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속이고 무려 75,500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하여 입양한 아이.
3일째 집에서 사용하고 난 후로 내가 이 녀석에게 지어준 별명은 도도한 여인이다.
처음 이 녀석을 타견하고 난 느낌은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연애를 거부하는 단단함이었다.
높은 키압과 클릭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없이 쑥 내려가는 느낌은 흡사 멤브레인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다.
게다가 상당히 높은 키보드는 손목받침대까지 필요하게 만들었다.
속목받침대가 필요한 것은 잘빠진 매끈한 몸매로 용서가 되었으나, 멤브레인을 떠올리게 하는 키감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잠시 타건을 멈추고 생각해봤다.
클릭과 같이 재잘거림도 없고 키압은 손끝에 부담을 줄 정도로 높기만 하다.
왜 이런 키를 만들었을까?
생각 끝에 체리 흑축키의 스펙을 찾아봤다.
정말 말 그대로 리니어.
사용자가 키를 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일정한 압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다시 의문.
과연 이런 키가 기계식에 필요할까?
그리고 난 후에 사용기를 쭉 읽어봤다.
많은 유저들의 사용기를 확인한 끝에 이 녀석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속타(스피드타이핑)를 즐기는 유저들에게는 상당한 만족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지금껏 내가 즐겨 사용하던 타이핑 법은 파워타이핑.
이 녀석의 진정한 본질을 맛보기 위해서는 기존에 내가 사용하던 타이핑법의 변경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파워타이핑으로도 속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손과 손가락에 부담을 주지 않는 속타를 하기 위해서는 키를 살짝 누르면서 흘려 쳐내는 방법이라는 것을 아론 넌클릭을 통해서 경험한바가 있었다.
(보충 - 이 방법을 알아낸 것은 아론 넌클릭의 ‘팅팅’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쓰게 된 방법이다.)
높은 키압과 상대적인 반발력을 최대한 쥐어짜면서 키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사용할 수 있다는 직감에 키를 끝까지 누르지 않고 살짝만 눌러봤다.
예상대로 이 녀석은 그 정도에도 반응했다.
파워타이핑이 되지 않도록 손가락에 최대한 힘을 빼고 흘려 쳐봤다.
다라라락.
예상이 맞았다.
정숙하면서도 깔끔한 느낌.
그것은 키를 누르는 손가락과 높은 키압으로 튀어 오르는 키들이 맞물려내는 독특한 소리까지 만들어냈다.
키 자체의 재질이 가진 느낌과 조금은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키들의 움직임은 멤브레인이 줄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을 내게 전해주었다.
드디어 이 필코 흑축이라는 키보드가 나에게 연애를 걸기 시작했다.
‘이제 날 좀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거야?’
녀석은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클릭키보드가 재잘거리며 화사하게 연애를 걸어오는 스타일이라면, 이 녀석은 쉽사리 연애를 걸지 않는 까다로운 구석이 있는 놈이다.
자신을 이해하지 않으면 오히려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내가 이 녀석에게 내린 결론은 이렇다.

[필코 리니어는 유저에게 선택을 받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선택하고 유저의 타법을 바꾸려하는 매우 도도한 여인.]

하지만 이 녀석의 건방짐을 수긍하게 되면 유저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 같은 경우는 상기에 설명한 바와 같이 키보드를 완전히 누르지 않는 흘려 치는 방법으로 이 녀석에게 적응했다.
자신의 방식대로 연애를 걸어준 내게 녀석이 준 것은‘도로록’하는 소리와 스페이스바를 누를 때의 덜컥임과 엔터와 벡스페이스바를 스타카토 식으로 누를 때면 ‘찰칵’하는 깔끔한 끝맺음의 느낌이었다.
‘어때? 이만하면 나도 매력적이지?’
정숙한 검은 빛깔과 왼쪽 상단에 붉은 LED가 나를 향해 웃는다.
얄미운 녀석......
몇 시간의 타견을 마치고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검은 빛깔의 잘빠진 몸매와 정염으로 불타는 붉은 LED.
유저를 가리는 까탈스러움이 있지만 이 녀석은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높은 키압은 연애를 걸기에 여전히 부담스럽다.
만약 높은 키압에 적응할 수만 있다면, 이 녀석의 검은 실루엣과 마성의 붉은 눈빛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때를 꿈꾸며 이 도도한 여인에게 오늘도 연애를 건다.