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려보니 10만 원이 넘어가는 고급형 키보드를 키보드의 표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자신을 되돌아보면 놀라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면 돈이 아깝진 않다.' 싶은 키보드가 있어 발을 떼지 못합니다.


레오폴드 FC750R PD는 17년 7월 출시한 모델로서 PBT 이중사출 키캡, 백축/저소음 적축을 도입한 제품입니다. 청/갈/적/흑으로만 출시하던 레오폴드에서 한 발자국 모험을 한 셈인데요. 꽤 성공적입니다. 키캡은 제가 본 최고의 물건이고, 백축과 저소음 적축 모두 기존의 네 가지 축을 넘어 입지를 다질만큼 매력적인 스위치거든요.


키캡은 이중사출 방식으로서... 각인이 인쇄가 아니라 별개의 플라스틱이기 때문에 마모의 걱정은 없다고 봐도 됩니다. 여기에 이중사출 키캡으로 볼 수 없었던 PBT 재질입니다. 또한 기존의 레오폴드 키캡에선 없었던 까끌까끌하고 광택 없는 표면으로 고급스러움을 전달합니다. 참고로 PD는 PBT DOUBLESHOT의 약자라고 하네요. 물론 모델명인만큼 다른 모델과 구별할 수 있게 적당히 줄여서 부르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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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화이트/그레이 제품을 구매했습니다.


보다시피 화이트/그레이 제품은 80년대에서 온 듯한 색 배합인데요. 심지어 순백이 아니라 아이보리 색상이라 더욱 옛날 키보드 느낌이 납니다. 신선한 맛은 없지만 말 그대로 '키보드스러운' 색상입니다. LED가 번쩍이거나 키가 반들거리는 키보드보다는 이 쪽이 취향입니다.


각인 폰트는 기존의 제품들보다 선명하고 두툼해 시인성이 뛰어납니다. 또한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아기자기하면서 트렌디한 느낌을 내고 있습니다. 저 엔조이승화 키캡 풍의 두툼하고 둥글게 깎은 폰트가 '복고풍일 뿐 엄연히 현대의 제품' 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어디까지나 옛날 느낌을 낼 뿐이지 '촌스러운' 키보드는 아닙니다. 하지만 색 배합 자체가 지루하기 때문에 이를 살짝 풀어주기 위해 포인트 키캡 하나를 장착했습니다. 그랬더니 한결 예뻐졌습니다.


키캡의 촉감도 마음에 듭니다. 레오폴드에서는 PBT 키캡의 모델을 많이 내놓았고 승화 키캡까지 따로 판매했는데... 전 그 키캡들을 딱히 좋아하지 않습니다. 키캡의 촉감이 맨들맨들하고 빛을 반사하거든요. 하지만 PD 제품의 키캡은 모두 표면이 리얼포스 키캡 이상으로 거친데다 빛을 반사하지 않습니다. 취향에 맞았어요. 그 정갈함이 레오폴드 모델 특유의 클래식함에 힘을 보태줍니다.


키캡만큼은 레오폴드 제품군은 물론이고 기계식 키보드 키캡 중 최고 수준입니다. 리얼포스나 해피해킹 키캡과 비벼볼만 한데다 취향에 따라선 그 이상. 호불호야 있겠습니다마는 뛰어난 수준을 벗어나진 않을 겁니다.


키보드 축은 청/갈/적/흑은 물론이고 백축과 저소음적축도 선택할 수 있다 말씀 드렸죠. 전 백축과 저소음적축 사이에서 직접 타건하며 오래 고민했습니다. 결국 백축을 택했고요.


두 축을 들여온 것 역시 키캡 못지 않게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일시적인 판촉 형태로 들였다 보기엔 너무 아까운 축입니다. 앞으로도 신규 제품에 선택권을 넣어주었으면 좋겠군요.


백축(클리어)은 넌클릭 축으로서 흑축 수준의 키압과 갈축보다 큰 걸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손맛은 최고입니다. 갈축과는 달리 자글자글한 걸림이 명확해 '이것이 기계식 키보드다!'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알맹이가 차 있는 반발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무접점 키보드가 떠오릅니다. 특히 무접점 키보드의 도각거림, 반발력, 리드미컬한 손맛을 기계식 키보드에서도 느낄 수 있다니 후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레오폴드 제품답게 소음은 충분히 정숙합니다. 울림 소리가 좀 나긴 하는데 기계식 키보드의 느낌을 내는 수준에서 그쳤더군요. 전 소음에 민감한 편입니다만 이 정도면 백축치고는 괜찮습니다.


손맛은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편하다고 보기는 어렵죠. 백축 특성상 하나의 장난감으로선 최고입니다만 작업용 키보드로서는 애매한 물건입니다. 구름 타법을 연마하면 연마할수록 그 자글거리는 느낌은 더 강합니다. 그렇다고 강하게 팍팍 치기에는 손이 부담스럽고요... 좀 더 쳐봐야겠습니다. 신경은 쓰이지만 못 쓸 수준은 아니라 다행입니다.


참고로 저소음적축은 조용한 타건샵에서 직접 비교하며 쳐본 결과 리얼포스 저소음 버전보다도 소리가 작습니다. 키압은 적축치고는 은근 있어서 부드럽고요. 물론 누르는 즐거움은 백축이 압승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저소음적축 제품도 구해봐야겠어요.


결론적으로... 디자인, 키감, 소음, 유지보수 모두 평균 이상의 스펙을 가진 제품입니다. 특히 손맛과 키캡의 디자인은 최고입니다. 이보다 좋은 제품을 딱히 떠올리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