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불의 명성에 누를 끼치다. ~~ 빨간불의 아류 파란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는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도 파란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키보드의 세계는 냉정하기 때문일까, 예쁘게 화장을 해 두었다 하여도 쌩얼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1분의 시간이 채 걸리지 않기 때문일까, 아무튼 파란불은 그렇게 후속편은 전작만 못하다는 영화계 법칙을 증명하듯 빨간불 아비의 명성에 누만 끼치고 있었다. 이유를 몇 가지로 분석해 볼까? 신형흑축에 무보강 - 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웬만큼 키매냐 생활을 하셨고 체리 키보드 대여섯 대 만져본 유저라면 그 입에서 바로 허거거걱 이라는 한숨 섞인 탄성을 자아낼 것이다. 폰트가 어떻네, 반푼이 이색사출이라 금방 키캡이 지워지네, 케이블이 구지네, 기타 등등 이런 건 다 사족이다. 그 정도는 아비인 빨간불도 많이 받았던 터였다. 하지만 빨간불이라는 이름 자체의 명성 - 진짜 빨간불 들어오는 것 말이다 - 외에도 구형흑축에 철판보강이라는 점은 두터운 매니아층에게 충분히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거기에 구형청축까지 만나게 해 준다면 구형청축에 보강이라는 카이저 법칙을 소화해 내는 미니키보드가 탄생하는 것이니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파란불, 유전자의 장난으로 만나다. ~~ 아버지는 XY 염색체를 가졌고, 어머니는 XX 염색체를 가졌다. 두 사람이 만나 XX 염색체를 조합하면 계집아이가 태어나고, XY 염색체를 조합하면 사내아이를 낳는다. 사내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50%, 어머니의 X 염색체에 담겨진 유전자 정보를 받을 확률 50%, 총 25%의 확률 속에서 난 세상에 태어났다. 빨간색이 어떤 색인지 모른 체, 그래서 난 빨간불이 싫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가... 파란불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본명은 Deck 82 ICE 라고 했다. 난 그냥 파란불이라 부른다. 키매냐 사이트에서 이런 저런 단점과 빨간불과의 차이점 등, 정보를 얻었지만,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빨간불이 아니라는 점만 해도 다행이었다. 물건을 구하고, 박스를 개봉하고, 컴퓨터에 연결하자마자 상자 안 암흑 속에서 너무 오래 참았다는 듯이 발산하는 그 푸른 빛깔은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위에 사진을 찍어둔 걸 올려놓았지만 저 사진 한 장으로 그 빛깔의 영롱한 신비감을 표현하기는 어불성설이었다. 감격이었다.

장맛은 찍어봐야 알고, 키감은 눌러봐야 안다. ~~ 무슨 말인지 아실 분들은 아셨으리라. 앞서 말했듯이 신형흑축과 무보강의 물컹거림, 11900처럼 두꺼운 이색사출 키캡이라도 사용하는 경우는 좀 다르지만, 파란불은 얇고 가벼운 키캡에 스텝스컬쳐라 불리는 측면 곡선배열도 아니다. 그냥 반듯한 평면이다. 키보드 세상에서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 빨간불에선 보강판이 있어서 표출되지 않았던 두 가지 단점 - 바닥 통울림과, 좌우 끝부분 기판이 휘청이는 것은 다행히 하부 빈 공간에 보강제를 채워 넣는 것으로 99% 해결 가능하다. 문제는 스위치였다. 신형흑축의 높은 키압은 얇은 키캡이 누를 때마다 좌우로 흔들리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극악한 손맛을 선사했고, 키매냐 선배님 말씀 중 흑축에 보강판은 필수불가결의 문제인가라는 화두에 네 라는 답변을 바로 던질 만한 감촉이었다. 좌절이었다.

남의 말만 믿다 혼쭐 나다. ~~ naga님 빨간불 LED사건이 있었다. 개조라면 횟수로나 실력으로나 키매냐에서 상위랭킹 몇 위안에 드실 naga님이신데 빨간불을 개조하시다 LED를 망가뜨리셨다며 SOS를 치셨고 많은 분들의 리플과 도움으로 해결을 보셨던 사건이다. 그 글을 읽다 보니 파란불을 청축 스위치로 개조하기로 맘 먹고 있던 나에겐 큰 걱정거리가 또 생긴 셈이었다. 그런데 리플을 읽고 달고 있던 중 빨간부엉이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퓨터님의 deck는 LED추출이 쉽습니다만... 이라고. 자신감을 얻은 나, 먼저 청축 구하기에 나섰다. 그런데 쓸만한 청축 구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떤 녀석은 너무 째깍거리고 어떤 녀석은 너무 가볍고, 어떤 녀석은 거의 균일감이 깨져있고, 그러다 우연히 지인의 사무실에 놀러갔다가 발견하고야 말았다. 키압이 약간 높은 청축, 아주 단단한 느낌을 주는 녀석이었다. 3484블랙에 끼워져 있던 녀석인데, 아이오에서 나온 것인지, 일본 네오텍에서 나온 녀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감촉은 이제까지 만져본 청축과는 사뭇 달랐다. 원래 상태에서도 클릭음이 그리 높지 않았는데 클릭음을 더 줄여 보고자 스티커 작업을 일단했고, 균일감을 유지해 주기 위해 세척과 윤활을 스위치 하나하나 비교하며 맞춰나갔다. 균일감을 맞추기 힘든 스위치는 솎아 내 버리고 82개만을 남겼다. 이제 다음 단계, 문제의 LED 숄더링, 빨간부엉이님의 쉽다는 말만 믿고 흡착심지를 대고 인두의 열을 가하는 순간... 허거거걱. 양면기판 판 두께만큼 깊숙이 납이 뭉쳐 녹아 있는 것이 아닌가. (참고로 파란불 기판은 뀨뀨님 1800 3rd기판 혹은 언잉크 기판과 비슷하다. 두꺼운 양면기판에 동박이 구멍 안쪽면으로 이어져 연결돼 있는 구조, 빨간불과 달리 뀨뀨님 기판처럼 코팅 비스무래한 도색이 되어 있으며, 작은 접점부위만 한 개씩 납땜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아무튼 뀨뀨님 양면기판 처럼 이 녀석도 납땜 숄더링이 쉽지 않았다. 당연히 제 실력이 모자란 것이 이유이겠지만 정말 LED 추출하면서 혼쭐났다. 스위치 튜닝하고, LED 제거하고 다시 청축스위치 심고 LED 원상복귀 시키는데 걸린 시간은 총 9시간 정도 소요된 것 같다. 눈이 새빨개지고 어깨가 저려온다.

빨간불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다. ~~ 청축 개조를 마친 파란불, 그 결과는... 환골탈태. 정말 김흥국 아저씨의 으아 라는 탄성을 자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주로 사용하던 청축은 블랙이색사출에 알루미늄 보강판을 체결한 카이저 스타일이었는데, 청축 파란불은 그 클릭음이 한 옥타브 정도는 낮게 나오는 것 같다. 스위치 튜닝을 통해서 나타나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빨간불, 파란불 계열이 갖고 있는 키캡의 특징도 한가지 이유일 것 같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건, 무보강입니다. 파란불이 빨간불에 도전할 수 없는 이유가 보강판에 있었던 터이며 최대의 약점이었다면, 청축을 만난 파란불에게 그 약점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닌 다른 면에서의 강점으로 부각시킨 듯 합니다. 그래서 환골탈태입니다. 키감을 단촐하게 표현하자면 청축의 클릭음은 낮은 음이지만 살아있고, 갈축의 부드러움, 백축의 구분감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키매냐 오프모임이 언제쯤 있을지 모르지만 빨간부엉이님께 조심스레 부탁하여 꼭 청축 빨간불과 비교해 보고 싶습니다. 주말 하루 종일 키보드를 붙들고 납연기를 지피더니만 어둑해진 밤중까지 파란불을 붙잡고 타이핑 치면서 킥킥대고 있는 절 보다보다 질렸는지 혼자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묻습니다. 자긴 내가 좋아 그 키보드가 좋아? - 왜 꼭 여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 전 흔쾌히 웃으며 당근 자기가 훨씬 좋지, 물어볼껄 물어봐라... 그렇게 대답하고는 파란불의 USB케이블을 뽑으며 하루를 마감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회개하건데 그 순간에 전 사실 마누라 보다 파란불이 더 좋았더랍니다. ㅋㅋㅋ

Tip.
- 양면기판 납숄더링을 하실 때 흡착심지로 한번에 뽑히지 않는 곳은 계속해서 뽑으려고 하시지 말고, 납을 한번 녹여서 덮어 씌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흡착 시도하시면 쭉 뽑혀 올라오더라구요.
- 빨간불, 파란불 모두 오른쪽 Alt, Ctrl 이 없어서 한영전환키가 없는게 단점인데요. Insert키를 오른쪽 Alt 키로 매핑해서 쓰시면 삽입/수정 전환 기능이 죽지만 한영이라도 우선 살려서 쓸수 있네요.
- 팁은 아니구요, 참고사항. 높이 조정이 안되고 키보드 높이가 생각보다 높아서 어쩔수 없이 실사용하려고 보니 손목 받침대가 필요하네요. 엘리컴 22도 사이즈와 높이가 딱 적당한듯 합니다.
- 키감을 적으면서 빨간불에 도전장을 내민다는 표현을 써서 더 좋다라는 식으로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전 빨간불 청축 만져도 못 봤습니다. 이번 개조청축 키감이 만족스럽다. 그리고 빨간불과 비교해 보고 싶다는 뜻을 적은 것이니 너그러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