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 빈티지 삼총사, AT 5170, XT 5150, EMR2 비교 사용기

* 사용 키보드
IBM AT 5170 1985년 B+급 중고
IBM XT 5150 1984년 신품
IBM XT 5150 1984년 A급 중고
IBM EMR2 박스신품 1984-6으로 추정
IBM Model M 1390120 신동품 1987년

체리 스위치에 한창 빠져있을 때, ZOOOZ에서 Arch-angel님의 IBM AT 5170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신의 키보드-천상천하 유아독존! 절대키감!" 도대체 어느 정도의 키감이길래...  이런 극찬이 쏟아질 수 있을까?  사진 속의 5170은 정말로 현대의 키보드와 비교되는 원형에 충실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이베이에 가입해서 5170을 낙찰 받고, 기다림 끝에 물건을 받고나서도 정말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습니다.  젠더와 특성을 타는 노트북의 마더보드 문제로 결국은 피씨를 새로 장만하기까지 했으니까요.  더군다나 뭘 모르고 스페이스 바까지 분리했다가 정말 본의 아니게 키보드를 완전 분해한 경험까지...  아마도 저의 이런 뻘짓에 대해서는 아시는 분은 다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오래된 컴퓨터 초창기의 키보드들에 대한 애정이 싹텄다고 생각합니다.  

Model M, 그리고 삼총사

아직까지도 많이 사용되는 모델 M과는 달리 위의 세 키보드는 정전용량방식으로 ‘N키 롤오버’를 지원합니다.  즉, 무한 동시입력을 허용하는 모델들입니다.  같은 버클링 방식이지만, 탄소판을 이용한 키 입력 때문에 키감은 상당히 다른 느낌을 전달합니다.  기본적으로 IBM버클링 방식의 스위치는 체리나 알프스 스위치보다 무겁고, 클릭 사운드도 시끄럽고 요란한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클링이 주는 진정한 매력은 손끝으로 전달되는 시원하고 통쾌한 감각과 철판을 때리는 경쾌한 사운드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마치 타이프라이터와 같은 순수한 기계를 통하여 한자 한자 글자를 바로 입력하는 듯한 착각을 갖기에 충분한 효과를 제공합니다.  삼총사는 타이프라이터와 같은 ‘순수한 기계장치’적인 키보드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모델들입니다.  쇠인지 플라스틱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단단해 보이는 값비싼 노릴 소재의 바디와 두꺼운 철판, 그리고 20여년의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새것처럼 빛을 발하는 키캡과 그 위에 뚜렷하게 새겨진 최상의 승화인쇄 문자는 요즈음의 키보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빈티지적인 매력을 발산합니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생산된 5150, 5170에 이어 1986년경부터 IBM의 키보드는 모델 M으로 대체된 듯합니다.  5150의 83키, 5170의 84키에서 모델 M은 106키로 일반적인 레이아웃을 갖추면서, 삼총사의 명맥을 이어나갑니다.  모델 M은 피씨의 대중화에 맞춰 원가절감과 함께 상대적으로 편안한 환경을 제공해줍니다.  순수 버클링방식, 부드럽고 가벼운 플라스틱 바디 재질의 변화는 훨씬 더 컴퓨터 환경과 순응하여 전자제품의 입력장치에 어울리는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당연히 키감에도 상당한 영향을 줍니다.  삼총사가 공히 스프링이 단단한 철판을 때리는 듯한 통쾌한 고음의 금속성 소리(차캉..차캉...차르르)를 창출하는 반면에, M의 클릭음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부드러우면서 통통 울리는 저음의 소리(투캉..투캉...)를 들려줍니다.  하나하나의 키를 눌러보면 키압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타이핑을 하다보면, M보다는 삼총사가 조금 가볍게 느껴지는데, 이는 스프링의 탄성과 클릭음의 차이에 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총사의 외형

“The Simple is The Beautiful"

개인적으로 IBM AT 5170은 가장 아름다운 키보드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펑크션 키와 방향키의 위치, 숫자 키패드의 엔터키 부재로 여전히 불편한 레이아웃이긴 하지만, 은은한 베이지색 노릴 바디와 넉넉한 상부 공간에 돌출된 녹색의 LED 램프, 그리고 고급스러운 실버메탈로고까지...  충분히 첫눈에 반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모델 M과는 달리 모든 면을 부드러운 곡선처리를 해서 실물보다 작게 보이며, 여성적인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사용하면서 가장 불편한 점은 역시 부담스러운 크기입니다.  또한 단품으로서의 너무나 강한 개성 때문에 다른 컴퓨터 파트와 조화를 이루기 힘든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홀로 있을 때는 빛을 발하지만, 어울리기는 힘든 카리스마가 넘치는 놈이라 할까?   케이블의 길이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두툼한 검정 케이블은 지나치게 길어서 처지 곤란입니다.  아무튼, 이시기 아이비엠이 원가에 대한 고려보다는 기계적 완성도에 치중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5170 이전의 모델인 XT 5150은 상대적으로 더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키 배열을 보면, 정돈되지 않은 모습입니다.  83키의 삐뚤빼뚤한 키 배열, 작은 엔터키와 쉬프트 키는 치명적인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실제 사용하다 보면, 의외로 쉽게 적응하게 됩니다.  문제는 왼쪽 쉬프트 키인데, 바로 옆의 키로 키 매핑을 하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숫자 키패드 쪽은 오히려 상당히 인체공학적으로 배열되어있습니다.  다섯 손가락의 위치를 편리하게 가늠한 최적의 키 배치는 사용하다보면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부분입니다.  외관상, LED 램프파트가 없고, 바닥을 철판으로 사용한 점, 컴팩트한 사이즈와 짧은 케이블이 5170과의 차이점입니다.  작지만, 무게는 5170보다 더 나가며, 다른 컴퓨터 파트와도 잘 어울리는 단순한 디자인입니다.

EMR2는 외형상 5150과 같은 모습입니다.  위의 모델들과는 다르게 이중키캡을 사용한 점, 1M가 넘는 긴 회색 직선 케이블, 무광 알루미늄 로고 등이 들어나는 차이점입니다.  주로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던 키보드라 그런지, 노릴의 재질도 가장 단단한 것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삼총사는 모두 노릴의 올록볼록한 재질 위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마감(real painted body)되었는데, 각각 올록볼록한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5150이 표면이 가장 촘촘히 처리되어 촉감도 좋고 고급스럽게 디테일처리가 되어 있음을 확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주어 바디를 눌러보면, 5150이나 5170은 쉽게 휘어지는 반면, EMR2는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엔터키 바로 왼편에 있는 키의 경우, 5150은 키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해 다른 키캡을 사용한 반면, EMR2는 일반 키캡을 사용해서 틈이 벌어진 상태를 방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용도와 재질의 차이는 당연히 키감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삼총사의 키감

"The Older, The Better"

한동안 클래식 오페라를 즐겨들을 때, 왜 수많은 사람들이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의 음악에 열광하는 지를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테발디나 최근의 조수미의 목소리처럼 아름다운 음색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오래된 모노 앨범들은 EMI를 살릴 정도로 수십 년 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흔히 그녀의 음성을 쇳소리에 가깝다고 합니다.  결코 듣기 편한 미성은 아니지만, 목소리에 담긴 혼과 카리스마 넘치는 열정은 듣는 이들을 전율하게 만듭니다.

쇳소리...  AT 5170을 처음 사용할 때, “차캉...칭...”하고 울렸던 금속성 소리 때문에 당황했건 기억이 납니다.  ‘이거... 신의 키보드 맞아?’  그러나, 그 고유의 키감을 즐기는 데는 불과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손맛이 하도 좋아서, 타자게임을 다운받아서 몇 시간씩 오락을 즐기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체리 갈색이나 알프스 스위치를 사용하다가 AT 5170을 다시 사용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상당히 무거운 키감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클릭 음이 큰 대개의 키보드들처럼, 5170의 클릭음도 때론 금속성 소음으로 들릴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XT 5150은 상당히 부드럽습니다.  부드러운 키압과 청아한 클릭음은 황홀한 수준입니다.  5150을 사용하다가 5170을 다시 치게 되면, 상당한 뻑뻑함과 키압을 쉽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키압 차이는 스프링의 차이로 확인되었고, 왜 동호회의 선배 고수들이 5150의 스프링을 이식한 5170을 최상의 조합이라고 평가했는지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새롭게 등장한 EMR2의 경우, 또다른 키감을 제공합니다.  키감은 오히려 5150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입니다.  실제로 두 키보드의 스프링 비교해보면, 다른 종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EMR2의 스프링 구경이 약간 더 크고, 탄성도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입니다.  클릭음도 상당히 독특합니다.  5170이나 5150은 딱딱 끊어지는 청아한 클릭 음을 내는 데 비하여, EMR2는 소리도 더 클 뿐 아니라, 울리 음을 창출합니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편안하게 들릴 수 도 있겠지만, 5150보다 시끌벅적한 소리임에는 분명합니다.  원인을 찾기 위해서 여러 가지 뻘짓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먼저 이중키캡이 의심이 되어 맞바꾸어 봤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스프링을 바꾸어봤지만, 역시 큰 변화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은 철판 혹은 프레임의 재질 혹은 내부의 구조 차이일 것이라 추측을 해봅니다.  

부활한 빈티지 XT 5150 & EMR2

IBM XT 5150과 EMR2는 아이비엠 최초의 컴퓨터 키보드라는 빈티지적 가치 이외에도 만듦새, 정전용량방식, 최고 수준의 버클링 키감으로 사용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명기임에 틀림없습니다.  IBM AT 5170의 경우, 신품은 500불에, 상태 좋은 키보드는 100불 이상으로 거래되고 있지만,  EMR2나 XT 5150은 박스 신품이나 상태 좋은 중고가 30-40불안에서 거래됩니다.  이렇게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이 나오는 이유는 현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없는 키보드였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고맙게도 최근 빠샤님의 젠더 개발로 훌륭한 과거의 명기들을 저렴한 가격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호회에서 빠샤님에게 공로상이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키보드는 컴퓨터의 단순한 입력장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사고,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한 디지털 세상과 “언어”로 만나는 중요한 지점에서, 열 손가락과 직접 접촉하는 유일한 “장치”입니다.

세월이 흘러 은은히 빛깔이 바래고, 먼지가 수북이 쌓인 손때 묻은 5150을 상상해봅니다.  어린 미래의 손주가 이게 뭘까 하는 표정으로 다가와서 손가락으로 여러 키를 눌러 봅니다.  

“차캉, 차캉, 차르르르...”

여전히 탱탱한 사운드를 들려주며 살아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