다 작은데도 무게는 XT가 더 나가지 않을까 합니다.

레이아웃은 정말 적응하기 힘든 형태로 되어 있지요.
일단 ESC가 최상단 '~'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2gs를 쓰시던 분이 난감함을 느끼는 부분과 같지요.
'\(백슬러시)' 오른쪽 쉬프트의 자리를 깎아먹고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난감한 부분은 엔터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매니아들은 영문 레이아웃의 일자 엔터키와 큰 백스페이스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이 있는데 이건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배치입니다. 무려 세로형 일자 엔터키이기 때문이지요. 엔터키를 치려면 오른손의 포지션을 아예 옮겨야 합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돌기가 가이드 역할을 해주기는 합니다만, 현행 레이아웃에 익숙해진 손으로 그것을 치기란 쉬운일은 아닙니다.

대신 키감을 말한다면 5170보다 오히려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5150과 5170에 본질적인 키감의 차이는 없으며, 차이는 키압에서 뿐이리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5170의 높은 키압이 서양인에게는 맞을지 몰라도 동양인에게는 5150의 낮은 키압이 더 좋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견지로 5150의 키압이 서양인에게는 너무 낮았기 때문에 5170에 이르러서는 키압을 높여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3) 모델 F at 5170
  
제가 5170을 기념비적인 키보드로 꼽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레이아웃의 완성입니다.
물론 현행의 키보드와는 아직 많은 차이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의 키보드와 다른 점을 찾자면 독립된 편집키의 부재, 펑션키의 위치, ctrl과 alt의 배열, esc의 위치, 텐키에 엔터의 부재를 들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자판부위의 레이 아웃이 지금과 거의 다르지 않음을 본다면 역시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84 레이아웃을 토대로 점차 101, 104 등의 레이아웃으로 확장되는 것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재에 있어서도 모델 F는 발군의 것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넉넉한 철판의 사용(구조상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좋은 재질의 스프링, 아직까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한 키캡의 요철은 처음 만져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 충분한 것입니다.
특히 키보드의 상판과 하판에 들어간 '노릴'소재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입니다.
이 '노릴'소재의 장점은 불에 타지 않음, 가벼움, 철판에 맞먹는 강도라고 합니다.
모델 F들을 보면 상판이 군대군대 벗겨진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노릴'위에 처리된 스프레이 페인팅이 벗겨진 것이지. 소재 자체가 손상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근 20년을 버텨오면서도 거의 한점 손상이 없는 것입니다.
'노릴'은 현재는 너무 비싸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소재이며, NASA에서 항공소재로 많이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소재가 키보드에 쓰이고 있다는 것은... 정말 대략 난감한 일이지요.


(3) 모델 F의 키감, 정전용량 스위치와 버클링의 하모니

초기의 키보드를 제작할 때 가장 고려했던 부분이 타이프라이터와 흡사한 키감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는 사실일 겁니다. 그리고 이 모델 F는 이런 컨셉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키보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추측입니다만, 이런 타이프라이터의 컨셉은 지금 우리가 만지고 있는 키보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타이프라이터와는 달리 컴퓨터는 기계적인 물건이 아니라 전기적인 물건입니다.
굳이 스프링을 이용해 찰캉찰캉 하는 소리를 내지 않아도 충분히 신호의 입력이 가능한 물건이지요. IBM이 xt 이후에 내놓은 가정용 컴퓨터 pc jr.의 키보드를 보면 정전용량 스위치와 버클링이 아닌, 러버돔 형태임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단가의 문제도 문제였겠지만, 컴퓨터 키보드가 반드시 기계식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겠지요. 결과는 대 실패였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타이프라이터인가? 왜 이것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것은 타이프라이터가 순수한 기계식 머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에 입력을 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전기적 신호만 있으면 됩니다만, 기계식 머신의 경우에는 입력의 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즉, 활자를 종이에 때려주는 공이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주어져야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요. 전동타자기 시대가 오면 얘기가 좀 달라지기는 합니다만, 그것 또한 전기적 신호가 아닌 물리력으로 사용하는 물건임은 변화가 없지요.
물체를 움직이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 물건을 움직이기 위한 임계점을 돌파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힘이 주어진 이후에라야 물체가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요즘의 워드프로세서 처럼 수정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에는 오타에 대한 부담이 훨씬 컸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중한 타이핑을 해야 했을 것이고, 때문에 어느정도 누르더라도 입력이 되지 않는 한계선이 필요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택타일, 즉 구분감이 출현하게 된 까닭이 아닐까합니다. 일종의 오타에 대한 방패막이인 셈이라는 것이지요.
요즘 많은 키보드들은 비록 러버돔을 쓸 지언정 반드시 구분감을 가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때부터 나온 일종의 관성이 아닐런지요.

하지만 요즘 리니어 스위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구분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리니어 스위치는 다른 방식으로 오타를 방지한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키압이지요. 스위치에 구분감이 없더라도 잘못된 키를 눌렀을 때 높은 키압의 반발력이 잘못된 입력을 방지하는 일종의 방패가 되는 것이지요.
만일 리니어 스위치가 낮은 키압을 가지고 있다면 너무 쉬운 키 입력이 오타를 양산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 타이핑하는 재미도 없어지겠지요.

어쨌거나 이 모델 F는 타이프라이터의 키감을 충실히 모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슬라이더 조차 없이 키캡과 스프링, 그리고 탄소판의 회전이 만들어 내는 키감은 쓸데없는 잡 움직임 없는 심플 그 자체의 키감을 형성합니다.
모델 M이 러버돔을 때림으로서 주는 물컴함조차 없지요.
기판에 탄소판이 주는 타격이 주는 깔끔한 뒷마무리와, 자연스러운 철판의 공명은 시대를 뛰어넘은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키보드가 주는 품격으로 이걸 따라 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이 모델 M에는 다른 키보드가 따라올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신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저 역시 동의 합니다. 그리고 모델 F는 그 카리스마에 있어서 M을 능가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중한 무게와 크기가 주는 존재감, 그리고 경박하지 않은 소리와 깔끔한 키감이 선사하는 타이핑의 세계는 이전에도 이후로도 오직 모델 F만이 있을 뿐입니다.


(5) 마치며..

모델 F에 대한 정리되지 않을 생각들을 나열했습니다만, 너무나 추측도 많고 개인적인 의견이 많습니다. 게다가 컴퓨터에 대한 지식도 부족하군요.
그저 수박 겉핥기 식의 지식의 나열인 된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합니다.
고수님들이 질정을 해 주시면 바로잡아 나가겠습니다.
장문의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일요일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