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갑자기 뭔 바람이 불었는지 1시간 거리의 서울 중심까지 가서 체리 1800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G80-1865로 추정되는(확정이 아닌 이유는 글의 본문에서...) 물건으로 게이밍에 사용했다는 판매자의 설명이었고 상태는 사진으로도 좋지 않았습니다만 저렴한 가격에 살려보는 재미가 있겠다 싶어 소주 한잔 마신 셈치고 구해왔습니다. 며칠 뒤 세척과 조금은 화제가 되고 있는 게이트론 스위치를 사용해 초간단 정비를 했습니다. 이에 재미삼아 보실만한 정비기와 게이트론 스위치에 대한 사용기를 정리해봅니다.



- 첫인상 - 거친 게이밍에 지친 체리 1800 청축


가지고 올 때 상태는 먼지 덩어리, 일부 스위치 깨진 상태, 게이밍에 주로 이용되는 좌측 모드키와 ASDF를 비롯한 좌측열의 클릭감 상실, 반복 재조립의 결과를 짐작되는 하우징 체결 부위 및 지지대 부러짐, PCB 상부 벗겨짐으로 동판 노출, 거친 조작과 세척 미비가 원인으로 짐작되는 키캡 손상 및 더러움 등으로 총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품의 라벨면도 다 지워진 상태더군요. 다만 이 와중에도 불구하고 분실된 키캡이 없으며 PCB와 USB 포트 등이 정상 작동되고 케이블의 단선 등도 없었습니다. 즉 본질은 살아있지만 옷은 처참해진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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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의 사용감 있는 키보드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숫자 키패드는 유난히 쟁쟁합니다. 각인도 선명하고 클릭감도 신품에 준하더군요. 숫자를 많이 다루어야 한다던가 매크로를 할당해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등이 아니라면 확실히 숫자 키패드는 활용성이 낮다고 다시금 느낍니다. 흥미로운 것은 키보드 사용에 있어 필수적인 편집 키들 역시 쟁쟁합니다. 아마도 그야말로 게이밍에 올인된 경우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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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캡을 모두 제거하니 먼지가 더욱 도드라집니다. 대기중 먼지, 피부 조각, 머리카락, 음식물 찌꺼기 등 흔한 클리닝 제품들의 광고에서 변기보다 더럽다고 하는 키보드의 예가 바로 이것인가 싶습니다. 하지만 어디 이 녀석 판매자만 그렇겠습니다. 사무실에 놓고 쓰는 제 리얼이도 반년에 한번씩 꼬박 청소해 주지면 대충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스테빌의 상태는 매우 심각합니다. 윤활이 마른 것은 물론이고 부식까지 진행되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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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B 상의 마킹으로 대략의 생산년월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체 조립보다 PCB가 먼저 생산되었을 확률이 높으니 대략 2010년 12월 ~ 2011년 초순 사이에 판매된 키보드로 짐작됩니다. USB 포트가 있고 한글 각인이니 G80-1865 일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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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 하단 부위 지지대가 부러져 있고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앞 부분 체결 부위도 부러진 것을 보면 꽤나 자주 분해된 듯 한데 내부 청소는 되어있지 않아 먼지가 많습니다. 그래도 기판은 몇몇 상부 코팅이 벗겨진 부분은 있지만 멀쩡하더군요. 스위치의 교체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만 해도 값어치는 할 것이라고 위안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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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롤러 보드의 분해를 위해서는 T10 드라이버, 즉 별나사 드라이버가 필요합니다. 독일 답다고 할 까나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이런 것들이 튀어 나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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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척 - 일단 깨끗해야 뭐든 할 마음이...


키캡은 자동차 세차용 샴프를 풀어 푹 담궈 두었습니다. 여러 세제류를 써보았는데 제게는 이게 제일 잘 맞더군요. 특히 폼렌스용의(흔히 버플폼이라 부르는) 세제를 적정량 사용하는 것치 최적이었습니다. 물론 하우징은 당연 물 세척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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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B는 물티슈로 1차 대충 정리 후 2차로 면봉을 이용해 구석 구석 청소해주었습니다. 깨끗하게 보입니다만 스위치 하나하나 아래에는 아직도 많은 먼지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스위치를 디솔더링 하는 정성은 없으니 일단은 이 정도로 멈추어 봅니다. 가지고 올 때부터 반쯤 삐딱하게 얹혀살 듯 놓여진 스테빌 적용 키들도 다시 제대로 결착하고 윤활을 해주었습니다. 윤활에 사용한 것은 저렴하고 막쓰기 좋은 신에츠 실리콘 오일 KF-96-100CS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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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M 키캡이라 그런지 청소한다고 했는데도 얼핏 보면 고만 고만 합니다. 반년을 써도, 10년을 써도 그게 그거라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는 POM 키캡입니다만 참으로 세척한 기분 나지 않는 유형입니다. 더군다나 체리의 레이저 각인은 잘 지워지기도 할 뿐더러 가벼운 세척도 전혀 없었는지 많이 지워져 있습니다. 아무리 레이저 각인이라 간간 표면 닦아주고 쓰지 않을 때 수건 정도 덮어주면 오래 유지되는데 참 많이 아쉽습니다. 각인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습기 좀 낮아지면 무광 탑코트라도 뿌려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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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체리 로고는 예쁘군요. 이제 곧 이 녀석이 태어날 때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모습으로 변태 혼종이 될 운명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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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트론 스위치 - 구조의 차이


평이라는게 주관적이기도 하고 커스텀 키보드 제작자들의 입김이 많이 반영되어 있어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그리텍(KBTalking 포함), 게이트론 들의 평이 좋더군요. 보강판용 체리 스위치를 구매하려니 직구해야 하는데다 값도 비싸고 해서 이런 호평에 힘을 얻어 게이트론 클릭 보강판용 스위치를 구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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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론 스위치는 체리 클론이긴 하지만 내부적으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의 스위치 비교 사진은 특히 접점부의 구부림 모양과 클릭감을 유발 시키는 슬라이드 경사부의 굴곡이 체리와 확연히 차이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제조 기술의 한계 또는 발전 등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게이트론이 체리 스위치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망상해보며 이에 대한 기술을 다음 단락에서 이어가겠습니다. ※출처인 Geekhack에서는 투과 타입으로 스위치 하부 프레임이 반투명인 스위치를 대상으로 삼고 있어 본문의 스위치와 달라 보이나 내부 구조는 동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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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이더 비교, 좌 게이트론, 우 체리 (출처 : geekhack - Gateron Teardow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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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점부 비교, 좌 게이트론, 우 체리 (출처 : geekhack - Gateron Teardown) -



- 체리 청축 스위치의 한계 - 소모


체리 청축 스위치의 문제는 위 슬라이더 사진의 접점부와 마찰하는 슬라이더 경사면에 있습니다. 경사 중 약간 파인 부분이 슬라이더 강하 및 상승 시의 클릭감을 유발하는데 예외없이 거칠게 다룬 청축 스위치들은 저 부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으며 자세히 살펴보면 마모되어 있습니다. 이로인한 결과로 넌클릭 보다도 더 낮은 구분감을 넘어 리니어 처럼 쑥 들어가는 하강 시의 불만족스러움이 유발되고 마모가 심한 경우 심지어 제대로 상승 복귀하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곤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내구성 한계가 2011년 이후의 제품부터 급격하게 개선된다는 것입니다. 즉 같은 정도로 사용한 스위치라도 2011~2012년 경 이후 구입한 키보드들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더군요. 마찬가지로 구청축이라 부르는 스위치들에서 해당 문제가 불거지지 않는 것을 보면 중간 중간 어느 시점의 스위치들이 고질적인 내구성 문제를 수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을 가지게 합니다. 저 증상을 완화하겠다고 윤활을 하게되면 그야말로 어정쩡한 리니어 스위치를 얻게 되며 접점부를 어떻게 해보다가는 키입력이 불가능해지거나 무한 반복 입력되는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쯤된 스위치는 버리는 수 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즉 게이트론 청축 스위치가 다른 모양을 채택하고 있는 것의 이유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만.



- 스위치 교체 - 좌측을 갈아 엎기로...


우측 백스페이스, 쉬프트도 감이 먹먹하기는 한데 스테빌 윤활 영향일 수도 있고 클릭감은 살아있기에 윤활이 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 일단 방치하고 좌측의 '게이밍에 쓰여졌을 바로 그 부분들'의 스위치를 교체하기로 합니다. 몇 개의 키는 클릭감이 그나마 조금은 살아있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이 쪽 키들은 모두 다른 키들과 확연하게 차이를 보이며 클릭감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판매자가 FPS나 MMORPG를 열심히 즐기던 게이머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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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솔더링을 마치고 보니 아뿔싸... 다이오드가 없더군요. 집안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말이지요. 결국 기존 스위치의 다이오드를 재활용하기로 하고 디솔더링한 스위치들과 새로운 스위치들을 일일 분해해서 다이오드 옮겼습니다. 이 때 '이왕 이렇게 된 것 윤활을~'이란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역시 귀찮음에 지고는 이내 포기하고 그저 공장표 윤활이 제거되지 않도록 신중함만 기하기로 했습니다. 게이트론 스위치의 상부 투명 재질은 체리 불투명 제질 대비 경도가 더 높아서인지 기존의 뚜따 방법으로 힘을 줄 경우 잘 열리지 않는데다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뒤집어서 분해하는게 편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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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솔더링, 솔더링 하는 과정의 사진은 생략하겠습니다. 제가 손이 2개 뿐이라... 여튼 이렇게 해서 하이브리드 변태 혼종 키보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보기에 따라 체리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일 수도 있겠군요. 부디 1800 팬 분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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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감과 타이핑 테스트 - 꽤 괜찮은~


키압이 상대적으로 약간 높게 느껴집니다만 기존 스위치들이 사용감에 따른 스프링 압력 저하 및 자연 윤활 상태이며 사용감이 거의 없는 숫자 키패드 스위치들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새 스위치의 특징 정도로 얼버무려도 될 듯 합니다. 카일 청축의 조금 늦게 따라오는 듯한 감각도 없고 이 정도면 꽤 만족스럽다는 것이 개인적인 평입니다. 개인적으로 클론 축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그리텍 OEM으로 알려진 KBTalking 청축 스위치이긴 합니다만 이건 얇은 ABS 키캡과 보강판 튼실한 녀석에서서 체감한 것이라 상호 우위를 논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일종의 변명인 타이핑 테스트 영상으로 이어지는 소감은 대신하겠습니다.


- 스위치 교체전 타이핑 테스트 -


- 스위치 교체후 타이핑 테스트 -



- 결론


좀 이상하지만 오래된 상태 좋지 못한 키보드를 닦고 조이며 써보면 그 나름의 맛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사용해본 게이트론 스위치는 만족감이 꽤나 높아서 슬금 전체 모두 게이트론으로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다만 이렇게 정비한 1800은 결국 또 책장 위 보관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역시 아무리 좋다 좋다 해도 숫자 키패드를 쓰지 않는 제게 있어 굳이 익숙하지 않는 배열을 익혀가면서 87을 버리고 1800 배열을 선택할 이유는 없더군요. 키보드가 뭐 그렇지요. 쓰려고 하는 것 보다 느끼는 것 자체가 맛이니까요. 


룰에 따른 평점은 아직은 내구성 검증이 필요한 신생 클론 스위치이니 만큼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게이트론 스위치에 90점을 부여하고 키보드 정비 과정에 대해서는 실력이 일천한데다 타인이 보기에 따라 시간 낭비일 수도 있으니 80점 부여합니다. 따라서 평균으로 85점을 무책임하게 선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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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해서 쓰는 맛과 게이트론 스위치의 느낌, 모두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